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만들어낸 작품들이 모여 바다 위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섬이다. 시원한 바다 풍경과 바위를 감상하며 걷는 길은 흡사 제주도 오름 해안길처럼 느껴진다. 능선 혹은 해안을 따라 조성된 길들을 걷기에 걷는 동안 주변의 섬들과 풍화작용으로 깎여진 절벽의 절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황해의 해금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깎긴 안마군도의 섬들을 보며 걷는 길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코스 관리상태가 우수하고 경관이 아름다워 후회 없는 트레일이라 확신한다.
영광의 최서단 끝섬 안마도. 안마도의 부속 섬 횡도에는 중국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첨성대 형상의 영해기점 표시 구조물이 있다. 영해기점은 국경이란 소리다. 동해에 독도, 제주에 마라도가 있다면 서해에는 안마도가 있는 것이다.
전남 영광군 낙월면에 속한 언머도는 면적 5.8km2, 해안선 길이 36km. 지금은 60가구 80여명에 불과하지만 한때 안마도에는 300호 이상이 살았다. 유권자만 1000명이었으니 전체 인구는 수 천 명에 달했다. 안마도 해상의 횡도, 오도, 씨구리 바위, 말코바위, 사랑바위 등의 기암괴석은 신안 홍도나 여수의 백도에 버금갈 만큼 아름답다
안마도항은 산으로 둘러쌓인 U자형 포구다. 옛날 바람이 불면 어선들이 몰려와 피항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지형 때문이다. 포구는 나루빡 혹은 나박 바우 등 정겨운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간척과 항만 시설이 들어서면서 옛스런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다. 전부 7~8호쯤 되는 나루빡에만 몇 개의 슈퍼와 민박등 상업 시설이 몰려 있다.
안마도 인근 바다를 칠산어장이라 한다. 7개의 무인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칠산도다. 칠산어장은 조기의 최대 어장이었다.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 떼는 가거도, 흑산도, 비금 도초를 거처 안마도 내해로 들어와 칠산어장에서 산란을 시작하며 황금의 조기 어장을 형성했었다. 칠산어장 때문에 그 유명한 영광 굴비도 생길 수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수백 년을 이어오던 안마도 조기 어장은 일순간에 씨가 말라버렸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960년대 말 이후 칠산어장에는 더이상 조기떼가 돌아오지 않는다. 봄 조기철이면 수천척의 어선들이 북적였던 바다에 지금은 단 한 척의 어선도 발견하기 힘들다.
옛날 칠산어장에 조기가 잡힐 때는 안마도에도 파시가 열렸었다. 지금은 파시도 사라지고 어선들도 오지 않는다. 안마도 배들만 조업을 나갔다 귀항한다. 안마도는 지금 한창 꽃게철이다. 올해는 꽃게가 풍년이다. 뭍의 상인들이 차를 몰고 안마도까지 와서 꽃게를 사간다. 나빡, 나르빡이라 부르는 선착장 마을에 여장을 풀고 섬의 안길로 걸어간다. 옛날에는 산 너머에도 몇 개의 마을이 더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폐촌 되고 산 안쪽에만 마을이 있다. 해안도로의 끝, 솔숲 너머 월촌 마을이 섬의 중심이다. 면 출장소와 수협출장소, 무선 중계소, 발전소, 파출소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칠산 바다에 조기가 잡히던 시절부터 조기가 사라지고 부서가 많이 나던 시절까지 나루빡 주변에는 파시가 섰었다. 부서가 날 때는 아지(전갱이)도 많이 났다. 아지 파시도 섰다. 파시는 30여 년 전에 끝났지만 노인들은 그때가 어제처럼 환하다. 풍랑이 일고 어선들이 피항을 오면 포구에 어선들 수백 척이 꽉 들어찼다. 나루빡 선창가에는 아연 활기가 돌았다. 그때는 나루빡 일대가 온통 술집 천지였다. 색시집도 많았다.
“우다시(풍선) 이끌고 여수, 삼천포 배들도 많이 오고. 왜정 때는 일본 배들도 많이 왔어.“
조기 배가 들어오면 부녀자들은 물동이 이고 물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배들은 선착장 가까이 들어오면 바닥에 걸리니까 멀찍이 띄워두었다. 여자들은 배꼽까지 물에 빠지며 물동이를 이고 배까지 찾아가 돈을 벌었다. 그 시절에는 포구 잎 바다에도 물고기들이 지천이었다.
“이 안에도 고기가 시글시글 했어. 부서, 민어, 조기, 아지, 안무는 고기가 없었어. 안마도를 고기둠벙이라 했제.“
칠산어장에 조기가 널렸어도 안마도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었다. 조기잡이 배를 마련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지 사람들이 와서 칠산 바다의 돈을 긁어가도 그저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고기 둠벙’을 앞에 두고도 조기를 사다 먹었다. “사람은 많고 농토는 작고” 작은 섬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좁은 농토에만 기대 살아가니 섬은 가난이 일상이었다. 부자라고 해봐야 자기 논 밭 벌어서 안 굶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농토가 없어서 남의 일 거들어 주고 곡식 얻어다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이들도 많았다.
이제는 풍랑이 일어도 큰 배들은 안마도 내해에 정박하지 못한다. 수심이 7미터도 넘던 내항 바다는 방파제가 생기면서 썰물 때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얕아졌다. 물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뒀어야 했는데 안마도 앞의 작은 섬 죽도까지 방파제를 막아서 물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그에 따라 내해 바닥에 뻘과 모래 등이 쌓이고 안마도 내항은 항만의 구실을 잃어가고 있다.
안마도 산에는 울타리를 탈출해 야생으로 살아가는 사슴이 200여 마리나 된다. 안마도에 야생 사슴이 많은 것은 안마도와 제방으로 이어진 죽도에서 기르던 사슴 4-5마리가 탈출해 안마도로 건너와 번식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마주친 사슴은 사람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떤 주민들은 농작물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사슴들을 제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반면에 또 어떤 주민은 사슴이 관광자원으로 유용하다고도 생각하신다. 사슴들이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는 것은 섬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개체수를 조절하고 관리한다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안마도에는 철마 신앙이 있었다. 당집의 신체는 철마였다. 어느 날 동촌 신씨 할머니 꿈속에 한 장군이 나타났다. 장군은 ‘나는 중국의 장수였으나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죽어 그 유품이 바닷가로 밀려와 궤 속에 있으니 이를 건져다 산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말 한 뒤 사라졌다. 다음날 신씨 할머니가 마을 앞 바닷가에 나가니 궤작이 하나 떠밀려와 있었다. 궤짝 속에는 중국 돈과 철마가 들어 있었다. 신씨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의논해 철마를 뒷산에 당집을 만든 뒤 당집 모시고 섣달 그믐날 제사를 모셨다. 그 후 신씨 할머니가 죽자 할머니의 신위를 아랫당에 모셨다. 할머니도 신이 된 것이다. 1969년 경 당제는 사라졌다.
안마도는 한때 방목 한우를 많이 기르는 섬으로 유명했다. 특히 죽도와 맞붙어 있는 대섬목 해변에는 여름이면 40-50여 마리의 소들이 몰려와 바다에서 몸을 담그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래서 소 해수욕장으로 방송을 타면서 관광객들이 갑자기 물려오기도 했었다. 지금은 더 이상 방목하는 대규모 소떼나 소해수욕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축산법이 개정되면서 축사 시설이 갖춰지지 않으면 대량 사육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안마도의 소 방목은 1976년-1977년 10 가구가 3-4마리의 소들을 키우며 시작됐다. 하지만 1980년대 소 파동을 겪으며 많은 가구가 소 키우기를 중단했고 그 이후에는 몇몇 가구에서 대규모로 방목 사육을 해왔다. 한 가구에서 200두까지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가구도 이제는 방목해 키우던 소들을 처분하고 몇몇 가구에서만 소량의 소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특이하게도 안마도의 가장 큰 특산물은 지네다. 지네는 주로 5월 한 달 동안만 잡는데 해마다 지네만 잡아서 2-3천만원씩의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지네는 주로 산 속 돌 틈에서 잡는데 돌 틈에 숨어 살던 지네들이 5월이면 교미를 위해 짝을 찾아 땅 밖으로 나온다. 그때를 노려서 잡는다. 지네는 말려서 약재로 팔기도 하지만 독주에 술을 담가서 지네 술로도 판매된다.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찾는 이들이 많다.
파도가 만들어낸 작품들이 모여 바다 위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섬이다. 시원한 바다 풍경과 바위를 감상하며 걷는 길은 흡사 제주도 오름 해안길처럼 느껴진다. 능선 혹은 해안을 따라 조성된 길들을 걷기에 걷는 동안 주변의 섬들과 풍화작용으로 깎여진 절벽의 절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황해의 해금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깎긴 안마군도의 섬들을 보며 걷는 길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코스 관리상태가 우수하고 경관이 아름다워 후회 없는 트레일이라 확신한다.
영광의 최서단 끝섬 안마도. 안마도의 부속 섬 횡도에는 중국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첨성대 형상의 영해기점 표시 구조물이 있다. 영해기점은 국경이란 소리다. 동해에 독도, 제주에 마라도가 있다면 서해에는 안마도가 있는 것이다.
전남 영광군 낙월면에 속한 언머도는 면적 5.8km2, 해안선 길이 36km. 지금은 60가구 80여명에 불과하지만 한때 안마도에는 300호 이상이 살았다. 유권자만 1000명이었으니 전체 인구는 수 천 명에 달했다. 안마도 해상의 횡도, 오도, 씨구리 바위, 말코바위, 사랑바위 등의 기암괴석은 신안 홍도나 여수의 백도에 버금갈 만큼 아름답다
안마도항은 산으로 둘러쌓인 U자형 포구다. 옛날 바람이 불면 어선들이 몰려와 피항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지형 때문이다. 포구는 나루빡 혹은 나박 바우 등 정겨운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간척과 항만 시설이 들어서면서 옛스런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다. 전부 7~8호쯤 되는 나루빡에만 몇 개의 슈퍼와 민박등 상업 시설이 몰려 있다.
안마도 인근 바다를 칠산어장이라 한다. 7개의 무인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칠산도다. 칠산어장은 조기의 최대 어장이었다.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 떼는 가거도, 흑산도, 비금 도초를 거처 안마도 내해로 들어와 칠산어장에서 산란을 시작하며 황금의 조기 어장을 형성했었다. 칠산어장 때문에 그 유명한 영광 굴비도 생길 수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수백 년을 이어오던 안마도 조기 어장은 일순간에 씨가 말라버렸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960년대 말 이후 칠산어장에는 더이상 조기떼가 돌아오지 않는다. 봄 조기철이면 수천척의 어선들이 북적였던 바다에 지금은 단 한 척의 어선도 발견하기 힘들다.
옛날 칠산어장에 조기가 잡힐 때는 안마도에도 파시가 열렸었다. 지금은 파시도 사라지고 어선들도 오지 않는다. 안마도 배들만 조업을 나갔다 귀항한다. 안마도는 지금 한창 꽃게철이다. 올해는 꽃게가 풍년이다. 뭍의 상인들이 차를 몰고 안마도까지 와서 꽃게를 사간다. 나빡, 나르빡이라 부르는 선착장 마을에 여장을 풀고 섬의 안길로 걸어간다. 옛날에는 산 너머에도 몇 개의 마을이 더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폐촌 되고 산 안쪽에만 마을이 있다. 해안도로의 끝, 솔숲 너머 월촌 마을이 섬의 중심이다. 면 출장소와 수협출장소, 무선 중계소, 발전소, 파출소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칠산 바다에 조기가 잡히던 시절부터 조기가 사라지고 부서가 많이 나던 시절까지 나루빡 주변에는 파시가 섰었다. 부서가 날 때는 아지(전갱이)도 많이 났다. 아지 파시도 섰다. 파시는 30여 년 전에 끝났지만 노인들은 그때가 어제처럼 환하다. 풍랑이 일고 어선들이 피항을 오면 포구에 어선들 수백 척이 꽉 들어찼다. 나루빡 선창가에는 아연 활기가 돌았다. 그때는 나루빡 일대가 온통 술집 천지였다. 색시집도 많았다.
“우다시(풍선) 이끌고 여수, 삼천포 배들도 많이 오고. 왜정 때는 일본 배들도 많이 왔어.“
조기 배가 들어오면 부녀자들은 물동이 이고 물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배들은 선착장 가까이 들어오면 바닥에 걸리니까 멀찍이 띄워두었다. 여자들은 배꼽까지 물에 빠지며 물동이를 이고 배까지 찾아가 돈을 벌었다. 그 시절에는 포구 잎 바다에도 물고기들이 지천이었다.
“이 안에도 고기가 시글시글 했어. 부서, 민어, 조기, 아지, 안무는 고기가 없었어. 안마도를 고기둠벙이라 했제.“
칠산어장에 조기가 널렸어도 안마도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었다. 조기잡이 배를 마련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지 사람들이 와서 칠산 바다의 돈을 긁어가도 그저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고기 둠벙’을 앞에 두고도 조기를 사다 먹었다. “사람은 많고 농토는 작고” 작은 섬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좁은 농토에만 기대 살아가니 섬은 가난이 일상이었다. 부자라고 해봐야 자기 논 밭 벌어서 안 굶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농토가 없어서 남의 일 거들어 주고 곡식 얻어다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이들도 많았다.
이제는 풍랑이 일어도 큰 배들은 안마도 내해에 정박하지 못한다. 수심이 7미터도 넘던 내항 바다는 방파제가 생기면서 썰물 때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얕아졌다. 물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뒀어야 했는데 안마도 앞의 작은 섬 죽도까지 방파제를 막아서 물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그에 따라 내해 바닥에 뻘과 모래 등이 쌓이고 안마도 내항은 항만의 구실을 잃어가고 있다.
안마도 산에는 울타리를 탈출해 야생으로 살아가는 사슴이 200여 마리나 된다. 안마도에 야생 사슴이 많은 것은 안마도와 제방으로 이어진 죽도에서 기르던 사슴 4-5마리가 탈출해 안마도로 건너와 번식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마주친 사슴은 사람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떤 주민들은 농작물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사슴들을 제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반면에 또 어떤 주민은 사슴이 관광자원으로 유용하다고도 생각하신다. 사슴들이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는 것은 섬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개체수를 조절하고 관리한다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안마도에는 철마 신앙이 있었다. 당집의 신체는 철마였다. 어느 날 동촌 신씨 할머니 꿈속에 한 장군이 나타났다. 장군은 ‘나는 중국의 장수였으나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죽어 그 유품이 바닷가로 밀려와 궤 속에 있으니 이를 건져다 산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말 한 뒤 사라졌다. 다음날 신씨 할머니가 마을 앞 바닷가에 나가니 궤작이 하나 떠밀려와 있었다. 궤짝 속에는 중국 돈과 철마가 들어 있었다. 신씨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의논해 철마를 뒷산에 당집을 만든 뒤 당집 모시고 섣달 그믐날 제사를 모셨다. 그 후 신씨 할머니가 죽자 할머니의 신위를 아랫당에 모셨다. 할머니도 신이 된 것이다. 1969년 경 당제는 사라졌다.
안마도는 한때 방목 한우를 많이 기르는 섬으로 유명했다. 특히 죽도와 맞붙어 있는 대섬목 해변에는 여름이면 40-50여 마리의 소들이 몰려와 바다에서 몸을 담그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래서 소 해수욕장으로 방송을 타면서 관광객들이 갑자기 물려오기도 했었다. 지금은 더 이상 방목하는 대규모 소떼나 소해수욕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축산법이 개정되면서 축사 시설이 갖춰지지 않으면 대량 사육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안마도의 소 방목은 1976년-1977년 10 가구가 3-4마리의 소들을 키우며 시작됐다. 하지만 1980년대 소 파동을 겪으며 많은 가구가 소 키우기를 중단했고 그 이후에는 몇몇 가구에서 대규모로 방목 사육을 해왔다. 한 가구에서 200두까지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가구도 이제는 방목해 키우던 소들을 처분하고 몇몇 가구에서만 소량의 소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특이하게도 안마도의 가장 큰 특산물은 지네다. 지네는 주로 5월 한 달 동안만 잡는데 해마다 지네만 잡아서 2-3천만원씩의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지네는 주로 산 속 돌 틈에서 잡는데 돌 틈에 숨어 살던 지네들이 5월이면 교미를 위해 짝을 찾아 땅 밖으로 나온다. 그때를 노려서 잡는다. 지네는 말려서 약재로 팔기도 하지만 독주에 술을 담가서 지네 술로도 판매된다.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찾는 이들이 많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