주문도는 강화군에서 지정한 강화나들길 중 12코스에 해당한다. 주문도의 둘레길은 도로를 따라 걷는 길, 둑방길, 데크길, 해안길, 해수욕장길, 산길, 논길, 밭길, 숲길 등 여러 형태의 길들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주문도 내에서도 갈림길들이 있어 상황에 맞게 동선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강화나들길의 막바지에 접어들면 ‘참 재미있는 길이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문도 대빈창 해변 갯벌 바다에 저녁이 온다. 밀물의 시간이다. 저 넓은 갯벌은 순식간에 다시 바다가 될 것이다. 갯벌은 바다 생물들의 중요한 서식지인 동시에 오염 물질을 정화해 주는 지구의 콩팥이다. 갯벌은 펄 갯벌과 모래 갯벌, 펄과 모래가 뒤섞인 혼합 갯벌 등으로 다양하다. 황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매우 크다. 해안가에는 펄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먼 바다로 가면 모래가 많다. 강화 주변의 바다 속은 펄 갯벌이 대부분이지만 덕적도나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로 가면 대부분 모래 갯벌이다. 육지 가까운 해안은 펄이 많고 먼 바다로 갈수록 모래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황해에는 오랜 세월 중국과 한국의 강에서 쓸려 내려온 모래와 펄 흙으로 채워져 왔다. 황해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큰 바다다. 해안가로 밀물이 들어올 때 가벼운 모래와 펄들이 떠서 밀려든다. 해안 가까이 갈수록 밀물의 미는 힘이 약해진다. 보다 무거운 모래알은 일찍 가라앉고 더 가벼운 펄들은 해안 가까이 밀려온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순간 바다는 잠시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 그때 펄들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서해안 가까이에는 펄 갯벌이 많은 것이다. 이 대빈창 갯벌은 수 천, 수 만 년 들고 난 밀물과 썰물이 만든 펄이다. 바다가 수 만 년 동안 만들어낸 갯벌을 사람은 한순간에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나그네는 섬에서 나고 자랐지만 바닷물에 들어가거나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펄에는 기꺼이 맨발에 맨 몸으로 들어간다. 펄은 어미의 품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펄은 사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농발게와 고둥과 조개와 개불과 낙지와 꼬막이 모두 펄의 속살 깊이 틀어 박혀 산다. 펄은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빨아들인다. 밀물은 순식간에 대빈창 갯벌을 다시 바다 물로 덮어버린다. 밀물 드는 갯벌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바다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실감한다. 이 황혼녘에도 바다는 저렇게 일렁이며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주문도는 볼음도, 아차도, 말도, 네 섬을 아우르는 강화군 서도면의 중심 섬이다. 면의 행정 기관이 모두 주문도에 있다. 서도면은 네 섬을 다 합쳐도 인구 65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면이다. 주문도에만 그중 절반인 300여명이 산다. 작은 섬에 초, 중, 고 세 개의 학교가 다 있다. 다행이다. 학교가 있는 한 섬은 희망이 있다. 섬은 주민들 80%가 개신교 신자다. 섬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어느 한 종교가 다수를 점하면 섬은 그 종교의 왕국이 된다. 종교의 자유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정교일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법은 멀고 삶은 가깝다. 섬의 모든 일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누구든 교회와 등지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 그는 외톨이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누군가는 교회가, 종교가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천만에! 종교가 세속화 됐다는 비난은 부당하고 근거 없다. 어떤 종교가 세속을 떠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종교란 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간을 위해 있지 않은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초세속적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이 섬의 중심은 서도 중앙 교회다. 교회는 1923년에 건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한옥에 서양식 건축 양식을 접목 시킨 교회 건물은 세련되고 기품 있다. 예배당 실내는 절의 법당 같다.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섬 주민들의 마음은 절과 교회를 분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해준다면 그것이 절이든 교회든 무슨 상관이랴.
섬은 작고 농토는 비좁지만 이곳에서도 벼농사를 짓고, 고추와 참깨, 옥수수와 콩,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지어 끼니 거르는 사람 없이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이 있고, 부처 먹을 땅 한 조각만 있으면 아무리 먼 바다 깊은 산속이라도 찾아들어 살았다. 그렇게 수 천 년의 삶을 이어왔다. 외부의 침략자들, 왜구와 해적들의 노략질과 탐욕스런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의 후예다. 슬픔과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기란 진실로 희귀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로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삶이여! 기적 아닌 삶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주문도는 강화군에서 지정한 강화나들길 중 12코스에 해당한다. 주문도의 둘레길은 도로를 따라 걷는 길, 둑방길, 데크길, 해안길, 해수욕장길, 산길, 논길, 밭길, 숲길 등 여러 형태의 길들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주문도 내에서도 갈림길들이 있어 상황에 맞게 동선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강화나들길의 막바지에 접어들면 ‘참 재미있는 길이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문도 대빈창 해변 갯벌 바다에 저녁이 온다. 밀물의 시간이다. 저 넓은 갯벌은 순식간에 다시 바다가 될 것이다. 갯벌은 바다 생물들의 중요한 서식지인 동시에 오염 물질을 정화해 주는 지구의 콩팥이다. 갯벌은 펄 갯벌과 모래 갯벌, 펄과 모래가 뒤섞인 혼합 갯벌 등으로 다양하다. 황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매우 크다. 해안가에는 펄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먼 바다로 가면 모래가 많다. 강화 주변의 바다 속은 펄 갯벌이 대부분이지만 덕적도나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로 가면 대부분 모래 갯벌이다. 육지 가까운 해안은 펄이 많고 먼 바다로 갈수록 모래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황해에는 오랜 세월 중국과 한국의 강에서 쓸려 내려온 모래와 펄 흙으로 채워져 왔다. 황해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큰 바다다. 해안가로 밀물이 들어올 때 가벼운 모래와 펄들이 떠서 밀려든다. 해안 가까이 갈수록 밀물의 미는 힘이 약해진다. 보다 무거운 모래알은 일찍 가라앉고 더 가벼운 펄들은 해안 가까이 밀려온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순간 바다는 잠시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 그때 펄들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서해안 가까이에는 펄 갯벌이 많은 것이다. 이 대빈창 갯벌은 수 천, 수 만 년 들고 난 밀물과 썰물이 만든 펄이다. 바다가 수 만 년 동안 만들어낸 갯벌을 사람은 한순간에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나그네는 섬에서 나고 자랐지만 바닷물에 들어가거나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펄에는 기꺼이 맨발에 맨 몸으로 들어간다. 펄은 어미의 품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펄은 사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농발게와 고둥과 조개와 개불과 낙지와 꼬막이 모두 펄의 속살 깊이 틀어 박혀 산다. 펄은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빨아들인다. 밀물은 순식간에 대빈창 갯벌을 다시 바다 물로 덮어버린다. 밀물 드는 갯벌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바다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실감한다. 이 황혼녘에도 바다는 저렇게 일렁이며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주문도는 볼음도, 아차도, 말도, 네 섬을 아우르는 강화군 서도면의 중심 섬이다. 면의 행정 기관이 모두 주문도에 있다. 서도면은 네 섬을 다 합쳐도 인구 65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면이다. 주문도에만 그중 절반인 300여명이 산다. 작은 섬에 초, 중, 고 세 개의 학교가 다 있다. 다행이다. 학교가 있는 한 섬은 희망이 있다. 섬은 주민들 80%가 개신교 신자다. 섬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어느 한 종교가 다수를 점하면 섬은 그 종교의 왕국이 된다. 종교의 자유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정교일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법은 멀고 삶은 가깝다. 섬의 모든 일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누구든 교회와 등지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 그는 외톨이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누군가는 교회가, 종교가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천만에! 종교가 세속화 됐다는 비난은 부당하고 근거 없다. 어떤 종교가 세속을 떠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종교란 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간을 위해 있지 않은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초세속적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이 섬의 중심은 서도 중앙 교회다. 교회는 1923년에 건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한옥에 서양식 건축 양식을 접목 시킨 교회 건물은 세련되고 기품 있다. 예배당 실내는 절의 법당 같다.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섬 주민들의 마음은 절과 교회를 분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해준다면 그것이 절이든 교회든 무슨 상관이랴.
섬은 작고 농토는 비좁지만 이곳에서도 벼농사를 짓고, 고추와 참깨, 옥수수와 콩,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지어 끼니 거르는 사람 없이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이 있고, 부처 먹을 땅 한 조각만 있으면 아무리 먼 바다 깊은 산속이라도 찾아들어 살았다. 그렇게 수 천 년의 삶을 이어왔다. 외부의 침략자들, 왜구와 해적들의 노략질과 탐욕스런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의 후예다. 슬픔과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기란 진실로 희귀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로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삶이여! 기적 아닌 삶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