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조도 돈대산길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돈대산(敦大峰) 정상까지 가는 길이다. 상조도에도 돈대산이 있다. 돈대(墩臺)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비하는 일종의 초소다. 돈대산길은 손가락 바위를 비롯해 걷는 길 내내 다양한 형태의 바위의 향연이 펼쳐지는 길이다. 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수 많은 섬들이 새떼 마냥 조도 바다에 도란도란 앉아 있다.
조선시대 말 조도는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영국함대에 의해 그 지정학적 가치가 먼저 발견된바 있다. 영국군이 점령했던 거문도처럼 영국이 동양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고려했던 섬 중 하나다. 1816년, 청나라 산성동 위해(威海)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조도에 입항하고 섬에 대한 조사활동을 했다. 3척 중 하나인 리라호 선장 바실 헐은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에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언급 하였다. 그는 아마도 상조도 도리산에 올랐을 것이다. 그 기록의 일부가 당시 상황을 전한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이 먼저 조도의 가치를 알아봤었다. 하조도 창유리의 일부인 유토리는 상업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농촌이다.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아 어업활동도 못한다. 섬에서 바다가 없으면 열에 아홉은 빈한한 마을이기 쉽다. 하조도 유토리 보호수 팽나무 옆에는 선돌이 있다. 기다란 돌을 세우는 선돌 풍습은 대게 신앙물이거나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 이 선돌은 ‘살기’를 방지하기 위해 마을에서 세운 것이라 전한다.
마을 뒷산인 신금산보다 앞산인 돈대산이 기가 세고 정자나무 부근의 능선 또한 ‘사자등’이라 산혈이 사납다는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가 센 앞산과 사나운 맹수인 사자가 살기등등하게 압박하니 마을 사람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나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 저 선돌이다. 본래는 세 곳에 하나씩, 세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자나무인 팽나무 아래 하나만 남았다. 선돌을 세우고도 별다른 효과를 못 봤던 것일까. 마을은 조도에서 가장 빈한한 축에 든다. 바다가 없어 벌어먹을 것이 없으니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않는다. 노인들은 대부분 텃밭 정도나 가꾸고 산다.
진도 섬들의 고향 조도(鳥島). 조도면에만 무려 179개의 섬들이 있다. 1개 면단위의 섬이 옹진군(100개)이나 보령군(75개), 남해군(68개)보다 많다. 그래서 새떼처럼 수많은 섬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다 해서 조도(鳥島)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가히 섬들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조도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된 하조도와 상조도 두 개 섬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기사에 조도는 진도군(珍島郡) 조도면(鳥島面)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실록에 조도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하조도는 초도(草島), 즉 풀섬이라 했고 상조도는 맹성도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외부자의 시선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섬사람들은 그저 웃섬(상도), 아랫 섬(하도)이라 부른다. 얼마나 자존감 있는 이름인가. 세계는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진도 본섬과 조도 사이에는 장죽도란 작은 섬이 있다. 이 사이 바닷길은 한국의 남해와 서해를 이어주는 물목인데 물살이 거세다. 이 수로를 통해서 남해의 배들이 서해로 가고 서해의 배들은 남해를 오간다. 그래서 이 바닷길의 이름이 장죽수로(장죽수도)다. 장죽수로 앞에 우뚝 서서 수많은 배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는 등대가 바로 하조도 등대다, 1909년 조선통감부가 조선 침략의 봉화로 세웠다. 하조도 등대의 보호로 여객선도 어선들도 안전하게 항해한다. 조도의 관문인 어류포항은 창유항이라고도 하는데 면소재지가 있는 큰 마을이다. 창유리는 자연부락인 창리와 유토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하조도와 상조도 모두에 돈대산(敦大峰·271m)이 있다. 돈대(墩臺)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비하는 일종의 초소다. 성곽도 있고 포대도 있어서 단순히 감시만 하는 망대와 차이가 있다. 돈대산의 가장 큰 명물은 손가락 바위다. 거대한 손가락은 진짜 거인의 손가락을 똑 닮았다. 돈대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다도해 풍경은 덤이다.
하조도 돈대산길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돈대산(敦大峰) 정상까지 가는 길이다. 상조도에도 돈대산이 있다. 돈대(墩臺)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비하는 일종의 초소다. 돈대산길은 손가락 바위를 비롯해 걷는 길 내내 다양한 형태의 바위의 향연이 펼쳐지는 길이다. 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수 많은 섬들이 새떼 마냥 조도 바다에 도란도란 앉아 있다.
조선시대 말 조도는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영국함대에 의해 그 지정학적 가치가 먼저 발견된바 있다. 영국군이 점령했던 거문도처럼 영국이 동양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고려했던 섬 중 하나다. 1816년, 청나라 산성동 위해(威海)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조도에 입항하고 섬에 대한 조사활동을 했다. 3척 중 하나인 리라호 선장 바실 헐은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에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언급 하였다. 그는 아마도 상조도 도리산에 올랐을 것이다. 그 기록의 일부가 당시 상황을 전한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이 먼저 조도의 가치를 알아봤었다. 하조도 창유리의 일부인 유토리는 상업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농촌이다.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아 어업활동도 못한다. 섬에서 바다가 없으면 열에 아홉은 빈한한 마을이기 쉽다. 하조도 유토리 보호수 팽나무 옆에는 선돌이 있다. 기다란 돌을 세우는 선돌 풍습은 대게 신앙물이거나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 이 선돌은 ‘살기’를 방지하기 위해 마을에서 세운 것이라 전한다.
마을 뒷산인 신금산보다 앞산인 돈대산이 기가 세고 정자나무 부근의 능선 또한 ‘사자등’이라 산혈이 사납다는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가 센 앞산과 사나운 맹수인 사자가 살기등등하게 압박하니 마을 사람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나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 저 선돌이다. 본래는 세 곳에 하나씩, 세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자나무인 팽나무 아래 하나만 남았다. 선돌을 세우고도 별다른 효과를 못 봤던 것일까. 마을은 조도에서 가장 빈한한 축에 든다. 바다가 없어 벌어먹을 것이 없으니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않는다. 노인들은 대부분 텃밭 정도나 가꾸고 산다.
진도 섬들의 고향 조도(鳥島). 조도면에만 무려 179개의 섬들이 있다. 1개 면단위의 섬이 옹진군(100개)이나 보령군(75개), 남해군(68개)보다 많다. 그래서 새떼처럼 수많은 섬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다 해서 조도(鳥島)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가히 섬들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조도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된 하조도와 상조도 두 개 섬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기사에 조도는 진도군(珍島郡) 조도면(鳥島面)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실록에 조도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하조도는 초도(草島), 즉 풀섬이라 했고 상조도는 맹성도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외부자의 시선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섬사람들은 그저 웃섬(상도), 아랫 섬(하도)이라 부른다. 얼마나 자존감 있는 이름인가. 세계는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진도 본섬과 조도 사이에는 장죽도란 작은 섬이 있다. 이 사이 바닷길은 한국의 남해와 서해를 이어주는 물목인데 물살이 거세다. 이 수로를 통해서 남해의 배들이 서해로 가고 서해의 배들은 남해를 오간다. 그래서 이 바닷길의 이름이 장죽수로(장죽수도)다. 장죽수로 앞에 우뚝 서서 수많은 배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는 등대가 바로 하조도 등대다, 1909년 조선통감부가 조선 침략의 봉화로 세웠다. 하조도 등대의 보호로 여객선도 어선들도 안전하게 항해한다. 조도의 관문인 어류포항은 창유항이라고도 하는데 면소재지가 있는 큰 마을이다. 창유리는 자연부락인 창리와 유토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하조도와 상조도 모두에 돈대산(敦大峰·271m)이 있다. 돈대(墩臺)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비하는 일종의 초소다. 성곽도 있고 포대도 있어서 단순히 감시만 하는 망대와 차이가 있다. 돈대산의 가장 큰 명물은 손가락 바위다. 거대한 손가락은 진짜 거인의 손가락을 똑 닮았다. 돈대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다도해 풍경은 덤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