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이작도 갯티길

백섬백길

91

8.6km

한국 최고령 암석이 있는 섬, 해적들이 살던 해적섬(이적도)이 최고의 생태 섬으로!

대이작도 갯티길

백섬백길

91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리

코스 소개

갯티’는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나는 ‘조간대(潮間帶)’를 말한다. 대이작도 갯티길은 산능선과 해안가를 따라 대이작도를 한바퀴 돌아보는 둘레길로, 간조시에는 갯티를 걸어갈 수 있다. 물이 빠지면 장장 50만평에 달하는 모래평원인 ‘풀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적같은 장면을 볼 수 있다. 대이작도 갯티길 끝 지점에서 25억살 먹은 남한 최고령 암석을 만난다. 대이작도는 서해 어느 섬 보다 아름다운 모래해변이 많다. 걷기와 해수욕을 함께 즐 길 수 있는 최고의 휴양 섬이다.

코스세부정보

대이작도항( 0 km) 부아산( 2.1 km) 송이산( 1.4 km) 계남분교( 2.2 km) 작은풀안( 2.9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을 약탈해 갔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하고 해적질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했다.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그 격언은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까지 통용된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있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왜군과의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다. 임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들이 양민으로 환원 됐다. 이작도의 해적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 해적질을 했던 것일까. 그들은 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고 해적으로 이 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이작도는 면적 2.571㎢, 해안선 길이 11.8㎞. 경기만 다도해 섬 중 하나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5km 지점에 위치한다. 대이작도 서쪽으로 0.2㎞ 거리에 소이작도가 있고, 동북쪽으로는 1㎞ 거리에 승봉도가 있다.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최고봉은 188m의 송이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고구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따라 소속이 바뀌곤 했다. 고려 현종 9년(1018) 수원에 소속됐다가 뒤에 인천에 속하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에서 1983년 경기도 옹진군 자월면에 속했고 현재는 인천시 소속이다.

세종실록 18년에 이작도가 목장이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즉도(伊則島)는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양읍지(南陽邑誌)』에는 이작(伊作)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사』변광수전(邊光秀傳)에는 고려 말기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이작도 갯티길

백섬백길

91

8.6km

한국 최고령 암석이 있는 섬, 해적들이 살던 해적섬(이적도)이 최고의 생태 섬으로!

코스 소개

갯티’는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나는 ‘조간대(潮間帶)’를 말한다. 대이작도 갯티길은 산능선과 해안가를 따라 대이작도를 한바퀴 돌아보는 둘레길로, 간조시에는 갯티를 걸어갈 수 있다. 물이 빠지면 장장 50만평에 달하는 모래평원인 ‘풀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적같은 장면을 볼 수 있다. 대이작도 갯티길 끝 지점에서 25억살 먹은 남한 최고령 암석을 만난다. 대이작도는 서해 어느 섬 보다 아름다운 모래해변이 많다. 걷기와 해수욕을 함께 즐 길 수 있는 최고의 휴양 섬이다.

코스세부정보

대이작도항( 0 km) 부아산( 2.1 km) 송이산( 1.4 km) 계남분교( 2.2 km) 작은풀안( 2.9 km)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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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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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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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지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을 약탈해 갔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하고 해적질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했다.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그 격언은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까지 통용된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있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왜군과의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다. 임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들이 양민으로 환원 됐다. 이작도의 해적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 해적질을 했던 것일까. 그들은 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고 해적으로 이 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이작도는 면적 2.571㎢, 해안선 길이 11.8㎞. 경기만 다도해 섬 중 하나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5km 지점에 위치한다. 대이작도 서쪽으로 0.2㎞ 거리에 소이작도가 있고, 동북쪽으로는 1㎞ 거리에 승봉도가 있다.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최고봉은 188m의 송이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고구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따라 소속이 바뀌곤 했다. 고려 현종 9년(1018) 수원에 소속됐다가 뒤에 인천에 속하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에서 1983년 경기도 옹진군 자월면에 속했고 현재는 인천시 소속이다.

세종실록 18년에 이작도가 목장이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즉도(伊則島)는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양읍지(南陽邑誌)』에는 이작(伊作)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사』변광수전(邊光秀傳)에는 고려 말기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