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칠락산길은 홍어와 고래의 섬, 자산어보의 산실 흑산도를 관통하며 걷는 산길이다. 산길이지만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며 내내 서해 바다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칠락산에 서면 발 아래 흑산도항뿐만 아니라, 이웃섬 영산도와 장도, 저 멀리 홍도까지 망망대해에 흩뿌려져 있는 섬들이 손에 잡힐 듯 한 눈에 들어온다.
흑산도는 홍어의 섬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흑산도 예리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홍어다. 홍어를 파는 식당들과 홍어 위판장. 포구는 홍어 삭은 냄새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홍어는 흑산도를 대표 하는 음식이자 상징이 됐다. 하지만 삭힌 홍어는 흑산도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는 삭힌 홍어를 팔지만 흑산도 사람들은 정작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싱싱하고 찰진 날 것의 생홍어를 주로 먹는다. 삭힌 홍어의 본고장은 흑산도가 아니라 전남 내륙이다. <자산어보>에도 기록 되어 있듯이 나주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원류다.
옛날 상인들은 흑산도 은근 바다에서 잡힌 홍어와 생선을 사서 상선에 싣고 영산강을 따라 올라가 나주의 영산포항까지 운반했다. 바다가 잔잔하면 하루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풍랑이 거세면 보름이고 한달이고 걸렸다. 그 사이 다른 생선들은 썩어서 못 먹게 됐지만 홍어만은 썩지 않고 자연 발효가 됐다. 홍어가 썩지 않았던 것은 홍어의 몸에 요소와 요산이 많은 때문이다. 홍어가 죽으면 요소와 유산이 분해 되면서 암모니아 가스가 나온다. 그 암모니아 가스 덕에 홍어에는 다른 세균이 번성하지 못하고 발효됐다. 그렇게 뱃길이 탄생시킨 것이 삭힌 홍어다. 지금 흑산도에서 삭힌 홍어요리가 생긴 것은 관광객들의 요구로 내륙의 문화가 역수입된 것이다.
생홍어든 삭힌 홍어든 원재료인 흑산홍어가 유명한 것은 맛이 뛰어난 때문이다. 홍어는 대청도 백령도 근해에 살다가 산란철이 되면 흑산도 인근 태도 서바다를 찾는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산란을 하는데 12월 무렵이 산란의 최적기다. 흑산 홍어는 바로 이 산란기의 살찐 홍어이기 때문에 맛이 탁월한 것이다. 홍어는 겨울이 제철이다. 여름 홍어는 물홍어라하는데 맛이 덜해서 잘 먹지 않는다.
흔히 고래는 동해에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포경 근거지라면 동해의 장생포를 떠올린다. 하지만 고래는 동서남해 한국의 바다 모든 곳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과거에는 장생포뿐만 아니라 흑산도, 서귀포, 대청도, 어청도, 등 서남해의 여러 섬도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다. 홍어의 섬 흑산도에 홍어공원은 없지만 고래공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래공원은 흑산도 사람들이 고래판장이라 부르는 예리마을 고래 해체 작업장 있던 자리에 들어서 있다. 일제가 흑산 바다에서 잡아간 대형 고래만해도 1000마리가 넘는다.
홍어나 고래가 아니더라도 실상 흑산도는 해양 문화의 보고다. 고대부터 중국을 오가는 황해 사단 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그 기록이 전한다. 상라산성터와 무심사선원 터,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 터가 발굴 되면서 이 기록이 사실로 확인 됐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흑산)은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고려에서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자들이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흑산도는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유배생활을 하며 조선 최고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집필한 섬이다. 흑산도 해변은 기암괴석의 절경이 즐비해 사철 여행자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산세가 준엄한 흑산도는 상록수림의 보고이기도 하다.
진리 처녀당은 흑산도의 가장 큰 당이다. 옛날 어느 해 옹기장수의 배가 흑산도에 입항했다. 옹기 배에는 네 사람의 선원과 얼굴 고운 소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 옹기 배는 진리 처녀당 아래 부둣가에 정박했다. 선원들이 옹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가자 소년은 당 앞 소나무에 올라 앉아 피리를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년의 피리 소리에 홀린 듯 넋을 잃었다. 진리 처녀 당에 거처하는 처녀당신도 소년의 피리 소리에 매혹 당하고 말았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옹기를 다 판 선원들이 출항하기 위해 돛을 올리자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거세지고 역풍이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자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했다. 선원들은 이유를 알기 위해 마을의 무녀를 찾았다. 무녀는 진리 처녀당의 처녀신이 소년의 피리에 홀려서 배를 못 뜨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선원들은 소년을 섬에 남겨두고 가기로 했다. 거짓 심부름으로 소년이 배에서 내리자 선원들은 급히 배를 돌려 떠나버렸다.
소년은 슬픔과 외로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처녀 당 앞 소나무에 올라가 피리만 불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묻히고 처녀 당신 옆에는 소년의 화상이 봉안 되었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당 근처 길로는 다니지도 못했다 한다. 그만큼 당신을 두려워했다는 뜻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 돼지를 잡고 떡을 해서 제물을 바쳤지만, 지금은 당제가 사라진지 오래다. 건물도 새로 지어 반듯하다.
흑산도 칠락산길은 홍어와 고래의 섬, 자산어보의 산실 흑산도를 관통하며 걷는 산길이다. 산길이지만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며 내내 서해 바다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칠락산에 서면 발 아래 흑산도항뿐만 아니라, 이웃섬 영산도와 장도, 저 멀리 홍도까지 망망대해에 흩뿌려져 있는 섬들이 손에 잡힐 듯 한 눈에 들어온다.
흑산도는 홍어의 섬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흑산도 예리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홍어다. 홍어를 파는 식당들과 홍어 위판장. 포구는 홍어 삭은 냄새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홍어는 흑산도를 대표 하는 음식이자 상징이 됐다. 하지만 삭힌 홍어는 흑산도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는 삭힌 홍어를 팔지만 흑산도 사람들은 정작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싱싱하고 찰진 날 것의 생홍어를 주로 먹는다. 삭힌 홍어의 본고장은 흑산도가 아니라 전남 내륙이다. <자산어보>에도 기록 되어 있듯이 나주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원류다.
옛날 상인들은 흑산도 은근 바다에서 잡힌 홍어와 생선을 사서 상선에 싣고 영산강을 따라 올라가 나주의 영산포항까지 운반했다. 바다가 잔잔하면 하루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풍랑이 거세면 보름이고 한달이고 걸렸다. 그 사이 다른 생선들은 썩어서 못 먹게 됐지만 홍어만은 썩지 않고 자연 발효가 됐다. 홍어가 썩지 않았던 것은 홍어의 몸에 요소와 요산이 많은 때문이다. 홍어가 죽으면 요소와 유산이 분해 되면서 암모니아 가스가 나온다. 그 암모니아 가스 덕에 홍어에는 다른 세균이 번성하지 못하고 발효됐다. 그렇게 뱃길이 탄생시킨 것이 삭힌 홍어다. 지금 흑산도에서 삭힌 홍어요리가 생긴 것은 관광객들의 요구로 내륙의 문화가 역수입된 것이다.
생홍어든 삭힌 홍어든 원재료인 흑산홍어가 유명한 것은 맛이 뛰어난 때문이다. 홍어는 대청도 백령도 근해에 살다가 산란철이 되면 흑산도 인근 태도 서바다를 찾는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산란을 하는데 12월 무렵이 산란의 최적기다. 흑산 홍어는 바로 이 산란기의 살찐 홍어이기 때문에 맛이 탁월한 것이다. 홍어는 겨울이 제철이다. 여름 홍어는 물홍어라하는데 맛이 덜해서 잘 먹지 않는다.
흔히 고래는 동해에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포경 근거지라면 동해의 장생포를 떠올린다. 하지만 고래는 동서남해 한국의 바다 모든 곳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과거에는 장생포뿐만 아니라 흑산도, 서귀포, 대청도, 어청도, 등 서남해의 여러 섬도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다. 홍어의 섬 흑산도에 홍어공원은 없지만 고래공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래공원은 흑산도 사람들이 고래판장이라 부르는 예리마을 고래 해체 작업장 있던 자리에 들어서 있다. 일제가 흑산 바다에서 잡아간 대형 고래만해도 1000마리가 넘는다.
홍어나 고래가 아니더라도 실상 흑산도는 해양 문화의 보고다. 고대부터 중국을 오가는 황해 사단 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그 기록이 전한다. 상라산성터와 무심사선원 터,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 터가 발굴 되면서 이 기록이 사실로 확인 됐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흑산)은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고려에서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자들이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흑산도는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유배생활을 하며 조선 최고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집필한 섬이다. 흑산도 해변은 기암괴석의 절경이 즐비해 사철 여행자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산세가 준엄한 흑산도는 상록수림의 보고이기도 하다.
진리 처녀당은 흑산도의 가장 큰 당이다. 옛날 어느 해 옹기장수의 배가 흑산도에 입항했다. 옹기 배에는 네 사람의 선원과 얼굴 고운 소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 옹기 배는 진리 처녀당 아래 부둣가에 정박했다. 선원들이 옹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가자 소년은 당 앞 소나무에 올라 앉아 피리를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년의 피리 소리에 홀린 듯 넋을 잃었다. 진리 처녀 당에 거처하는 처녀당신도 소년의 피리 소리에 매혹 당하고 말았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옹기를 다 판 선원들이 출항하기 위해 돛을 올리자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거세지고 역풍이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자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했다. 선원들은 이유를 알기 위해 마을의 무녀를 찾았다. 무녀는 진리 처녀당의 처녀신이 소년의 피리에 홀려서 배를 못 뜨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선원들은 소년을 섬에 남겨두고 가기로 했다. 거짓 심부름으로 소년이 배에서 내리자 선원들은 급히 배를 돌려 떠나버렸다.
소년은 슬픔과 외로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처녀 당 앞 소나무에 올라가 피리만 불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묻히고 처녀 당신 옆에는 소년의 화상이 봉안 되었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당 근처 길로는 다니지도 못했다 한다. 그만큼 당신을 두려워했다는 뜻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 돼지를 잡고 떡을 해서 제물을 바쳤지만, 지금은 당제가 사라진지 오래다. 건물도 새로 지어 반듯하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