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오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 둘 절로 떠오르게 된다. 경관과 완만한 언덕길, 백사장을 따라 이어지는 길과 솔숲 길 모두.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해변과 가까이에 조성된 트레일 길로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코스의 북쪽인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이 위치한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오른쪽으로 서해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인 삼봉해변과 이어서 펼쳐지는 울창한 곰솔숲, 방포항 근처에는 천연기념물 모감주나무 군락이 인상적이다.
옛날 안면도는 3무(三無)의 섬으로 유명했다. 기와집이 없고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안면도 사람들의 인심이 순후해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한다. 6.25때 피난민들이 들어와서도 굶주리지 않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안면도의 인심과 도끼 한 자루만 있으면 살 수 있을 만큼 울창한 산림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숲이 에너지의 주유소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면서 인심도 많이 바뀌었다. 안면도에 기와집이 없는 것은 부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금기 때문이었다. 안면도는 섬의 모양이 지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안면도 남쪽의 원산도는 닭 모양이다. 두 섬은 오래전부터 경쟁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섬에 대한 자긍이기도 할 터이다.
지네와 닭은 상극이다. 실상 지네는 닭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지만 닭이 바닥에서 자면 지내가 닭의 항문으로 들어가 내장을 다 파먹어버린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안면도를 지네의 섬으로 생각한 안면도 사람들은 지붕에 기와를 올리면 지네가 모두 깔려 죽고 만다고 생각해 지네가 살기 좋은 초가로만 지붕을 올렸다한다. 지네가 모두 죽으면 원산도에 지고 만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속설이라도 독충인 지네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뱀처럼 지네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 유래된 전설이 아닌가 싶다.
태안군 안면도는 본디 섬이 아니었다. 태안반도와 이어진 내륙이었는데 1638년(인조 16)에 충청관찰사 김육(金堉)이 세곡선을 비롯한 조운의 편의를 위해 운하를 파서 섬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섬이 된 안면도가 내륙과 다시 연결된 것은 350년만인 1970년대 말이다. 면적 113.46㎢, 해안선 길이 120㎞나 되는, 한국에서 6번째로 큰 섬이다. 남북 24㎞, 동서 5.5㎞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북쪽의 국사봉(國師峰, 107m)을 제외하면 대체로 100m 이하의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태안에는 원북면에서 고남면까지 7개 구간, 97㎞의 <태안해변길>이란 생태탐방로가 있다. 또 태안군에서 천리포 윗 구간에 조성한 만대항에서 이원방파제를 거쳐 내려오는 <솔향기길> 4개 구간 42.5km를 합하면 태안의 트레일은 도합 140km에 이른다. 이날은 안면도에 있는 <태안해변길> 5코스 <노을길>을 걷는다. 안면읍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까지 12㎞에 이르는 트레일은 내내 솔숲과 모래 해변을 따라 나있어 <태안해변길> 중 백미로 꼽힌다.
코스의 시작점인 백사장항은 안면도의 대표적인 어항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꽃게잡이, 가을부터는 대하잡이로 성황을 이룬다. 연휴나 축제기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백사장항이란 지명은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에는 ‘백사정(白沙汀)’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1872년지방지도>에는 ‘백사장(白沙場)’으로 기록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사장항과 건너편 드르니항 사이 바다 위로는 인도교가 놓여 있다. ‘드르니’란 어여쁜 지명은 ‘들르다’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됐다. 어선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일제강점기에 ‘신온항’으로 바뀌었다가 2003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백사장항 주변은 몰려든 관광객들과 횟집들의 호객소리로 요란스럽다. 저 호객꾼들의 행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병폐다. 호객꾼들 때문에 어항의 풍경을 차분히 둘러볼 수가 없다. 횟집들마다 새우튀김이며 꽃게튀김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데 하나쯤 사먹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서둘러 난장판을 빠져나간다. 솔숲 입구를 따라 <노을길>이 시작된다. 어린 소나무들은 안면송이 아니라 곰솔이라 아쉽지만 그래도 솔향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곰솔’은 잎이 곰털처럼 거칠다 해서 곰솔이다. 바닷가에서 잘 자라 해송이라고도 하고 줄기가 검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솔숲 곳곳에는 야영을 하는지 텐트들이 쳐져있다. 15분 남짓 솔숲을 빠져나오면 백사장해변이다. 사람들은 텐트 안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거나 낮잠을 잔다. 또 더러는 해변에 나가 낚시를 하거나 고동을 줍거나 물에 발을 담그고 논다. 그 또한 자연을 즐기는 방법이지만 이 좋은 숲길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이 길에 온 사람들이 길을 걷지 않는 이유는 뭘까? 길을 걷는 것 또한 의무나 과제처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일부라도 산책하며 소요할 생각은 왜 않는 걸까.
이 길은 목적지가 없다. 시작과 끝을 표시한 것은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시작도 시작이 아니고 끝도 끝이 아니다.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내는 지점이 시작이고 끝이다. 나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길의 목적지는 길 그 자체다. 길에 속박된다면, 완주 같은 것이 오로지 길을 걷는 이유라면 이 길은 도그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길에 나와서는 과제하듯 업무하듯 길을 걷는 태도는 바꿔야 마땅하다.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걸으면 그뿐이다. 완주를 강요하는 길 따위는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변을 지나던 길이 어느새 다시 솔숲으로 이어진다. 숲 곳곳에는 죽은 소나무들이 쌓여있다. 야생동물을 위한 비오톱(Biotope)이다. 태풍 피해목들을 이용하여 야생동물이나 벌레들이 거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나무들은 죽어서도 다른 목숨들을 살린다. 길을 또 어느새 창기리해변으로 접어든다. 이 해변의 명물은 삼봉이다. ‘삼봉’은 하나의 작은 바위산인데 마치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삼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작은 산이지만 삼봉이 있어 창기리 앞바다 삼섬, 뒷섬, 갈마섬, 지도, 거아도, 곰섬 등의 무인도와 함께 절경이 완성된다. 삼봉 근처에는 삼봉자율관리공동체에서 세운, 수자원 보호를 위한 입간판이 서 있다. “어린 꽃게를 잡지 맙시다.” 6.4cm 이하의 어린 꽃게를 잡지 말라는 의미다.
하지만 선주들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어린 꽃게와 물고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다. 탐욕은 눈을 멀게 한다. 그것이 결국은 제 발등을 찍는 일이란 걸 모른다. 칠산어장과 연평어장에서 조기의 씨가 마른 것이 그 때문이고 굴업도와 덕적도 어장에서 민어가 사라진 것이 또한 그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결과 한때는 황해바다에서 꽃게도 씨가 마른 적이 있었다. 다시 꽃게도 조기도 잡히지만 지금처럼 탐욕스런 남획이 계속된다면 이들 또한 마침내는 멸종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작은 꽃게를 이르는 ‘사시랭이’란 말이 재밌다. 대체로 표준어라는 것들은 밋밋히고 재미가 없다. 지역에서 쓰는 다양한 언어들을 거세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고기 이름들은 그저 서울말일 뿐이다. 삼치라고 다 삼치가 아니다. 도시 사람들이 삼치라고 알고 먹는 것은 삼치 새끼다. 무게가 3킬로그램쯤은 돼야 삼치라 한다. 삼치 새끼는 ‘고시’라 부른다. 도미 새끼는 상사리, 농어 새끼는 껄떡, 민어 새끼는 통치, 어류는 크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표준말이란 언어정책은 살아있는 언어를 죽이는 언어말살정책에 다름 아니다. 지역을 다니다 보면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말들을 채집하는 재미가 솔찬타. ‘솔찬타’는 말의 뜻은 무얼까? 한번 짐작해 보시라.
“가도 가도 황톳길”을 노래하던 한하운의 시가 생각나는 길이다. 이곳은 가도 가도 솔밭길, 가도 가도 모래사막의 길이다. 길은 갈수록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이 길이야말로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기지포해변의 솔숲 앞으로는 해안사구가 잘 발달해 있다. 2002년부터 훼손되었던 지역을 다시 복원한 해안사구다. 사구는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언덕이다. 해안사구에는 갯그렁이나 통보리 사초, 갯메꽃, 갯방풍, 순비기나무, 해당화, 좀보리 사초, 모래지치 등 다양한 사구 식물들이 살아간다. 사구 식물들은 연약해 보여도 뿌리가 깊이 뻗어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 튼튼하게 잘 살아간다. 몸에 털이 있거나 코팅이 되어 있어 염분에도 잘 견디고 수분이 마르는 것을 방지한다. 식물의 살아남기 위한 지혜다.
푸르른 사구와 거기서 터 잡고 살아가는 식물들을 보며 가는 것도 이 길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해안사구의 중요성은 단진 사구 식물들의 서식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구는 무엇보다 지하수를 정수해 저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모래섬인 임자도나, 자은도, 삽시도 같은 섬들에 그렇게 많은 물치(물웅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구가 저장해준 물 덕에 사구 뒤에 마을이 형성되고 농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구가 잘 발달한 해안은 경관도 빼어나다. 녹색식물들이 모래를 덮고 있는 풍경은 깊고 푸르른 생애처럼 장관이다.
밧개해변의 보물은 독살이다. 돌살, 돌발, 석방렴, 원담 등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독살은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함정어법인데 돌그물인 셈이다. 해안이나 섬들에는 예전부터 많은 독살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원형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이 밧개해변의 독살은 현재까지도 사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더 깊다. 밧개해변의 산길을 넘어서면 두에기해변이다. 안면도의 해변 중에서도 가장 작은 해변이다. 택시기사의 말에 따르면 음침한 기운이 돈다 해서 섬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 해변이란다. 기사도 어째서 음침한지 그 이유는 잘 모른다. 무얼까. 생애의 그늘처럼 정체모를 해변의 어둠은?
<노을길>의 끝은 방포항 건너 꽃지해수욕장 입구다. 이 해변의 상징은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다. 어느 해안이나 섬에도 깃들어 있듯이 이 바위 또한 슬픈 전설을 품고 있다. 안내판에 바위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0여 년 전, 신라 42대 흥덕왕 4년(838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지금의 전남 완도인 청해진을 기점으로 하여 북으로는 장산곶, 중앙부로는 견승포(지금의 안면도 방포)를 기지로 삼고 기지사령관으로 승언이라는 사람을 두었는데 승언에게는 미도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행복하게 지냈다. 어느 해 승언이 해상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의 아내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2년을 넘게 기다리다 지처 마침내 이 바위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 이 바위는 미도가 남편을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고 서 있던 모습으로 변했다. 수년 후 승언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으나 아내 미도가 자신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하다가 그 옆에 죽어 그 또한 바위가 되니 사람들이 이 바위를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승언리’라는 지명도 승언이의 슬픈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대자연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한다. 그저 두 발로 솔숲과 해변을 걸었을 뿐인데 어떤 물질로도 채울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라도 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간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들었는가.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물질문명의 발전이 더 큰 편리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 편리함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 문명의 이기들은 늘 상시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언제든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실상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안전을 지켜줄 기술보다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들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
물질문명과는 달리 정신문명은 수천 년 전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스승으로 떠받드는 부처와 예수, 공자와 노자, 그들이 살던 수천 년 전보다 우리의 정신문명이 더 발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여전히 그들의 정신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설파했던 박애와 자비와 평화와 평등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가 이루지 못한 가치들이다. 인간성의 발전을 담보할 정신문명의 발전이 없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류에게 독이 될 확률이 더 크다.
물질문명이 우리를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인간은 물질문명을 계속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욕망은 지식에 비례한다. 발전하지 않으면 욕망도 늘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너무 많은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더 많은 것의 노예가 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문명은 이쯤에서 멈추어도 좋겠다. 그 길이 인류와 지구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길을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오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 둘 절로 떠오르게 된다. 경관과 완만한 언덕길, 백사장을 따라 이어지는 길과 솔숲 길 모두.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해변과 가까이에 조성된 트레일 길로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코스의 북쪽인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이 위치한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오른쪽으로 서해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인 삼봉해변과 이어서 펼쳐지는 울창한 곰솔숲, 방포항 근처에는 천연기념물 모감주나무 군락이 인상적이다.
옛날 안면도는 3무(三無)의 섬으로 유명했다. 기와집이 없고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안면도 사람들의 인심이 순후해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한다. 6.25때 피난민들이 들어와서도 굶주리지 않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안면도의 인심과 도끼 한 자루만 있으면 살 수 있을 만큼 울창한 산림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숲이 에너지의 주유소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면서 인심도 많이 바뀌었다. 안면도에 기와집이 없는 것은 부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금기 때문이었다. 안면도는 섬의 모양이 지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안면도 남쪽의 원산도는 닭 모양이다. 두 섬은 오래전부터 경쟁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섬에 대한 자긍이기도 할 터이다.
지네와 닭은 상극이다. 실상 지네는 닭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지만 닭이 바닥에서 자면 지내가 닭의 항문으로 들어가 내장을 다 파먹어버린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안면도를 지네의 섬으로 생각한 안면도 사람들은 지붕에 기와를 올리면 지네가 모두 깔려 죽고 만다고 생각해 지네가 살기 좋은 초가로만 지붕을 올렸다한다. 지네가 모두 죽으면 원산도에 지고 만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속설이라도 독충인 지네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뱀처럼 지네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 유래된 전설이 아닌가 싶다.
태안군 안면도는 본디 섬이 아니었다. 태안반도와 이어진 내륙이었는데 1638년(인조 16)에 충청관찰사 김육(金堉)이 세곡선을 비롯한 조운의 편의를 위해 운하를 파서 섬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섬이 된 안면도가 내륙과 다시 연결된 것은 350년만인 1970년대 말이다. 면적 113.46㎢, 해안선 길이 120㎞나 되는, 한국에서 6번째로 큰 섬이다. 남북 24㎞, 동서 5.5㎞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북쪽의 국사봉(國師峰, 107m)을 제외하면 대체로 100m 이하의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태안에는 원북면에서 고남면까지 7개 구간, 97㎞의 <태안해변길>이란 생태탐방로가 있다. 또 태안군에서 천리포 윗 구간에 조성한 만대항에서 이원방파제를 거쳐 내려오는 <솔향기길> 4개 구간 42.5km를 합하면 태안의 트레일은 도합 140km에 이른다. 이날은 안면도에 있는 <태안해변길> 5코스 <노을길>을 걷는다. 안면읍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까지 12㎞에 이르는 트레일은 내내 솔숲과 모래 해변을 따라 나있어 <태안해변길> 중 백미로 꼽힌다.
코스의 시작점인 백사장항은 안면도의 대표적인 어항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꽃게잡이, 가을부터는 대하잡이로 성황을 이룬다. 연휴나 축제기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백사장항이란 지명은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에는 ‘백사정(白沙汀)’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1872년지방지도>에는 ‘백사장(白沙場)’으로 기록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사장항과 건너편 드르니항 사이 바다 위로는 인도교가 놓여 있다. ‘드르니’란 어여쁜 지명은 ‘들르다’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됐다. 어선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일제강점기에 ‘신온항’으로 바뀌었다가 2003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백사장항 주변은 몰려든 관광객들과 횟집들의 호객소리로 요란스럽다. 저 호객꾼들의 행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병폐다. 호객꾼들 때문에 어항의 풍경을 차분히 둘러볼 수가 없다. 횟집들마다 새우튀김이며 꽃게튀김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데 하나쯤 사먹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서둘러 난장판을 빠져나간다. 솔숲 입구를 따라 <노을길>이 시작된다. 어린 소나무들은 안면송이 아니라 곰솔이라 아쉽지만 그래도 솔향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곰솔’은 잎이 곰털처럼 거칠다 해서 곰솔이다. 바닷가에서 잘 자라 해송이라고도 하고 줄기가 검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솔숲 곳곳에는 야영을 하는지 텐트들이 쳐져있다. 15분 남짓 솔숲을 빠져나오면 백사장해변이다. 사람들은 텐트 안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거나 낮잠을 잔다. 또 더러는 해변에 나가 낚시를 하거나 고동을 줍거나 물에 발을 담그고 논다. 그 또한 자연을 즐기는 방법이지만 이 좋은 숲길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이 길에 온 사람들이 길을 걷지 않는 이유는 뭘까? 길을 걷는 것 또한 의무나 과제처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일부라도 산책하며 소요할 생각은 왜 않는 걸까.
이 길은 목적지가 없다. 시작과 끝을 표시한 것은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시작도 시작이 아니고 끝도 끝이 아니다.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내는 지점이 시작이고 끝이다. 나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길의 목적지는 길 그 자체다. 길에 속박된다면, 완주 같은 것이 오로지 길을 걷는 이유라면 이 길은 도그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길에 나와서는 과제하듯 업무하듯 길을 걷는 태도는 바꿔야 마땅하다.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걸으면 그뿐이다. 완주를 강요하는 길 따위는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변을 지나던 길이 어느새 다시 솔숲으로 이어진다. 숲 곳곳에는 죽은 소나무들이 쌓여있다. 야생동물을 위한 비오톱(Biotope)이다. 태풍 피해목들을 이용하여 야생동물이나 벌레들이 거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나무들은 죽어서도 다른 목숨들을 살린다. 길을 또 어느새 창기리해변으로 접어든다. 이 해변의 명물은 삼봉이다. ‘삼봉’은 하나의 작은 바위산인데 마치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삼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작은 산이지만 삼봉이 있어 창기리 앞바다 삼섬, 뒷섬, 갈마섬, 지도, 거아도, 곰섬 등의 무인도와 함께 절경이 완성된다. 삼봉 근처에는 삼봉자율관리공동체에서 세운, 수자원 보호를 위한 입간판이 서 있다. “어린 꽃게를 잡지 맙시다.” 6.4cm 이하의 어린 꽃게를 잡지 말라는 의미다.
하지만 선주들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어린 꽃게와 물고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다. 탐욕은 눈을 멀게 한다. 그것이 결국은 제 발등을 찍는 일이란 걸 모른다. 칠산어장과 연평어장에서 조기의 씨가 마른 것이 그 때문이고 굴업도와 덕적도 어장에서 민어가 사라진 것이 또한 그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결과 한때는 황해바다에서 꽃게도 씨가 마른 적이 있었다. 다시 꽃게도 조기도 잡히지만 지금처럼 탐욕스런 남획이 계속된다면 이들 또한 마침내는 멸종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작은 꽃게를 이르는 ‘사시랭이’란 말이 재밌다. 대체로 표준어라는 것들은 밋밋히고 재미가 없다. 지역에서 쓰는 다양한 언어들을 거세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고기 이름들은 그저 서울말일 뿐이다. 삼치라고 다 삼치가 아니다. 도시 사람들이 삼치라고 알고 먹는 것은 삼치 새끼다. 무게가 3킬로그램쯤은 돼야 삼치라 한다. 삼치 새끼는 ‘고시’라 부른다. 도미 새끼는 상사리, 농어 새끼는 껄떡, 민어 새끼는 통치, 어류는 크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표준말이란 언어정책은 살아있는 언어를 죽이는 언어말살정책에 다름 아니다. 지역을 다니다 보면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말들을 채집하는 재미가 솔찬타. ‘솔찬타’는 말의 뜻은 무얼까? 한번 짐작해 보시라.
“가도 가도 황톳길”을 노래하던 한하운의 시가 생각나는 길이다. 이곳은 가도 가도 솔밭길, 가도 가도 모래사막의 길이다. 길은 갈수록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이 길이야말로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기지포해변의 솔숲 앞으로는 해안사구가 잘 발달해 있다. 2002년부터 훼손되었던 지역을 다시 복원한 해안사구다. 사구는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언덕이다. 해안사구에는 갯그렁이나 통보리 사초, 갯메꽃, 갯방풍, 순비기나무, 해당화, 좀보리 사초, 모래지치 등 다양한 사구 식물들이 살아간다. 사구 식물들은 연약해 보여도 뿌리가 깊이 뻗어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 튼튼하게 잘 살아간다. 몸에 털이 있거나 코팅이 되어 있어 염분에도 잘 견디고 수분이 마르는 것을 방지한다. 식물의 살아남기 위한 지혜다.
푸르른 사구와 거기서 터 잡고 살아가는 식물들을 보며 가는 것도 이 길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해안사구의 중요성은 단진 사구 식물들의 서식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구는 무엇보다 지하수를 정수해 저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모래섬인 임자도나, 자은도, 삽시도 같은 섬들에 그렇게 많은 물치(물웅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구가 저장해준 물 덕에 사구 뒤에 마을이 형성되고 농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구가 잘 발달한 해안은 경관도 빼어나다. 녹색식물들이 모래를 덮고 있는 풍경은 깊고 푸르른 생애처럼 장관이다.
밧개해변의 보물은 독살이다. 돌살, 돌발, 석방렴, 원담 등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독살은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함정어법인데 돌그물인 셈이다. 해안이나 섬들에는 예전부터 많은 독살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원형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이 밧개해변의 독살은 현재까지도 사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더 깊다. 밧개해변의 산길을 넘어서면 두에기해변이다. 안면도의 해변 중에서도 가장 작은 해변이다. 택시기사의 말에 따르면 음침한 기운이 돈다 해서 섬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 해변이란다. 기사도 어째서 음침한지 그 이유는 잘 모른다. 무얼까. 생애의 그늘처럼 정체모를 해변의 어둠은?
<노을길>의 끝은 방포항 건너 꽃지해수욕장 입구다. 이 해변의 상징은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다. 어느 해안이나 섬에도 깃들어 있듯이 이 바위 또한 슬픈 전설을 품고 있다. 안내판에 바위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0여 년 전, 신라 42대 흥덕왕 4년(838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지금의 전남 완도인 청해진을 기점으로 하여 북으로는 장산곶, 중앙부로는 견승포(지금의 안면도 방포)를 기지로 삼고 기지사령관으로 승언이라는 사람을 두었는데 승언에게는 미도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행복하게 지냈다. 어느 해 승언이 해상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의 아내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2년을 넘게 기다리다 지처 마침내 이 바위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 이 바위는 미도가 남편을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고 서 있던 모습으로 변했다. 수년 후 승언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으나 아내 미도가 자신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하다가 그 옆에 죽어 그 또한 바위가 되니 사람들이 이 바위를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승언리’라는 지명도 승언이의 슬픈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대자연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한다. 그저 두 발로 솔숲과 해변을 걸었을 뿐인데 어떤 물질로도 채울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라도 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간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들었는가.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물질문명의 발전이 더 큰 편리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 편리함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 문명의 이기들은 늘 상시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언제든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실상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안전을 지켜줄 기술보다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들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
물질문명과는 달리 정신문명은 수천 년 전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스승으로 떠받드는 부처와 예수, 공자와 노자, 그들이 살던 수천 년 전보다 우리의 정신문명이 더 발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여전히 그들의 정신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설파했던 박애와 자비와 평화와 평등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가 이루지 못한 가치들이다. 인간성의 발전을 담보할 정신문명의 발전이 없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류에게 독이 될 확률이 더 크다.
물질문명이 우리를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인간은 물질문명을 계속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욕망은 지식에 비례한다. 발전하지 않으면 욕망도 늘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너무 많은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더 많은 것의 노예가 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문명은 이쯤에서 멈추어도 좋겠다. 그 길이 인류와 지구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