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도 명사갯길은 완도 본섬과 고금도 두 섬과 다리로 연결된 신지도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다. 신지대교 초입에서 시작해서 모래해변이 10리 가까이 펼쳐져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최고의 해변 트레일이다. 파도치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울려퍼진다해서 명사십리(鳴沙十里)라는 이름을 가진 모래해변은 남해안 일대에서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꼽힌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 위를 걷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일제 강점기 신지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인 소안도와 함께 서남해 항일운동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지도 출신 독립운동가가 많다. 소안도의 사립 소안학교가 그랬던 것처럼 신지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사립 신지학교였다. 결국 독립운동가 양성의 산실인 신지학교를 불온시 여긴 일제에 의해 교원 2명이 경찰에 체포된 후 강제 폐교당했다. 신지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임재갑(1891~1960), 장석천(1903~1935) 선생 등인데 임재갑 선생은 신지도 임촌 마을 출신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청년학우회와 구국청년계몽회에 가입해 연락 요원으로 서울과 북간도를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다. 소안도에서 만들어져 전국 조직이 된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의 조직원으로도 활동했다. 간도 용정 대성학원 교원으로 일하며 독립자금 모집책으로 수회에 걸쳐 국내를 왕래했고 또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무장전투요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신간회 완도지회장을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무인등대인 서봉각 등대에는 등대 귀신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무가 짙게 낀 날이면 등대 귀신이 뱃일 나가는 어선에서 어구를 훔쳐와 등대 부근에 숨겼다는 내용이다. 등대 귀신은 무서운 귀신이 아니란 뜻이다. 해무 짙은 날은 사고가 나기 쉬우니 뱃일을 나가지 못하게 어구를 훔처다 숨겨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서봉각 등대귀신은 어부들의 수호신이었던 셈이다. 매물도 허칭이 강정 도깨비나 거문도 인어 신지끼나 같은 서사를 지닌 이야기들이다. 어부들을 구해주는 도깨비 귀신 인어 이야기다.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신지도 또한 유배지로 이용됐다. 섬이 곧 감옥이었다. 신지도에는 갑술옥사, 신유사옥 등 정치적 이유로 유배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더러 살인자나 도적이 유배되기도 했다.
유배와 관련하여 신지도에는 조선의 원교 이광사가 살던 집이 남아있다. 이광사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이 현판은 한 차례 떼어내졌다가 다시 걸린 사연으로 유명하다.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이 현판을 보고 못마땅해서 초의선사에게 일갈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
하지만 9년 뒤 유배가 풀려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 달라”고 했다. 9년의 유배살이가 추사를 더 겸손하게 만든 것일까. 추사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원교는 끝내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광사는 신지도에서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지었다. 그의 유배는 서남해안의 서예문화 부흥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숨을 거두고 14년이 지나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왔고 다산의 작은형 손암 정약전도 신지도에서 8개월 동안 유배를 산 뒤 흑산도로 이배됐다. 다산이 신지도에 유배 살던 손암에게 보낸 시 2편이 전해진다.
다산은 ‘탐진 풍속 노래’라는 시에서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다네”라고 노래했다. 완도 지방 아전들이 모두 이광사에게 서예를 배웠음을 알려주는 귀한 기록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적거지가 신지도 금곡리에 남아 있다. 8칸짜리 전통 한옥은 300년 전쯤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풍상을 견디지 못한 낡은 한옥은 살짝 기울었다. 금곡 마을 앞에는 원교가 심었다는 250여 년 된 원교목(円嶠木)이 아직도 정정하게 서 있다.
원래 신지도는 지도(智島)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나주목에 지도(현 신안군 지도읍)라는 같은 지명이 있다 보니 문서를 왕래하면서 지명을 혼동하는 일이 많아 신(薪)자를 붙여 신지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신지도는 면적 30.8㎢에 3600명이 사는 제법 큰 섬이다. 신지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 통일신라 말기에는 청해부에,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했다가 이후 강진현에 속했다. 1522년(중종 17년) 송곡리에 신지만호진이 설치됐지만 1895년 군제 개편으로 신지만호진이 없어졌고,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부터는 완도군에 속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으로 사용됐는데 지금도 마장터가 남아 있다.
신지도 명사갯길은 완도 본섬과 고금도 두 섬과 다리로 연결된 신지도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다. 신지대교 초입에서 시작해서 모래해변이 10리 가까이 펼쳐져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최고의 해변 트레일이다. 파도치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울려퍼진다해서 명사십리(鳴沙十里)라는 이름을 가진 모래해변은 남해안 일대에서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꼽힌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 위를 걷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일제 강점기 신지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인 소안도와 함께 서남해 항일운동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지도 출신 독립운동가가 많다. 소안도의 사립 소안학교가 그랬던 것처럼 신지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사립 신지학교였다. 결국 독립운동가 양성의 산실인 신지학교를 불온시 여긴 일제에 의해 교원 2명이 경찰에 체포된 후 강제 폐교당했다. 신지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임재갑(1891~1960), 장석천(1903~1935) 선생 등인데 임재갑 선생은 신지도 임촌 마을 출신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청년학우회와 구국청년계몽회에 가입해 연락 요원으로 서울과 북간도를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다. 소안도에서 만들어져 전국 조직이 된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의 조직원으로도 활동했다. 간도 용정 대성학원 교원으로 일하며 독립자금 모집책으로 수회에 걸쳐 국내를 왕래했고 또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무장전투요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신간회 완도지회장을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무인등대인 서봉각 등대에는 등대 귀신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무가 짙게 낀 날이면 등대 귀신이 뱃일 나가는 어선에서 어구를 훔쳐와 등대 부근에 숨겼다는 내용이다. 등대 귀신은 무서운 귀신이 아니란 뜻이다. 해무 짙은 날은 사고가 나기 쉬우니 뱃일을 나가지 못하게 어구를 훔처다 숨겨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서봉각 등대귀신은 어부들의 수호신이었던 셈이다. 매물도 허칭이 강정 도깨비나 거문도 인어 신지끼나 같은 서사를 지닌 이야기들이다. 어부들을 구해주는 도깨비 귀신 인어 이야기다.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신지도 또한 유배지로 이용됐다. 섬이 곧 감옥이었다. 신지도에는 갑술옥사, 신유사옥 등 정치적 이유로 유배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더러 살인자나 도적이 유배되기도 했다.
유배와 관련하여 신지도에는 조선의 원교 이광사가 살던 집이 남아있다. 이광사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이 현판은 한 차례 떼어내졌다가 다시 걸린 사연으로 유명하다.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이 현판을 보고 못마땅해서 초의선사에게 일갈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
하지만 9년 뒤 유배가 풀려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 달라”고 했다. 9년의 유배살이가 추사를 더 겸손하게 만든 것일까. 추사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원교는 끝내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광사는 신지도에서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지었다. 그의 유배는 서남해안의 서예문화 부흥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숨을 거두고 14년이 지나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왔고 다산의 작은형 손암 정약전도 신지도에서 8개월 동안 유배를 산 뒤 흑산도로 이배됐다. 다산이 신지도에 유배 살던 손암에게 보낸 시 2편이 전해진다.
다산은 ‘탐진 풍속 노래’라는 시에서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다네”라고 노래했다. 완도 지방 아전들이 모두 이광사에게 서예를 배웠음을 알려주는 귀한 기록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적거지가 신지도 금곡리에 남아 있다. 8칸짜리 전통 한옥은 300년 전쯤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풍상을 견디지 못한 낡은 한옥은 살짝 기울었다. 금곡 마을 앞에는 원교가 심었다는 250여 년 된 원교목(円嶠木)이 아직도 정정하게 서 있다.
원래 신지도는 지도(智島)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나주목에 지도(현 신안군 지도읍)라는 같은 지명이 있다 보니 문서를 왕래하면서 지명을 혼동하는 일이 많아 신(薪)자를 붙여 신지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신지도는 면적 30.8㎢에 3600명이 사는 제법 큰 섬이다. 신지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 통일신라 말기에는 청해부에,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했다가 이후 강진현에 속했다. 1522년(중종 17년) 송곡리에 신지만호진이 설치됐지만 1895년 군제 개편으로 신지만호진이 없어졌고,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부터는 완도군에 속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으로 사용됐는데 지금도 마장터가 남아 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