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내리면 귀여운 고슴도치 조형물이 먼저 우리를 반긴다. 고슴도치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아 고슴도치 위(蝟)를 써서 위도라 불리는 이곳은 고슴도치의 가시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주는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깊은금해수욕장에서 미영금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물개바위와 거북바위, 주상절리 절벽이 있다. 마을이 동백꽃 모양이라는 대리마을의 분홍 지붕 집들이나 조기 파시 벽화, 위도해수욕장의 몽돌 소리 등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마음 쓸쓸한 석양녘이면 문득 문득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리곤 하는 매창의 시다. 세상에 연시(戀詩)는 넘쳐나지만 이보다 더 애절한 연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어째서 연시들은 이별한 뒤에야 비로소 절창이 되는 걸까. 사랑이 한참 불타오를 때는 서로를 탐닉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애절한 시 따위는 쓸 틈도 없다는 것일까.
<이화우 흩날릴 제>는 1586년 부안의 관기로 있던 매창(부안현 아전 이탕종과 관비인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매창의 본명은 계생이다)이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이별한 뒤 쓴 시조다. 처음 만날 당시 매창은 14세, 유희경은 42세였다(후일 유희경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한 공로로 면천이 된 뒤 종2품 가의대부에까지 이른다). 이별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쓸쓸한 가을 저녁쯤 매창은 문득 유희경이 그리워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으니 매창은 결코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갔고 그녀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쾌락을 위해 그녀의 몸과 기예만을 탐한 남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희경은 그녀의 몸과 정신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중 하나였다.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에는 매창을 위해 쓴 시가 7편이나 전한다.
서른여덟 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매창의 전반기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유희경이었다면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었다. 1601년 스물아홉의 매창은 세곡선을 감독하는 전운 판관이란 관리 신분으로 부안에 내려왔던 허균과 첫 만남을 가졌고 이내 마음이 통해 이후 10년 동안 신분을 초월한 벗으로 지낸다.
처음 허균과 만나 종일토록 시를 주고받았던 매창은 그날 잠자리에 기생이었던 조카딸을 들여보낸다. 천하의 바람둥이 허균이 매창을 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거문고와 시를 쓰는 능력이 탁월한 매창을 오래오래 친구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물론 당시 매창은 허균의 친구였던 김제군수 이귀의 애인이었던 탓도 있을 테지만 글쎄^^). 이날 만남을 시작으로 둘의 우정은 매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1608년 공주목사로 재직하다 파직 당한 허균은 아주 눌러 살 생각으로 부안 변산의 우반골에 정사암이란 집을 짓고 들어가 칩거한다. 물론 그 기간은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허균의 부안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던가 보다. 이때도 매창과 교유하며 수많은 시를 주고받았음은 물론이다.
우반골은 1653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 1673)이 은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김성환 군산대 교수 같은 이는 허균이 부안 우반골에 거주하며 <홍길동전>을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홍길동전>의 이상국인 율도국(栗島國)이 부안의 섬 위도를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율도국의 모델이 위도라는 주장은 정설처럼 굳어져 유통되고 있다. 위도를 소개하는 책자들이나 격포에서 들어가는 위도행 여객선 안에도 그런 주장이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다.
아마도 매창과의 우정에서 비롯된 혀균의 부안 땅에 대한 애착과 은거가 그런 추측들을 나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주장들이 뚜렷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은 있다. 특히 율도국의 모티브를 위도에서 찾았을 개연성은 크다. 물론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오늘날의 오끼나와인 유구국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크다. 허균은 <수호지>에서 영감을 받아 <홍길동전>을 썼고 <수호지>의 마지막 장에는 관군의 토벌에도 살아남은 양산박의 도적들 일부가 배를 타고 유구로 가서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허균이 유구국을 모델로 율도국을 창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허균은 아득히 먼 유구가 아니라 변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위도라는 섬에서 영감을 받아 차별이 없는 이상국가 건설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겠는가. 그가 혁명을 꿈꾸며 동지들을 불러 모으고 거사를 도모하던 곳이 부안 땅 아니었던가. <홍길동전>의 한문 필사본으로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위도라는 이름은 같다. 부안의 위도(蝟島)와 <위도왕전>의 위도(韋島)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연치고는 흥미로운 우연이 아니겠는가. ©섬연구소 강제윤
허균이 세우고자 했던 율도국은 단지 섬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율도국의 모델이 유구냐 위도냐를 따지는 논의는 부질없다. 또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부질없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던 이상향은 새로운 조선이었고 홍길동은 다름 아닌 허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과는 달리 혁명을 꿈꾸던 허균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도 가고 매창도 가고 홍길동도 가고 허균이 바라보며 이상향을 꿈꾸었던 위도는 남아 있다. 오늘 우리는 위도로 간다. 허균의 못다 이룬 꿈을 찾아 율도국으로 간다.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의 본섬. 위도(蝟島)는 생긴 모양이 고슴도치와 닮았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라 했다고 전해진다. 위도의 관문 파장금은 고슴도치의 입에 해당한다. 위도 사람들은 풍요로운 섬이었던 위도가 가난한 섬이 된 것은 파장금항 앞에 방파제를 막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재물이 들어오는 입을 막아버렸으니 돈이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위도는 조기의 황금어장이었던 칠산 바다의 중심 섬이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봄철 조기 파시가 열리면 위도에는 수천 척의 배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고 위도는 돈벼락을 맞을 정도로 융성했다. 파시가 사라지고 칠산 바다에 조기의 씨가 마르면서 위도는 한적한 섬이 돼버렸다.
위도 파장금 바로 건너에는 식도라는 섬이 있다. 고슴도치 입인 파장금 앞에 있어서 고슴도치의 밥이다. 그래서 이름도 밥섬, 식도. 지금은 식도의 경기가 더 좋다. 큰 어선들이 많아 어업 활동이 활발하다. 위도 주민들은 이 또한 방파제로 입을 막아버린 때문이라 풀이한다. 고슴도치가 밥을 못 먹으니 식도에는 밥(재물)이 쌓인다는 것이다.
위도는 옛날부터 부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엽전으로 수십 리 떨어진 왕등도까지 다리를 놓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재산이 많았던 안동 장씨 부자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론 식도 역시 옛날부터 어업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식도의 송부자 이야기도 유명한 일화다. 위도 인근 칠산어장 때문이었는지 다른 섬들에 비해 위도 주변 섬들에는 유독 부자 이야기가 많다.
안동 장씨 부자의 축재 과정은 불분명하지만 송 부자가 부를 축적한 것은 청어잡이였다고 전하는데 실상은 조기잡이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청어는 조선시대 선비들을 먹여 살린 물고기라 해서 비유어라고도 했다. 서해바다가 넘치도록 청어가 많이 잡혔지만 어느 순간 청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참조기다. 송 부자가 수산물 무역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일제 강점기는 서해 바다에 청어가 아니라 조기떼가 넘치던 시대다. 그러니 송 부자의 치부 수단은 청어가 아니라 칠산어장의 조기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위도는 칠산어장의 중심 섬이었다. 칠산 어장은 영광군 칠산도 인근의 바다를 말하는데, 영광의 송이도, 안마도에서 부안의 위도 사이의 바다다. 그 바다의 중심에 칠산도가 있어서 칠산어장이라 한다. 칠산도는 7개의 작은 섬들이 나란히 서 있어서 칠산도다. 동지나해에서 월동한 조기떼는 가거도, 흑산도, 비금도, 도초도를 거처 안마도 내해로 들어와 칠산어장에서 산란을 시작하며 황금의 조기 어장을 형성했다. 칠산어장 때문에 그 유명한 영광굴비도 생길 수 있었다. 굴비의 대명사인 영광굴비는 대부분 칠산어장에서 잡힌 조기들을 영광 법성포로 가져가서 말린 것이다. 그런데 칠산어장 조기잡이의 중심이 되는 곳은 영광 법성포가 아니라 위도였다.
위도 조기 파시는 흑산도 파시, 연평도 파시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 하나였다. 살구꽃이 피면 칠산도 부근에 참조기떼가 몰려왔다. 위도 치도리의 늙은 살구나무에 살구꽃 피면 위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찾아왔다. 이때는 조기떼를 쫓아온 수천 척의 조기잡이배가 위도 앞바다를 가득 채웠고 파장금항에는 파시가 섰다. 파장금은 파도가 길어지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얻은 이름이라 전한다. 파시가 서면 파장금 항에는 선구점, 이발소, 다방, 세탁소, 의상실, 식당, 술집 등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조기 파시 때는 수천 척의 어선들이 몰려들었고 술집 색시들만 400여 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 봄 파시철이면 모래밭에 가건물들이 들어섰다. 술집과 상점 등으로 한철을 보내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겨울 파도에 집들이 다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봄이 오면 사람들은 제비처럼 다시 집을 지었고 어선들이 몰려와 파시가 섰다. 바람이라도 불어 파도가 거세 조업을 할 수 없는 날이면 파장금은 선원들로 떠들썩해지고 술집마다 돈이 돌았다.
1960년대 말 칠산어장을 비롯한 서해안에서 조기가 자취를 감추고 조기 파시는 끝났다. 조기가 사라진 뒤에도 위도에서는 다른 파시가 계속됐다. 고등어, 삼치, 아지, 병어 등의 어장이 형성됐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가건물 대신 파장금 마을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 외지에서 온 장사치들은 파시 때마다 건물을 임대해 한철 장사를 한 뒤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섬 주민 중에서도 술집을 열고 붙박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때는 파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그래도 파시 때면 삼사백 척의 어선이 몰려오고 선원들도 천 명 이상이 북적거렸다. 그러다보니 사건사고도 많았다.
1985년 여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젊은 사내 하나가 음독을 했다. 사내는 유서를 남겼고 얼마 뒤 서해의 섬 마을에 사내 둘이 나타났다. 전북 부안군 위도 파장금. 사내들은 부둣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다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후 다섯 시쯤이나 됐을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들 몇이 부둣가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한 여자들은 부둣가 술집의 작부들이었다. 손님을 끌기 위해 나왔으나 부둣가에는 손님이 없었다. 여자들은 흩어져서 다방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고 있는 손님들을 꼬여낼 참이었다. 마침 커피를 마시는 사내 둘을 만났다. 허름한 차림이 선원들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아마도 고깃배를 타러 위도에 온 모양이었다. 수작이 오가고 사내들은 작부를 따라 나섰다. 술집은 색시집이었다.
사내들은 아가씨 둘을 옆에 끼고 술을 마셨다. 술을 잘 못하는지 사내들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씨들이 먼저 취하고 말았다. 사내들은 아가씨들의 사연을 물었다. 한 아가씨는 미자, 또 한 아가씨는 정숙이라 했다. 아가씨들은 고향은 달랐으나 사연은 비슷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미자는 상경해서 공장을 다녔다. 정숙이는 식모살이를 했다. 공원과 식모일로는 병든 부모 병원비랑 어린 동생들 학비 마련이 어려웠다. 처음에는 찻집 종업원으로, 다방 레지로 일하다 술집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돈은 벌리지 않고 갈수록 빚만 늘어났다. 그러다 결국 빚 때문에 이 외딴 섬까지 팔려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빚은 줄지 않았다. 둘 다 몇 백만 원의 빚이 있었다. 빚 때문에 섬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다음 날 사내들은 섬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파장금 마을에 수십 명의 경찰병력이 들이닥쳤다. 경비정을 타고 온 경찰들은 열 몇 곳이나 되는 술집들마다 입구를 차단하고 포주들과 아가씨들을 조사했다. 밤 12시쯤 경찰은 포주들과 아가씨 70여 명을 경비정에 싣고 뭍으로 나갔다. 포주들은 경찰서로 잡아가고 아가씨들에게는 모두 3만 원씩의 여비를 줘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며칠 전 위도 파장금을 찾아왔던 사내 둘은 서울의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경찰출입기자였던 두 사람은 영등포역 앞에서 자살한 사내의 유서를 보고 위도에 잠입취재를 하러 갔었다. 섬으로 팔려간 작부들의 절박한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자 경찰이 작전에 나선 것이었다.
영등포역 앞에서 사내는 왜 음독을 했던 것일까. 유서에는 그 사연이 적혀 있었다. 사내는 선원이었다. 고기잡이배에서 밥을 하는 화부였다. 파장금항에는 법성관, 삼화관, 신흥관, 신설관, 부산관, 인천관, 남창관 등의 색시집이 있었고 다방도 10여 개나 됐다. 선구점과 이발관, 피복점, 호수당구장, 오성상회, 영신상회 등 생필품점도 있었다. 사내도 선원들이랑 그중 한 색시집을 단골로 들락거렸고 거기서 한 색시와 눈이 맞았다. 사내는 여자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여자는 진 빚이 많았다. 포주들은 화장품이나 의상비 등으로 아가씨가 빚을 지게 만들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밭도 매고 나무도 해오게 하며 노예처럼 부렸다.
사내도 돈이 없었다. 사내는 여자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서울 사는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여자를 빼낼 방법이 없어지자 사내는 절망에 빠졌다. 술을 마시고 사내는 유서를 썼다. 여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해달라고 하소연했다. 마침내 사내는 극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사내는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던져서 사랑하는 여자를 구해냈다. 그 후 위도 파장금에는 색시집들이 사라졌고 정박하려던 어선들도 색시집이 없는 것을 알고 뱃머리를 돌렸다. 차츰 파장금항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파장금에는 단 한 곳의 유흥업소도 없다. 하지만 파장금 마을 뒷골목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골목을 걸으면 우리는 모두가 시간여행자라도 된 것처럼 아득해질 것이다.
섬에서 내리면 귀여운 고슴도치 조형물이 먼저 우리를 반긴다. 고슴도치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아 고슴도치 위(蝟)를 써서 위도라 불리는 이곳은 고슴도치의 가시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주는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깊은금해수욕장에서 미영금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물개바위와 거북바위, 주상절리 절벽이 있다. 마을이 동백꽃 모양이라는 대리마을의 분홍 지붕 집들이나 조기 파시 벽화, 위도해수욕장의 몽돌 소리 등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마음 쓸쓸한 석양녘이면 문득 문득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리곤 하는 매창의 시다. 세상에 연시(戀詩)는 넘쳐나지만 이보다 더 애절한 연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어째서 연시들은 이별한 뒤에야 비로소 절창이 되는 걸까. 사랑이 한참 불타오를 때는 서로를 탐닉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애절한 시 따위는 쓸 틈도 없다는 것일까.
<이화우 흩날릴 제>는 1586년 부안의 관기로 있던 매창(부안현 아전 이탕종과 관비인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매창의 본명은 계생이다)이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이별한 뒤 쓴 시조다. 처음 만날 당시 매창은 14세, 유희경은 42세였다(후일 유희경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한 공로로 면천이 된 뒤 종2품 가의대부에까지 이른다). 이별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쓸쓸한 가을 저녁쯤 매창은 문득 유희경이 그리워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으니 매창은 결코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갔고 그녀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쾌락을 위해 그녀의 몸과 기예만을 탐한 남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희경은 그녀의 몸과 정신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중 하나였다.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에는 매창을 위해 쓴 시가 7편이나 전한다.
서른여덟 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매창의 전반기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유희경이었다면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었다. 1601년 스물아홉의 매창은 세곡선을 감독하는 전운 판관이란 관리 신분으로 부안에 내려왔던 허균과 첫 만남을 가졌고 이내 마음이 통해 이후 10년 동안 신분을 초월한 벗으로 지낸다.
처음 허균과 만나 종일토록 시를 주고받았던 매창은 그날 잠자리에 기생이었던 조카딸을 들여보낸다. 천하의 바람둥이 허균이 매창을 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거문고와 시를 쓰는 능력이 탁월한 매창을 오래오래 친구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물론 당시 매창은 허균의 친구였던 김제군수 이귀의 애인이었던 탓도 있을 테지만 글쎄^^). 이날 만남을 시작으로 둘의 우정은 매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1608년 공주목사로 재직하다 파직 당한 허균은 아주 눌러 살 생각으로 부안 변산의 우반골에 정사암이란 집을 짓고 들어가 칩거한다. 물론 그 기간은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허균의 부안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던가 보다. 이때도 매창과 교유하며 수많은 시를 주고받았음은 물론이다.
우반골은 1653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 1673)이 은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김성환 군산대 교수 같은 이는 허균이 부안 우반골에 거주하며 <홍길동전>을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홍길동전>의 이상국인 율도국(栗島國)이 부안의 섬 위도를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율도국의 모델이 위도라는 주장은 정설처럼 굳어져 유통되고 있다. 위도를 소개하는 책자들이나 격포에서 들어가는 위도행 여객선 안에도 그런 주장이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다.
아마도 매창과의 우정에서 비롯된 혀균의 부안 땅에 대한 애착과 은거가 그런 추측들을 나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주장들이 뚜렷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은 있다. 특히 율도국의 모티브를 위도에서 찾았을 개연성은 크다. 물론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오늘날의 오끼나와인 유구국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크다. 허균은 <수호지>에서 영감을 받아 <홍길동전>을 썼고 <수호지>의 마지막 장에는 관군의 토벌에도 살아남은 양산박의 도적들 일부가 배를 타고 유구로 가서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허균이 유구국을 모델로 율도국을 창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허균은 아득히 먼 유구가 아니라 변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위도라는 섬에서 영감을 받아 차별이 없는 이상국가 건설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겠는가. 그가 혁명을 꿈꾸며 동지들을 불러 모으고 거사를 도모하던 곳이 부안 땅 아니었던가. <홍길동전>의 한문 필사본으로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위도라는 이름은 같다. 부안의 위도(蝟島)와 <위도왕전>의 위도(韋島)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연치고는 흥미로운 우연이 아니겠는가. ©섬연구소 강제윤
허균이 세우고자 했던 율도국은 단지 섬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율도국의 모델이 유구냐 위도냐를 따지는 논의는 부질없다. 또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부질없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던 이상향은 새로운 조선이었고 홍길동은 다름 아닌 허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과는 달리 혁명을 꿈꾸던 허균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도 가고 매창도 가고 홍길동도 가고 허균이 바라보며 이상향을 꿈꾸었던 위도는 남아 있다. 오늘 우리는 위도로 간다. 허균의 못다 이룬 꿈을 찾아 율도국으로 간다.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의 본섬. 위도(蝟島)는 생긴 모양이 고슴도치와 닮았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라 했다고 전해진다. 위도의 관문 파장금은 고슴도치의 입에 해당한다. 위도 사람들은 풍요로운 섬이었던 위도가 가난한 섬이 된 것은 파장금항 앞에 방파제를 막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재물이 들어오는 입을 막아버렸으니 돈이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위도는 조기의 황금어장이었던 칠산 바다의 중심 섬이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봄철 조기 파시가 열리면 위도에는 수천 척의 배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고 위도는 돈벼락을 맞을 정도로 융성했다. 파시가 사라지고 칠산 바다에 조기의 씨가 마르면서 위도는 한적한 섬이 돼버렸다.
위도 파장금 바로 건너에는 식도라는 섬이 있다. 고슴도치 입인 파장금 앞에 있어서 고슴도치의 밥이다. 그래서 이름도 밥섬, 식도. 지금은 식도의 경기가 더 좋다. 큰 어선들이 많아 어업 활동이 활발하다. 위도 주민들은 이 또한 방파제로 입을 막아버린 때문이라 풀이한다. 고슴도치가 밥을 못 먹으니 식도에는 밥(재물)이 쌓인다는 것이다.
위도는 옛날부터 부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엽전으로 수십 리 떨어진 왕등도까지 다리를 놓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재산이 많았던 안동 장씨 부자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론 식도 역시 옛날부터 어업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식도의 송부자 이야기도 유명한 일화다. 위도 인근 칠산어장 때문이었는지 다른 섬들에 비해 위도 주변 섬들에는 유독 부자 이야기가 많다.
안동 장씨 부자의 축재 과정은 불분명하지만 송 부자가 부를 축적한 것은 청어잡이였다고 전하는데 실상은 조기잡이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청어는 조선시대 선비들을 먹여 살린 물고기라 해서 비유어라고도 했다. 서해바다가 넘치도록 청어가 많이 잡혔지만 어느 순간 청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참조기다. 송 부자가 수산물 무역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일제 강점기는 서해 바다에 청어가 아니라 조기떼가 넘치던 시대다. 그러니 송 부자의 치부 수단은 청어가 아니라 칠산어장의 조기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위도는 칠산어장의 중심 섬이었다. 칠산 어장은 영광군 칠산도 인근의 바다를 말하는데, 영광의 송이도, 안마도에서 부안의 위도 사이의 바다다. 그 바다의 중심에 칠산도가 있어서 칠산어장이라 한다. 칠산도는 7개의 작은 섬들이 나란히 서 있어서 칠산도다. 동지나해에서 월동한 조기떼는 가거도, 흑산도, 비금도, 도초도를 거처 안마도 내해로 들어와 칠산어장에서 산란을 시작하며 황금의 조기 어장을 형성했다. 칠산어장 때문에 그 유명한 영광굴비도 생길 수 있었다. 굴비의 대명사인 영광굴비는 대부분 칠산어장에서 잡힌 조기들을 영광 법성포로 가져가서 말린 것이다. 그런데 칠산어장 조기잡이의 중심이 되는 곳은 영광 법성포가 아니라 위도였다.
위도 조기 파시는 흑산도 파시, 연평도 파시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 하나였다. 살구꽃이 피면 칠산도 부근에 참조기떼가 몰려왔다. 위도 치도리의 늙은 살구나무에 살구꽃 피면 위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찾아왔다. 이때는 조기떼를 쫓아온 수천 척의 조기잡이배가 위도 앞바다를 가득 채웠고 파장금항에는 파시가 섰다. 파장금은 파도가 길어지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얻은 이름이라 전한다. 파시가 서면 파장금 항에는 선구점, 이발소, 다방, 세탁소, 의상실, 식당, 술집 등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조기 파시 때는 수천 척의 어선들이 몰려들었고 술집 색시들만 400여 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 봄 파시철이면 모래밭에 가건물들이 들어섰다. 술집과 상점 등으로 한철을 보내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겨울 파도에 집들이 다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봄이 오면 사람들은 제비처럼 다시 집을 지었고 어선들이 몰려와 파시가 섰다. 바람이라도 불어 파도가 거세 조업을 할 수 없는 날이면 파장금은 선원들로 떠들썩해지고 술집마다 돈이 돌았다.
1960년대 말 칠산어장을 비롯한 서해안에서 조기가 자취를 감추고 조기 파시는 끝났다. 조기가 사라진 뒤에도 위도에서는 다른 파시가 계속됐다. 고등어, 삼치, 아지, 병어 등의 어장이 형성됐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가건물 대신 파장금 마을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 외지에서 온 장사치들은 파시 때마다 건물을 임대해 한철 장사를 한 뒤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섬 주민 중에서도 술집을 열고 붙박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때는 파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그래도 파시 때면 삼사백 척의 어선이 몰려오고 선원들도 천 명 이상이 북적거렸다. 그러다보니 사건사고도 많았다.
1985년 여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젊은 사내 하나가 음독을 했다. 사내는 유서를 남겼고 얼마 뒤 서해의 섬 마을에 사내 둘이 나타났다. 전북 부안군 위도 파장금. 사내들은 부둣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다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후 다섯 시쯤이나 됐을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들 몇이 부둣가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한 여자들은 부둣가 술집의 작부들이었다. 손님을 끌기 위해 나왔으나 부둣가에는 손님이 없었다. 여자들은 흩어져서 다방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고 있는 손님들을 꼬여낼 참이었다. 마침 커피를 마시는 사내 둘을 만났다. 허름한 차림이 선원들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아마도 고깃배를 타러 위도에 온 모양이었다. 수작이 오가고 사내들은 작부를 따라 나섰다. 술집은 색시집이었다.
사내들은 아가씨 둘을 옆에 끼고 술을 마셨다. 술을 잘 못하는지 사내들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씨들이 먼저 취하고 말았다. 사내들은 아가씨들의 사연을 물었다. 한 아가씨는 미자, 또 한 아가씨는 정숙이라 했다. 아가씨들은 고향은 달랐으나 사연은 비슷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미자는 상경해서 공장을 다녔다. 정숙이는 식모살이를 했다. 공원과 식모일로는 병든 부모 병원비랑 어린 동생들 학비 마련이 어려웠다. 처음에는 찻집 종업원으로, 다방 레지로 일하다 술집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돈은 벌리지 않고 갈수록 빚만 늘어났다. 그러다 결국 빚 때문에 이 외딴 섬까지 팔려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빚은 줄지 않았다. 둘 다 몇 백만 원의 빚이 있었다. 빚 때문에 섬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다음 날 사내들은 섬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파장금 마을에 수십 명의 경찰병력이 들이닥쳤다. 경비정을 타고 온 경찰들은 열 몇 곳이나 되는 술집들마다 입구를 차단하고 포주들과 아가씨들을 조사했다. 밤 12시쯤 경찰은 포주들과 아가씨 70여 명을 경비정에 싣고 뭍으로 나갔다. 포주들은 경찰서로 잡아가고 아가씨들에게는 모두 3만 원씩의 여비를 줘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며칠 전 위도 파장금을 찾아왔던 사내 둘은 서울의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경찰출입기자였던 두 사람은 영등포역 앞에서 자살한 사내의 유서를 보고 위도에 잠입취재를 하러 갔었다. 섬으로 팔려간 작부들의 절박한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자 경찰이 작전에 나선 것이었다.
영등포역 앞에서 사내는 왜 음독을 했던 것일까. 유서에는 그 사연이 적혀 있었다. 사내는 선원이었다. 고기잡이배에서 밥을 하는 화부였다. 파장금항에는 법성관, 삼화관, 신흥관, 신설관, 부산관, 인천관, 남창관 등의 색시집이 있었고 다방도 10여 개나 됐다. 선구점과 이발관, 피복점, 호수당구장, 오성상회, 영신상회 등 생필품점도 있었다. 사내도 선원들이랑 그중 한 색시집을 단골로 들락거렸고 거기서 한 색시와 눈이 맞았다. 사내는 여자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여자는 진 빚이 많았다. 포주들은 화장품이나 의상비 등으로 아가씨가 빚을 지게 만들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밭도 매고 나무도 해오게 하며 노예처럼 부렸다.
사내도 돈이 없었다. 사내는 여자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서울 사는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여자를 빼낼 방법이 없어지자 사내는 절망에 빠졌다. 술을 마시고 사내는 유서를 썼다. 여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해달라고 하소연했다. 마침내 사내는 극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사내는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던져서 사랑하는 여자를 구해냈다. 그 후 위도 파장금에는 색시집들이 사라졌고 정박하려던 어선들도 색시집이 없는 것을 알고 뱃머리를 돌렸다. 차츰 파장금항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파장금에는 단 한 곳의 유흥업소도 없다. 하지만 파장금 마을 뒷골목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골목을 걸으면 우리는 모두가 시간여행자라도 된 것처럼 아득해질 것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