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강화나들길

백섬백길

99

17km

몽골제국과 나폴레옹의 공격도 이겨낸 불멸의 섬, 내내 바다를 보면 걸을 수 있는 강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국 돈대길

강화도 강화나들길

백섬백길

99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코스 소개

강화군에는 총 20개 코스 310.5km 이르는 나들길이 있다. 강화 본 섬에 16개, 교동도⋅석모도⋅ 볼음도⋅주문도 등의 관할 섬에 4곳이 있다. 모든 코스가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강화 본섬의 코스 중에서 한 코스만 꼽으라 하면 단연 2코스 호국돈대길이다. 갑곶 돈대에서 초지 돈대에 이르는 17km의 트레일은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보석같은 길이다. 길은 오르막이 거의 없는 평지다. 시멘트 포장길이 많다는 점이 아쉽지만 가는 내내 바다와 갯벌, 들판, 농수로, 갈대밭, 숲길,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이 고단하거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걷는 길 중간중간에 서 있는 보와 진, 돈대들은 강화의 아픈 역사를 몸으로 체험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강화 나들길 제2코스는 힐링 로드인 동시에 역사 공부의 길이다.

코스세부정보

갑곶돈대( 0 km) 용진진( 3 km) 용당돈대( 1.5 km) 화도돈대( 2 km) 오두돈대( 1.1 km) 광성보( 3.1 km) 용두돈대( 0.5 km) 덕진진( 3 km) 초지진( 2.8 km)

교통

A

출발지

도착지

강화는 불멸의 섬이다. 세계 최강 몽골제국의 군대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제국과 미국의 침략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섬이다. 하지만 강화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왕성이 옮겨 오면서 왕궁과 성벽 건설 등의 노역에 시달렸고 조선시대 말에는 프랑스 미국 등 서구열강의 침략 전쟁으로 전란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강화도 나들길 2코스 시작점에 있는 갑곶 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동안 쌓아서 완성했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갑곶은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이라 중요한 돈대였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 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 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다. 갑곶 돈대 부근은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골과의 항전 중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고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병인양요’다. 조선은 1866년 2월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禁壓令) 신도와 신부 등 관려자들을 체포하였다. 187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처형시켰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프랑스는 프랑스인 신부 처형을 군사 문제로 규정했고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의 칙령으로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명분은 프랑스 신부 학살 책임자 처벌과 통상 수호 조약 체결이었다.

1866년 10월 11일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는 군함 7척과 병사 1,520명을 이끌고 즈푸에서 출항하여 조선으로 출병했다. 강화도의 갑곶진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해 10월 15~16일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강화성 동문, 남문 등지에서 충돌해 프랑스군에게 강화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성 일대를 수색해 20만 프랑에 달하는 은괴 19상자, 서적, 무기 등과 외규장각(外奎章閣)의 각종 서적과 귀중품들을 약탈해 갔다. 이후 프랑스군은 김포의 문수산성도 점령했으나 11월 9일 정족산성에서 패배한 뒤 11월 10일 강화성을 불태우고 갑곶진으로 물러나 21일에는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프랑스군 퇴각 후 조선은 군비 증강에 주력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통상수교 거부를 천명하였고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도 강화했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과 싸워 처음으로 물리친 사건이었지만 이로 인한 자신감은 조선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1871년(고종 8)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신미양요’다. 1866년, 대동강에 출현한 미국의 무역선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관리를 납치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평양 주민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불태워 버렸다. 셔먼호 사건 후 미국 정부는 이를 징벌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북경 주재 미국공사 로(F. Law)에게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출동케 했다. 로 공사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와 함께 기함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태우고 1871년 4월 3일 경기도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바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소함정 4척은 강화해협을 측량하기 위해 강화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섰다. 이에 강화수군들이 맹렬한 포격을 퍼붓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한 다음, 광성진을 공격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등 53명이 전사했고 미군 측도 매키(McKee) 해군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첨사(僉使) 이염(李濂)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 선박을 물리치자 미군은 음력 5월 16일(양력 7월 3일) 침략 40여 일 만에 퇴각했다. 신미양요 후 대원군은 척양척화(斥洋斥和)에 더 큰 자신감을 갖고 온 나라 안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이는 조선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등 모두 12개의 진보가 있었다. 진은 한 지역을 지키는 군대의 진영이고 보는 그보다 작은 진영이다. 강화 5진은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이고 7보는 인화보, 승천보, 철곶보, 정포보, 장곶보, 선두보, 광성보다. 진과 보는 규모에 따라 첨사(종3품), 만호(종4품), 별장(종9품)이 지휘했다. 5보 중 월곶진만 첨사가 지휘했고 나머지 4개의 진은 모두 만호가 지휘했다. 7보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인화보만 만호가 나머지 6개의 보는 별장이 지휘했다. 이들 12개의 진보는 각각 3-5씩의 돈대를 관할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했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쳤다. 강화에는 총 53개의 돈대가 있었다.
김포시와 강화군 사이 바다가 강화해협이다. 강화 남쪽 초지리에서 북쪽 월곶리까지 길이 20km다. 강화 김포 두 지역 사이 바다는 폭이 좁아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폭이 200-1000m에 불과할 정도로 좁고 조석 간만의 차도 9m나 된다. 폭이 좁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니 물살이 험하다. 밀물 때 조류 속도가 시속 11-13km에 이른다. 

강화해협 중에서도 김포 덕포진과 강화 광성보 사이 바다는 특히 폭이 좁고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하다. 이 바다가 손몰목이다. 나들길 2코스 중간 광성보에 있는 돈대의 이름이 손돌목 돈대인 것은 그 때문이다. 손돌목에는 뱃사공 손돌의 가슴 아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도망치던 왕이 이곳에서 바다를 건널 때 뱃사공이 손돌(孫乭)이었다. 손돌은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했지만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너게 됐다. 그런데 왕이 보니 노를 젓던 손돌이 급류 쪽으로 배를 몰았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한 왕은 위협을 느끼자 손돌을 죽이려 했다. 손돌은 죽기 전 왕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십시오,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입니다.”

결국 손돌은 죽임을 당했고 급한 조류에 전진하지 못하고 난파의 위협을 느낀 왕은 손돌의 말이 생각나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게 해 바가지가 가는 대로 노를 젓게 했다. 결국 나룻배는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강화에 도착한 왕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손돌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성대히 지내주었다. 손돌의 제삿날이 음력 10월20일 경인데 이때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고 본격적이 겨울 추위가 시작된다. 손돌의 죽음 이후 김포 망덕진과 강화 광성보 용두 돈대 사이 바다를 손돌목이라 이름했으며 이때 부는 바람은 손돌풍(孫乭風)이라고 부르게 됐다. 손돌의 전설이 더욱 슬픈 것은 몽골과의 전쟁 중이었지만 고려 백성인 손돌이 몽골군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고려의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손돌의 전설은 당시 백성들에게는 몽골군이나 고려왕이나 똑같은 폭압자였을 뿐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대동지지>에는 “손돌목은 돌다리가 굳세게 뻗어 있어서 물밑이 마치 문지방과 같다. 중앙이 약간 오목하여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다. 또한 물밑 돌부리가 마치 깊은 낭떠러지 같으며 파도가 굽이치며 흐르는데 여울과 같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기록하고 있다.

강화해협은 염하라고도 하는데(salt river) 병인양요 때 강화를 침략했던 프랑스 군인들이 소금강이라 부른 것을 일본이 한자로 번역해 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해협은 임진강과 합류되는 한강 하구 구간인 조강과 이어져 있다.

강화도 강화나들길

백섬백길

99

17km

몽골제국과 나폴레옹의 공격도 이겨낸 불멸의 섬, 내내 바다를 보면 걸을 수 있는 강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국 돈대길

코스 소개

강화군에는 총 20개 코스 310.5km 이르는 나들길이 있다. 강화 본 섬에 16개, 교동도⋅석모도⋅ 볼음도⋅주문도 등의 관할 섬에 4곳이 있다. 모든 코스가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강화 본섬의 코스 중에서 한 코스만 꼽으라 하면 단연 2코스 호국돈대길이다. 갑곶 돈대에서 초지 돈대에 이르는 17km의 트레일은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보석같은 길이다. 길은 오르막이 거의 없는 평지다. 시멘트 포장길이 많다는 점이 아쉽지만 가는 내내 바다와 갯벌, 들판, 농수로, 갈대밭, 숲길,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이 고단하거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걷는 길 중간중간에 서 있는 보와 진, 돈대들은 강화의 아픈 역사를 몸으로 체험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강화 나들길 제2코스는 힐링 로드인 동시에 역사 공부의 길이다.

코스세부정보

갑곶돈대( 0 km) 용진진( 3 km) 용당돈대( 1.5 km) 화도돈대( 2 km) 오두돈대( 1.1 km) 광성보( 3.1 km) 용두돈대( 0.5 km) 덕진진( 3 km) 초지진( 2.8 km)

교통

A

출발지

도착지

강화는 불멸의 섬이다. 세계 최강 몽골제국의 군대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제국과 미국의 침략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섬이다. 하지만 강화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왕성이 옮겨 오면서 왕궁과 성벽 건설 등의 노역에 시달렸고 조선시대 말에는 프랑스 미국 등 서구열강의 침략 전쟁으로 전란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강화도 나들길 2코스 시작점에 있는 갑곶 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동안 쌓아서 완성했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갑곶은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이라 중요한 돈대였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 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 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다. 갑곶 돈대 부근은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골과의 항전 중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고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병인양요’다. 조선은 1866년 2월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禁壓令) 신도와 신부 등 관려자들을 체포하였다. 187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처형시켰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프랑스는 프랑스인 신부 처형을 군사 문제로 규정했고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의 칙령으로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명분은 프랑스 신부 학살 책임자 처벌과 통상 수호 조약 체결이었다.

1866년 10월 11일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는 군함 7척과 병사 1,520명을 이끌고 즈푸에서 출항하여 조선으로 출병했다. 강화도의 갑곶진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해 10월 15~16일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강화성 동문, 남문 등지에서 충돌해 프랑스군에게 강화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성 일대를 수색해 20만 프랑에 달하는 은괴 19상자, 서적, 무기 등과 외규장각(外奎章閣)의 각종 서적과 귀중품들을 약탈해 갔다. 이후 프랑스군은 김포의 문수산성도 점령했으나 11월 9일 정족산성에서 패배한 뒤 11월 10일 강화성을 불태우고 갑곶진으로 물러나 21일에는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프랑스군 퇴각 후 조선은 군비 증강에 주력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통상수교 거부를 천명하였고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도 강화했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과 싸워 처음으로 물리친 사건이었지만 이로 인한 자신감은 조선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1871년(고종 8)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신미양요’다. 1866년, 대동강에 출현한 미국의 무역선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관리를 납치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평양 주민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불태워 버렸다. 셔먼호 사건 후 미국 정부는 이를 징벌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북경 주재 미국공사 로(F. Law)에게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출동케 했다. 로 공사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와 함께 기함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태우고 1871년 4월 3일 경기도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바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소함정 4척은 강화해협을 측량하기 위해 강화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섰다. 이에 강화수군들이 맹렬한 포격을 퍼붓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한 다음, 광성진을 공격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등 53명이 전사했고 미군 측도 매키(McKee) 해군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첨사(僉使) 이염(李濂)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 선박을 물리치자 미군은 음력 5월 16일(양력 7월 3일) 침략 40여 일 만에 퇴각했다. 신미양요 후 대원군은 척양척화(斥洋斥和)에 더 큰 자신감을 갖고 온 나라 안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이는 조선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등 모두 12개의 진보가 있었다. 진은 한 지역을 지키는 군대의 진영이고 보는 그보다 작은 진영이다. 강화 5진은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이고 7보는 인화보, 승천보, 철곶보, 정포보, 장곶보, 선두보, 광성보다. 진과 보는 규모에 따라 첨사(종3품), 만호(종4품), 별장(종9품)이 지휘했다. 5보 중 월곶진만 첨사가 지휘했고 나머지 4개의 진은 모두 만호가 지휘했다. 7보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인화보만 만호가 나머지 6개의 보는 별장이 지휘했다. 이들 12개의 진보는 각각 3-5씩의 돈대를 관할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했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쳤다. 강화에는 총 53개의 돈대가 있었다.
김포시와 강화군 사이 바다가 강화해협이다. 강화 남쪽 초지리에서 북쪽 월곶리까지 길이 20km다. 강화 김포 두 지역 사이 바다는 폭이 좁아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폭이 200-1000m에 불과할 정도로 좁고 조석 간만의 차도 9m나 된다. 폭이 좁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니 물살이 험하다. 밀물 때 조류 속도가 시속 11-13km에 이른다. 

강화해협 중에서도 김포 덕포진과 강화 광성보 사이 바다는 특히 폭이 좁고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하다. 이 바다가 손몰목이다. 나들길 2코스 중간 광성보에 있는 돈대의 이름이 손돌목 돈대인 것은 그 때문이다. 손돌목에는 뱃사공 손돌의 가슴 아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도망치던 왕이 이곳에서 바다를 건널 때 뱃사공이 손돌(孫乭)이었다. 손돌은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했지만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너게 됐다. 그런데 왕이 보니 노를 젓던 손돌이 급류 쪽으로 배를 몰았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한 왕은 위협을 느끼자 손돌을 죽이려 했다. 손돌은 죽기 전 왕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십시오,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입니다.”

결국 손돌은 죽임을 당했고 급한 조류에 전진하지 못하고 난파의 위협을 느낀 왕은 손돌의 말이 생각나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게 해 바가지가 가는 대로 노를 젓게 했다. 결국 나룻배는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강화에 도착한 왕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손돌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성대히 지내주었다. 손돌의 제삿날이 음력 10월20일 경인데 이때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고 본격적이 겨울 추위가 시작된다. 손돌의 죽음 이후 김포 망덕진과 강화 광성보 용두 돈대 사이 바다를 손돌목이라 이름했으며 이때 부는 바람은 손돌풍(孫乭風)이라고 부르게 됐다. 손돌의 전설이 더욱 슬픈 것은 몽골과의 전쟁 중이었지만 고려 백성인 손돌이 몽골군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고려의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손돌의 전설은 당시 백성들에게는 몽골군이나 고려왕이나 똑같은 폭압자였을 뿐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대동지지>에는 “손돌목은 돌다리가 굳세게 뻗어 있어서 물밑이 마치 문지방과 같다. 중앙이 약간 오목하여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다. 또한 물밑 돌부리가 마치 깊은 낭떠러지 같으며 파도가 굽이치며 흐르는데 여울과 같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기록하고 있다.

강화해협은 염하라고도 하는데(salt river) 병인양요 때 강화를 침략했던 프랑스 군인들이 소금강이라 부른 것을 일본이 한자로 번역해 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해협은 임진강과 합류되는 한강 하구 구간인 조강과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