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섬 2025년 9월호

남북으로 헤어져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 부부 , 백섬백길 97코스 강화 볼음도

바다의 군사분계선 NLL

북방한계선(NLL) 안의 섬 볼음도로 가는 여객선은 하루 두 번 뿐이다. 첫배를 타기 위한 여행객들로 외포리 여객선 터미널은 혼잡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외포리 부둣가 상가와 식당들은 한적하기만 하다. 주말이고 한참 행락철인데 어찌 된 영문일까? 도로에는 차들도 많은데 수산시장마저도 썰렁하다. 산나물 등속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궁금증을 풀어주신다. “다리 놔지고 나서 차는 몇 배 더 댕기는데 여기 오는 사람은 확 줄었어요. 자동차 구경만 실컷 합니다. 정신 사나워.” 문제는 다리다. 강화도와 석모도가 다리로 연결되면서부터 여행자들은 외포리를 그냥 훌쩍 통과해 버린다. 다리 개통과 함께 석모도행 여객선이 사라지자 사철 붐비던 외포리는 더없이 한적한 어촌마을이 되고 말았다. 가을에는 그나마 새우젓을 구하러 온 사람들로 활기가 돌지만 다른 철에는 활력을 잃었다. 그렇다면 석모도는 사정이 더 좋아졌을까?

석모도는 2017년 6월 연륙교 개통 후 관광객들은 늘었지만 극심한 교통 체증과 주차난에 시달리고 쓰레기 급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게다가 관광객 증가에 따른 이득은 일부 상인들과 개발업자 등 외부 투자자들에게만 돌아갈 뿐 옛 선착장 주변은 상권이 침체되고 말았다.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주민들 대다수도 이익은 고사하고 교통난에만 시달린다. 강화와 뱃길로 불과 10분 거리, 하루에도 수십번씩 배가 다니던 석모도는 교통 불편이랄 게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다리 공사를 한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여전히 곳곳에서 계획되거나 진행 중인 연륙교 공사들은 유일한 대안일까? 섬의 가치는 지키면서 교통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데도 오로지 다리 공사만 고집하는 정책이 과연 섬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데 한 시간 남짓 운항 끝에 여객선이 볼음도에 기항한다.

선녀는 꺼져버려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볼음도 선착장 대합실 옆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저어새가 들려주는 볼음도 이야기. 볼음도의 역사와 전설, 생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설명해 주는 안내판인데 쉽고 위트 있어 간판 앞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청정하던 신선봉 선녀탕의 물이 오염된 이야기 앞에서는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신선이 살았다는 신선봉 정상에는 선녀탕이란 연못이 있었는데 늘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선녀탕의 물이 오염돼버렸다. 볼음도 마을의 아낙이 선녀탕에서 빨래를 해 더러워진 탓이다. 그 아낙은 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빨래를 했던 것일까? 그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 너희(선녀)들은 사라져 줘야겠다.”

볼음도는 바다의 군사분계선인 NLL 안에 있는 섬이라 선착장 입구에 군인들이 나와 입도객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방문 목적을 물은 뒤 방문증을 나누어 준다. 볼음도는 우리가 여전히 분단된 민족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볼음도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선착장에서 가까운 큰 마을은 당아촌이다. 마을 앞에 마을의 신전인 당산이 있다. 그 당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당 아래 마을, 당아촌이다. 또 한 마을은 9백 살도 더 드신 은행나무 어르신이 굽어살피고 있는 작은 마을, 내촌이다.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행나무골이라고도 부른다. 볼음도는 면적 6.57㎢, 해안선 길이 16km다. 한때는 초등학생 수가 280명이나 됐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전체 주민이 그 정도다. 게다가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두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분교도 폐교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다.

천연기념물 저어새 서식지

섬은 조선시대에는 교동군에 속했다가 1914년 경기도 강화군에, 1995년 인천광역시 강화군이 됐다. 섬을 둘러싸고 평양금이산, 요옥산, 앞남산, 신선봉 등이 있고 그 안에 마을과 농토가 있다. 이 섬 역시 서해바다 조기의 신인 임경업 장군의 전설이 전해진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왕자를 구하러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피해 볼음도에 들어왔는데 마침 보름달이 떠 있어서 볼음도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은 아마도 이 근처 바다가 연평바다처럼 조기어장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옛날에는 볼음도 옆의 아주 작은 섬 아차도에서도 조기파시가 열렸다. 지금은 40여명이 사는 면적 0.67㎢의 아주 작은 섬 아차도가 조기파시 때면 천명이 넘게 들어와 살았고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볼음도에도 어업이 번성했고 기생집이 있을 정도로 흥청거렸었다. 그래서 조기의 신인 임경업 장군을 수호신으로 받들었고 볼음도란 지명 유래에도 장군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NLL 안이라 어로행위가 자유롭지 못해 어로를 하는 가구는 적다. 큰 배 1척, 작은 배 2척뿐이다. 그래서 주민들 다수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건강망(개막이 그물)을 설치해 배 없이도 밴댕이, 농어, 숭어 같은 물고기를 잡는다. 또 갯벌에서는 상합(백합), 가무락(모시조개), 소라 등을 키워 소득을 올린다. 이 갯벌이 천연기념물 419호인 저어새 번식지이기도 하다. 저어새 보호 때문에 주민과 정부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섬이지만 볼음도의 주업은 농사다. 갯벌을 간척해 논을 만든 까닭에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만 평이 넘는다. 섬은 오랜 옛날부터 나지막한 모래 구릉, 해안 사구 위에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다. 그래서 섬의 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 방풍림과 산들이 바닷바람을 막아주어 섬은 분지처럼 아늑하고 벼는 해풍의 피해를 입지 않고 튼튼하게 자란다. 섬에는 강화 나들길 13코스인 13km 남짓의 트래일이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도 좋다.

남북에서 차려주던 은행나무 생일상

큰 마을을 지나고 폐교를 지나 내촌에 이르면 바닷가 저수지 옆에 은행나무 어르신이 우뚝 서 계신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수령 9백년이 넘어 천년 가까이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몸통 둘레 8m, 밑동 둘레 9.7m, 키 25m. 천연기념물 제304호다. 이 나무는 원래 북녘 땅에 살았다. 고려시대 지금의 연안군 호남리 호남 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암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여름 홍수에 수나무가 뿌리 뽑혀 볼음도 바다로 떠내려온 것을 주민들이 건져내 다시 심었다고 전해진다. 볼음도에서 연안까지는 불과 8km. 볼음도 주민들은 호남리 주민들에게 연락해 그 은행나무가 호남리에서 떠내려온 수나무인 것을 확인했다. 암나무와 함께 부부 나무로 있었던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매년 정월 초 풍어제를 지낼 때면 볼음도와 호남리 어부들은 서로 날짜를 맞추어 생일을 지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헤어진 두 은행나무 부부의 슬픔을 달래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은행나무는 한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던 섬 주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찜통 같은 더위에도 은행나무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냉기가 돌 정도로 서늘했다. 열대야 같은 밤이면 주민들이 은행나무 그늘에 모여 잠을 청했다. 바닥에 거적을 깔고 삼사십명의 어른들이 시원하게 잠잘 때 아이들 열댓명은 은행나무로 올라가 저마다 가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나무와 한 몸이 된 아이들. 당시 풍경을 떠올려보니 동화 속 세상 같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처럼 또 이중섭의 그림 속 아이들처럼 신비로운 모습들,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다 환해진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이어진 남북의 은행나무 생일상은 한국전쟁 이후 두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중단됐다. 그 후 볼음도의 수나무는 시름시름 앓더니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은 연안에 사는 암나무의 안부를 알 길이 없어지자 수나무가 죽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사실은 바닷가에 자리해 있어 바닷물의 염분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들어 은행나무 근처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해수가 차단되자 볼음도 은행나무는 다시 살아나 푸르름을 되찾게 되었다. 들리는 풍문에는 북한의 암나무도 합동 풍어제 생일상 차림이 중단된 후 시름시름 앓았었는데 호남 중학교 교직원들의 보살핌을 받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한다. 호남리 은행나무도 북한의 전연기념물 165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나그네가 소장으로 일하는 사단법인 섬연구소(이사장: 박재일)에서는 NLL에 깃든 남북간의 긴장을 풀고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김종진 문화재청장에게 볼음도 은행나무 생일상 복원 행사를 제안했다. 그리고 문화재청과 공동 주관으로 칠월칠석 날인 2018년 8월17일 볼음도 은행나무 아래서 생일상 차리기 행사를 개최했다. 볼음도 주민들과 뭍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은행나무 생일상 복원 행사에 함께했다. 그렇게 볼음도 은행나무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화합의 상징, 평화의 나무로 세상에 우뚝 서는 듯했다. 하지만 행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어서 다시 남북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날이 찾아와 남과 북에서 동시에 은행나무 생일상 행사가 열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