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모도 삼형제섬길

백섬백길

95

9.6km

다리로 연결된 신도, 시도, 모도 3형제 섬을 모두 걸을 수 있는 섬길

신시모도 삼형제섬길

백섬백길

95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신도리

코스 소개

신도-시도-모도 세 섬은 다리로 이어져 있어 ‘신시모도’나 ‘형제섬’이라고 불린다. 수도권 섬에서는 보기 드문 염전을 해당화 꽃길을 따라 아직 볼 수 있고, 낮은 산을 따라 걷는 등산로와 아기자기한 임도, 갯벌을 따라 걷는 길 등 시시각각 걷는 길의 형태와 풍경이 변한다. 길이 대체로 평평하고 완만하여 라이딩을 하는 분들도 많을 정도니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배로 10분 거리이고 섬 곳곳을 다니는 버스가 있으니 더욱 부담이 더욱 줄어든다. 곧 영종도에서 신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인다고 하니 섬일 때 그 매력을 온전히 느껴보기 바란다.

코스세부정보

신도항( 0 km) 등산로입구( 0.8 km) 신도1리 마을회관( 1 km) 해당화꽃길( 1.8 km) 수기해수욕장( 2 km) 갈림길( 2.1 km) 신도시도 연도교( 0.9 km) 모도리 소공원( 1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연륙교가 생긴 뒤 영종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용유도도 섬이 아니다. 급격하게 불어난 땅과 신도시 덕분에 영종도 구읍 나루 터 이외에는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영종도는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신도시 주민들 중 자신을 인천 시민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들 중 인천 시내에 나가본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710번 버스는 영종도 삼목선착장 입구에서 승객들을 부려 놓고 종점인 화물 터미널로 떠난다. 삼목 선착장이 있는 이곳도 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섬이었다. 삼목도. 섬은 흔적도 없다. 누가 이곳이 수 만 년 세월 섬이었던 것을 짐작이나 할까. 영종도와 용유도, 신불도와 삼목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되면서 또 몇 개의 섬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삼목도에는 공항 활주로가 들어섰다. 삼목 선착장에서 철부선은 장봉도까지 하루 10회 왕복한다. 신도는 기항지다. 시도와 모도는 신도와 다리로 연결 되어 있어 배가 따로 들르지 않는다. 신도는 삼목에서 느린 철부선으로도 불과 10분 거리. 

신도 부두에는 드라마 세트장과 팬션 간판들이 보인다. 한류 바람을 탄 텔레비전 드라마 세트장이 있는 탓에 부두에는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들이 한국관광객 만큼이나 많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세트장을 찾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대체로 섬에 오는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풍경을 따라 오고 다른 하나는 의미를 찾아온다. 풍경을 따라오는 사람은 섬의 외면에 이끌리고 의미를 찾아오는 사람은 섬의 내면에 매혹 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서둘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도 대게는 섬에 몰두하기 보다는 놀이나 식도락에 몰두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섬에 와서도 섬을 보지 못한다. 

신도1리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한다. 주인 할머니는 이른 아침 갯벌에 나가 주어온 굴들을 깬다. 갯벌에는 굴과 바지락, 삐죽, 가무락(모시조개) 등이 널렸어도 채취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개가 아무리 많아도 팔 줄 모르는 사람은 못 캐요. 조개 눈을 알아야 하는데 조개 눈을 모르니까.” 
조개 캐는 것도 기술이다. 갯벌 곳곳에 조개가 숨어 있어도 아무나 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마을은 온통 노인들뿐이니 조개를 캐는 사람은 드물다. 고령의 노인들은 대부분 자식들의 지원이나 생활보조금으로 살아간다. 신도나 시도, 모도에 팬션들이 생긴 것은 불과 4-5년 안팎이다. 영종도에 공항이 생기고 육지와 소통이 쉬워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풀하우스’등의 드라마 세트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섬이 유명세를 치루면서 갑자기 관광객들이 늘었다. 그래도 관광업 종사자는 많지 않다. 신도 3리 쪽은 논이 많아 농사가 많다. 지금도 몇집은 어선을 부리지만 20여년 전부터 어장이 죽으면서 어업이 급격히 쇠퇴했다. 

여자는 용유도 을왕리가 고향이다. 시집와 36년을 신도에서 살았다. 옛날에는 이 섬에도 조기잡이 배들이 많았다. 신도 1리 마을에 지금은 30여 가구가 살지만 한때는 170가구 까지 산 적도 있다. 선원들 10여명을 부리는 중선배가 17척까지 있었다. 중선 배들은 조기철이면 연평도 근해로 가서 조기를 잡았다. 신도 선창가 앞바다에서는 민어를 잡았다. 시아버지는 중선 배를 두 척이나 부리는 큰 선주였고 인천에 상회까지 가진 부자였다. 그때는 신도가 부천군에 속했을 때였고 시아버지는 부천군 어업조합 이사까지 지냈다.

“시아버지가 이 앞 바다에서 민어를 잡았어요. 사람만한 거 배로 하나씩 잡고 그랬지요.  큰건 아주 대단히 컸어요. 그 냥반 굵고 짧게 사시다 가셨지.”
여자는 대단했던 시아버지가 여전히 자랑스럽다. 하지만 시아버지가 병에 걸리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꽃게잡이를 다녔다. 인천 앞바다의 섬은 안 가본 곳이 없다.

“꽃게 잡으러 문갑도까지 갔었어요. 20년 전에는 꽃게잡이로 돈 엄청 벌었어요.”  
꽃게는 가을동안 잡고 겨울에 잠깐 쉰 뒤 봄부터 6월까지 또 잡았다.7~8월은 산란철이라 금어기. 꽃게잡이 때는 한사리 동안 배에서 생활 하다 잠깐씩 집에 다녀오고는 내내 바다에서 살았다. 꽃게잡이 때 바람이 불거나 그런 날은 굴업도로 들어갔다. 바람이 그치지 않으면 며칠씩 굴업도에서 놀고 그랬다. 민어파시의 고장 굴업도의 영화가 꽃게의 시대에도 이어졌었다. 그물에 걸린 게를 딸 사람들도 데리고 가서 굴업도에 방 얻어주고 지내게 했다.  
덕적도 근해에서 꽃게를 잡으면 덕적도 독강으로 운반선이 실으러 왔다. 좋은 물건은 전부 일본으로 갔다.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그랬다. 운반선이 꽃게를 싣고 연안부두로 가면 급랭을 시켜 톱밥에 넣은 뒤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실어 보냈다. 어느 해인가는 한 철 꽃게를 잡고 나서 인천의 상회로 돈을 받으러 갔더니 돈이 어찌나 많은지 상회에서 사람까지 딸려 택시를 태워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바다에서 건진 돈은 물거품이 되더라구요. 재산이 안되요. 이상하게.”
돈이 벌리면 더 크게 벌기위해 더 많이 투자를 했다. 어구를 사들여 어장의 규모를 키우는데 번 돈을 다 썼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턴가 꽃게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쉽게 포기 하지 올해는 들겠지 하고 기대를 버릴 수 없으니 투자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15년 쯤 전부터 꽃게가 아주 안 들었다. 그 사이 벌어놓은 돈은 그야말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너도 나도 어장의 규모를 키우고 어린 꽃게 까지 싹쓸이 하다 꽃게도 씨가 말라 버린 것이다. 조기와 민어가 그랬듯이. 그러다 김발을 하고 김 공장을 했지만 그마저도 접었다. 여자는 이제 갯벌에서 굴과 조개를 캐고 민박을 치며 산다. 비행기 소음 때문에 힘들다.   

시도는 화살 섬이다. 고려시대 말 최영과 이성계의 군대가 마니산에서 이 섬을 과녁삼아 활쏘기를 했다는 전설에서 화살 섬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고려, 조선 시대 내내 강화에 속했던 섬은 강화와 지척이지만 화살이 닿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다. 전설은 전설일 뿐. 시도에는 두 개의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풀 하우스’와 ‘슬픈 연가’ 세트장이 그것이다. 이들 세트장이 아니라도 인천 근교의 섬들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으로 각광을 받은 지 오래다.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장이 관광 상품으로 가치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섬의 풍광 좋은 해변 마다 세트장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마치 섬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처럼 선전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오래된 섬 살이의 흔적들은 증발해 버리고 가상의 드라마가 현실의 자리를 대체해버렸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수 천 년 역사의 섬에서 고작 내세울 것이 멜로드라마나 영화 세트장뿐이라면 그것은 코미디다. 세트장은 우리 문화의 저급함을 드러내는 전시관에 다름 아니다. 저런 세트장들이 대체 몇 년이나 가게 될까. 극이 끝나면 관객은 떠난다. 자치 단체에서는 그저 전시행정과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세트장 만드는 일을 열심히 지원하지만 정작 섬에는 섬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어촌 박물관 하나 없다.

시도에서 신도로 건너는 다리와 선착장부근에는 망둥어 낚시가 한창이다. 제법 씨알이 굵어 졌다. 다 큰 망둥어는 명태크기만큼 자란다. 대게 사람들은 망둥어를 흔하고 별 볼일 없는 물고기로 치부하지만 가을철 망둥어 회는 농어나 민어 회 못지않게 달고 고소하다. 조선시대 유배객 김려의 <우해이어보>도 문절망둑에 대해 “죽을 만들어 먹으면 향기가 그윽해서 쏘가리와 같고 회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망둥어는 약효까지 있다. “이곳(진해) 사람들은 ‘문절 망둑을 많이 먹으면 더욱 잠을 잘 잔다.’ 라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이 고기가 성질이 차서 마음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폐를 건강하게 하기 때문인가 보다.” 

흔히 말뚝 망둥어나 문절 망둥어 등 농어목 망둥어과의 물고기들은 통칭해서 망둥어라 부른다. 생김새도 비슷비슷하다. 주로 민물과 바닷물이 합류되는 곳이나 갯벌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내가 살던 남쪽 섬에서는 문저리라 했었다. 지역에 따라 운저리, 꼬시래기라 부르기도 한다. 망둥어는 회나 탕으로 끓여 먹기도 하지만 말려서 저장해 두고 겨울 내내 쩌 먹거나  쪼려서 반찬으로 먹으면 더 맛있고 요긴한 반찬거리가 된다.

모도는 장봉도, 시도, 신도 등 북도면의 네 유인도중에서 가장 작은 섬이다. 모도의 작은 간척지 논에도 추수가 끝났다. 논에서는 거위 두 마리가 볏짚을 쪼아 먹고 있다. 녀석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한 녀석이 날개를 탈탈 털며 공격해 올 태세다. 주춤 뒤로 물러선다. “야, 야 공격 하지마. 너랑 싸울 일 없어.” 녀석을 달래면서도 나는 경계태세를 늦출 수 없다. 거위는 오리에 비해 사납고 공격적이다. 개처럼 주인을 알아보고 집을 지키기도 한다. 나그네의 평화 의지를 알아차린 거위는 이제 다시 볏짚을 먹는데 집중한다. 

수로 근처, 휠체어에 노인 한 사람 우두커니 앉아 바다를 본다.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잠시 멈칫 하던 노인은 경계를 늦추고 인사를 받는다.

“여긴 뱃일 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잽히는 것도 벨로 없고. 밭농사나 짓지. 논 있는 거 쪼금 하고. 그럭저럭들 살아요.”
어느 섬엘 가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럭저럭 힘겹게 살아간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섬은 천대받고 있는 것이다.

신시모도 삼형제섬길

백섬백길

95

9.6km

다리로 연결된 신도, 시도, 모도 3형제 섬을 모두 걸을 수 있는 섬길

코스 소개

신도-시도-모도 세 섬은 다리로 이어져 있어 ‘신시모도’나 ‘형제섬’이라고 불린다. 수도권 섬에서는 보기 드문 염전을 해당화 꽃길을 따라 아직 볼 수 있고, 낮은 산을 따라 걷는 등산로와 아기자기한 임도, 갯벌을 따라 걷는 길 등 시시각각 걷는 길의 형태와 풍경이 변한다. 길이 대체로 평평하고 완만하여 라이딩을 하는 분들도 많을 정도니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배로 10분 거리이고 섬 곳곳을 다니는 버스가 있으니 더욱 부담이 더욱 줄어든다. 곧 영종도에서 신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인다고 하니 섬일 때 그 매력을 온전히 느껴보기 바란다.

코스세부정보

신도항( 0 km) 등산로입구( 0.8 km) 신도1리 마을회관( 1 km) 해당화꽃길( 1.8 km) 수기해수욕장( 2 km) 갈림길( 2.1 km) 신도시도 연도교( 0.9 km) 모도리 소공원( 1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연륙교가 생긴 뒤 영종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용유도도 섬이 아니다. 급격하게 불어난 땅과 신도시 덕분에 영종도 구읍 나루 터 이외에는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영종도는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신도시 주민들 중 자신을 인천 시민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들 중 인천 시내에 나가본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710번 버스는 영종도 삼목선착장 입구에서 승객들을 부려 놓고 종점인 화물 터미널로 떠난다. 삼목 선착장이 있는 이곳도 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섬이었다. 삼목도. 섬은 흔적도 없다. 누가 이곳이 수 만 년 세월 섬이었던 것을 짐작이나 할까. 영종도와 용유도, 신불도와 삼목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되면서 또 몇 개의 섬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삼목도에는 공항 활주로가 들어섰다. 삼목 선착장에서 철부선은 장봉도까지 하루 10회 왕복한다. 신도는 기항지다. 시도와 모도는 신도와 다리로 연결 되어 있어 배가 따로 들르지 않는다. 신도는 삼목에서 느린 철부선으로도 불과 10분 거리. 

신도 부두에는 드라마 세트장과 팬션 간판들이 보인다. 한류 바람을 탄 텔레비전 드라마 세트장이 있는 탓에 부두에는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들이 한국관광객 만큼이나 많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세트장을 찾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대체로 섬에 오는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풍경을 따라 오고 다른 하나는 의미를 찾아온다. 풍경을 따라오는 사람은 섬의 외면에 이끌리고 의미를 찾아오는 사람은 섬의 내면에 매혹 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서둘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도 대게는 섬에 몰두하기 보다는 놀이나 식도락에 몰두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섬에 와서도 섬을 보지 못한다. 

신도1리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한다. 주인 할머니는 이른 아침 갯벌에 나가 주어온 굴들을 깬다. 갯벌에는 굴과 바지락, 삐죽, 가무락(모시조개) 등이 널렸어도 채취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개가 아무리 많아도 팔 줄 모르는 사람은 못 캐요. 조개 눈을 알아야 하는데 조개 눈을 모르니까.” 
조개 캐는 것도 기술이다. 갯벌 곳곳에 조개가 숨어 있어도 아무나 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마을은 온통 노인들뿐이니 조개를 캐는 사람은 드물다. 고령의 노인들은 대부분 자식들의 지원이나 생활보조금으로 살아간다. 신도나 시도, 모도에 팬션들이 생긴 것은 불과 4-5년 안팎이다. 영종도에 공항이 생기고 육지와 소통이 쉬워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풀하우스’등의 드라마 세트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섬이 유명세를 치루면서 갑자기 관광객들이 늘었다. 그래도 관광업 종사자는 많지 않다. 신도 3리 쪽은 논이 많아 농사가 많다. 지금도 몇집은 어선을 부리지만 20여년 전부터 어장이 죽으면서 어업이 급격히 쇠퇴했다. 

여자는 용유도 을왕리가 고향이다. 시집와 36년을 신도에서 살았다. 옛날에는 이 섬에도 조기잡이 배들이 많았다. 신도 1리 마을에 지금은 30여 가구가 살지만 한때는 170가구 까지 산 적도 있다. 선원들 10여명을 부리는 중선배가 17척까지 있었다. 중선 배들은 조기철이면 연평도 근해로 가서 조기를 잡았다. 신도 선창가 앞바다에서는 민어를 잡았다. 시아버지는 중선 배를 두 척이나 부리는 큰 선주였고 인천에 상회까지 가진 부자였다. 그때는 신도가 부천군에 속했을 때였고 시아버지는 부천군 어업조합 이사까지 지냈다.

“시아버지가 이 앞 바다에서 민어를 잡았어요. 사람만한 거 배로 하나씩 잡고 그랬지요.  큰건 아주 대단히 컸어요. 그 냥반 굵고 짧게 사시다 가셨지.”
여자는 대단했던 시아버지가 여전히 자랑스럽다. 하지만 시아버지가 병에 걸리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꽃게잡이를 다녔다. 인천 앞바다의 섬은 안 가본 곳이 없다.

“꽃게 잡으러 문갑도까지 갔었어요. 20년 전에는 꽃게잡이로 돈 엄청 벌었어요.”  
꽃게는 가을동안 잡고 겨울에 잠깐 쉰 뒤 봄부터 6월까지 또 잡았다.7~8월은 산란철이라 금어기. 꽃게잡이 때는 한사리 동안 배에서 생활 하다 잠깐씩 집에 다녀오고는 내내 바다에서 살았다. 꽃게잡이 때 바람이 불거나 그런 날은 굴업도로 들어갔다. 바람이 그치지 않으면 며칠씩 굴업도에서 놀고 그랬다. 민어파시의 고장 굴업도의 영화가 꽃게의 시대에도 이어졌었다. 그물에 걸린 게를 딸 사람들도 데리고 가서 굴업도에 방 얻어주고 지내게 했다.  
덕적도 근해에서 꽃게를 잡으면 덕적도 독강으로 운반선이 실으러 왔다. 좋은 물건은 전부 일본으로 갔다.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그랬다. 운반선이 꽃게를 싣고 연안부두로 가면 급랭을 시켜 톱밥에 넣은 뒤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실어 보냈다. 어느 해인가는 한 철 꽃게를 잡고 나서 인천의 상회로 돈을 받으러 갔더니 돈이 어찌나 많은지 상회에서 사람까지 딸려 택시를 태워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바다에서 건진 돈은 물거품이 되더라구요. 재산이 안되요. 이상하게.”
돈이 벌리면 더 크게 벌기위해 더 많이 투자를 했다. 어구를 사들여 어장의 규모를 키우는데 번 돈을 다 썼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턴가 꽃게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쉽게 포기 하지 올해는 들겠지 하고 기대를 버릴 수 없으니 투자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15년 쯤 전부터 꽃게가 아주 안 들었다. 그 사이 벌어놓은 돈은 그야말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너도 나도 어장의 규모를 키우고 어린 꽃게 까지 싹쓸이 하다 꽃게도 씨가 말라 버린 것이다. 조기와 민어가 그랬듯이. 그러다 김발을 하고 김 공장을 했지만 그마저도 접었다. 여자는 이제 갯벌에서 굴과 조개를 캐고 민박을 치며 산다. 비행기 소음 때문에 힘들다.   

시도는 화살 섬이다. 고려시대 말 최영과 이성계의 군대가 마니산에서 이 섬을 과녁삼아 활쏘기를 했다는 전설에서 화살 섬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고려, 조선 시대 내내 강화에 속했던 섬은 강화와 지척이지만 화살이 닿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다. 전설은 전설일 뿐. 시도에는 두 개의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풀 하우스’와 ‘슬픈 연가’ 세트장이 그것이다. 이들 세트장이 아니라도 인천 근교의 섬들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으로 각광을 받은 지 오래다.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장이 관광 상품으로 가치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섬의 풍광 좋은 해변 마다 세트장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마치 섬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처럼 선전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오래된 섬 살이의 흔적들은 증발해 버리고 가상의 드라마가 현실의 자리를 대체해버렸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수 천 년 역사의 섬에서 고작 내세울 것이 멜로드라마나 영화 세트장뿐이라면 그것은 코미디다. 세트장은 우리 문화의 저급함을 드러내는 전시관에 다름 아니다. 저런 세트장들이 대체 몇 년이나 가게 될까. 극이 끝나면 관객은 떠난다. 자치 단체에서는 그저 전시행정과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세트장 만드는 일을 열심히 지원하지만 정작 섬에는 섬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어촌 박물관 하나 없다.

시도에서 신도로 건너는 다리와 선착장부근에는 망둥어 낚시가 한창이다. 제법 씨알이 굵어 졌다. 다 큰 망둥어는 명태크기만큼 자란다. 대게 사람들은 망둥어를 흔하고 별 볼일 없는 물고기로 치부하지만 가을철 망둥어 회는 농어나 민어 회 못지않게 달고 고소하다. 조선시대 유배객 김려의 <우해이어보>도 문절망둑에 대해 “죽을 만들어 먹으면 향기가 그윽해서 쏘가리와 같고 회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망둥어는 약효까지 있다. “이곳(진해) 사람들은 ‘문절 망둑을 많이 먹으면 더욱 잠을 잘 잔다.’ 라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이 고기가 성질이 차서 마음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폐를 건강하게 하기 때문인가 보다.” 

흔히 말뚝 망둥어나 문절 망둥어 등 농어목 망둥어과의 물고기들은 통칭해서 망둥어라 부른다. 생김새도 비슷비슷하다. 주로 민물과 바닷물이 합류되는 곳이나 갯벌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내가 살던 남쪽 섬에서는 문저리라 했었다. 지역에 따라 운저리, 꼬시래기라 부르기도 한다. 망둥어는 회나 탕으로 끓여 먹기도 하지만 말려서 저장해 두고 겨울 내내 쩌 먹거나  쪼려서 반찬으로 먹으면 더 맛있고 요긴한 반찬거리가 된다.

모도는 장봉도, 시도, 신도 등 북도면의 네 유인도중에서 가장 작은 섬이다. 모도의 작은 간척지 논에도 추수가 끝났다. 논에서는 거위 두 마리가 볏짚을 쪼아 먹고 있다. 녀석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한 녀석이 날개를 탈탈 털며 공격해 올 태세다. 주춤 뒤로 물러선다. “야, 야 공격 하지마. 너랑 싸울 일 없어.” 녀석을 달래면서도 나는 경계태세를 늦출 수 없다. 거위는 오리에 비해 사납고 공격적이다. 개처럼 주인을 알아보고 집을 지키기도 한다. 나그네의 평화 의지를 알아차린 거위는 이제 다시 볏짚을 먹는데 집중한다. 

수로 근처, 휠체어에 노인 한 사람 우두커니 앉아 바다를 본다.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잠시 멈칫 하던 노인은 경계를 늦추고 인사를 받는다.

“여긴 뱃일 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잽히는 것도 벨로 없고. 밭농사나 짓지. 논 있는 거 쪼금 하고. 그럭저럭들 살아요.”
어느 섬엘 가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럭저럭 힘겹게 살아간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섬은 천대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