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지심도는 한국의 섬들 중 원시림이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섬이다. 그 원시림 숲을 따라 걷는 길이 지심도 둘레길이다. 섬 전체 면적의 70%를 뒤덮고 있는 수백 년 된 동백나무 숲 터널을 따라 걷기 때문에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지심도 길은 경상도권역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로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
1908년 기록에 따르면 지심도에 13세대 61명이 거주했다. 일제는 1935년 지심도 토지를 국방용으로 매입 지심도에 살던 주민들을 거제 본섬의 지세포와 대동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지심도 포진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에 의해 1936년7월10일 시작되어 1938년 1월 27일 완성됐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진지는 4개다. 포진지에는 150mm 캐논포와 38식 기관총 등 무기들이 배치 됐다. 캐논포는 360도 회전이 가능하며 최대 사거리는 20.2km나 됐다. 일제의 이런 초진지는 대마도와 시모노세키에도 배치됐는데,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과 태평양 쪽에서 진군해 올지로 모르는 연합군 함대를 저지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포진지 근처에는 탄약을 보관한 탄약고도 땅굴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지심도에는 포진지를 운용할 1개 중대 100여명이 주둔했다. 이들 병사와 징용자들이 사용할 전등소, 발전소, 통신소, 헌병주재소, 장교숙소, 병사 숙소, 징용자 숙소, 대장간 일장기게양대 등의 시설이 만들어졌다.
옛 국방과학연구소 지심도 시험소는 국방과학연구소 제2본부 소속 연구원들이 부정기적으로 방문해서 함정 해상시험을 하는 장소였다. 관리직 직원 4명이 1주일 단위로 2명씩 교대로 근무하면서 시설물 관리와 환경정비 업무를 맡았었다. 지심도가 거제시로 이관 된 뒤 시험소도 거제 일운면 서이말로 이전되고, 남겨진 건물은 지심도 주민들이 식당 등으로 운영 할 예정이다. 지심도 바다의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다.
지심도는 면적 0.356㎢(10만여 평), 길이 1.5㎞, 너비 500m, 해안선 둘레 3.7㎞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더 오랜 옛날에도 살다 떠나고 들어와 살기를 거듭했을 터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살이의 역사는 길지 않다. 사람들이 다시 이 섬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현종 때인 17세기 후반부터다. 주민들은 모두 일제시대 제국의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8.15 해방 때까지 섬에는 일본군 일개 중대가 주둔했다. 해방 이후에야 다시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지심도는 일본 군부대의 주둔지였기에 방공포진지, 탄약고, 징용자 숙소, 일본군 숙소, 발전소, 비둘기 통신소 등 일제가 우리 땅을 침략하고 유린한 증거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심도에는 15가구 35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2021년까지만해도 섬에서 강제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거제시가 관광 개발을 이유를 주민들을 내쫓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미 한해 1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가고 있는데 거제시가 터무늬 없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쫓아내려 했던 것이다. 건물은 주민들 소유지만, 토지가 거제시 소유라는 것을 악용해 주민들을 내쫓으려 했었다. 토지가 주민들 소유가 아니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주민들이 추방됐다 돌아온 아픈 역사의 상처 때문이다. 다행히 사단법인 섬연구소가 2년에 걸친 노력으로 국민권익위원회의 중재를 이끌어내 주민들은 다시 섬에 영구 거주할 수 있게 됐다.
거제 지심도는 한국의 섬들 중 원시림이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섬이다. 그 원시림 숲을 따라 걷는 길이 지심도 둘레길이다. 섬 전체 면적의 70%를 뒤덮고 있는 수백 년 된 동백나무 숲 터널을 따라 걷기 때문에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지심도 길은 경상도권역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로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
1908년 기록에 따르면 지심도에 13세대 61명이 거주했다. 일제는 1935년 지심도 토지를 국방용으로 매입 지심도에 살던 주민들을 거제 본섬의 지세포와 대동마을로 강제 이주시켰다. 지심도 포진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에 의해 1936년7월10일 시작되어 1938년 1월 27일 완성됐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진지는 4개다. 포진지에는 150mm 캐논포와 38식 기관총 등 무기들이 배치 됐다. 캐논포는 360도 회전이 가능하며 최대 사거리는 20.2km나 됐다. 일제의 이런 초진지는 대마도와 시모노세키에도 배치됐는데,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과 태평양 쪽에서 진군해 올지로 모르는 연합군 함대를 저지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포진지 근처에는 탄약을 보관한 탄약고도 땅굴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지심도에는 포진지를 운용할 1개 중대 100여명이 주둔했다. 이들 병사와 징용자들이 사용할 전등소, 발전소, 통신소, 헌병주재소, 장교숙소, 병사 숙소, 징용자 숙소, 대장간 일장기게양대 등의 시설이 만들어졌다.
옛 국방과학연구소 지심도 시험소는 국방과학연구소 제2본부 소속 연구원들이 부정기적으로 방문해서 함정 해상시험을 하는 장소였다. 관리직 직원 4명이 1주일 단위로 2명씩 교대로 근무하면서 시설물 관리와 환경정비 업무를 맡았었다. 지심도가 거제시로 이관 된 뒤 시험소도 거제 일운면 서이말로 이전되고, 남겨진 건물은 지심도 주민들이 식당 등으로 운영 할 예정이다. 지심도 바다의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다.
지심도는 면적 0.356㎢(10만여 평), 길이 1.5㎞, 너비 500m, 해안선 둘레 3.7㎞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더 오랜 옛날에도 살다 떠나고 들어와 살기를 거듭했을 터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살이의 역사는 길지 않다. 사람들이 다시 이 섬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현종 때인 17세기 후반부터다. 주민들은 모두 일제시대 제국의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8.15 해방 때까지 섬에는 일본군 일개 중대가 주둔했다. 해방 이후에야 다시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지심도는 일본 군부대의 주둔지였기에 방공포진지, 탄약고, 징용자 숙소, 일본군 숙소, 발전소, 비둘기 통신소 등 일제가 우리 땅을 침략하고 유린한 증거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심도에는 15가구 35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2021년까지만해도 섬에서 강제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거제시가 관광 개발을 이유를 주민들을 내쫓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미 한해 1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가고 있는데 거제시가 터무늬 없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쫓아내려 했던 것이다. 건물은 주민들 소유지만, 토지가 거제시 소유라는 것을 악용해 주민들을 내쫓으려 했었다. 토지가 주민들 소유가 아니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주민들이 추방됐다 돌아온 아픈 역사의 상처 때문이다. 다행히 사단법인 섬연구소가 2년에 걸친 노력으로 국민권익위원회의 중재를 이끌어내 주민들은 다시 섬에 영구 거주할 수 있게 됐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