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섬 2025년 12월호

국경의 섬, 주문도와 아차도

“우리는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않을 때는 늘 걷는다. 그러나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도착할 수 있고, 정토 혹은 신의 왕국에 들어설 수 있다.” (틱 낫한)

바다는 지구 최대의 산소 공장

주문도는 국경의 섬이다. 이 바닷길에도 카페리 여객선이 다닌다. 지구상의 모든 녹색식물은 낮에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산소 덕으로 인간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 나무는 산소의 중요한 생산자다. 그러나 지구 최대의 산소 공장은 숲이 아니다. 바다다. 바다는 지구 산소의 80% 이상을 생산해낸다. 우리가 바다위에 떠서 살지 않는다 해도 바다는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공간이다. 바다에서 남조류, 녹조류 등의 식물 플랑크톤과 함께 산소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규조류다. 황해바다의 물빛은 흐리고 탁하다. 해양 오염과 남획으로 물고기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안타까워 하면서도 우리는 정작 바다의 죽음이 몰고 올 생명계 전체의 파국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우리는 슬픔의 후예다!

주문도는 볼음도, 아차도, 말도, 네 섬을 아우르는 강화군 서도면의 중심 섬이다. 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주문도에 있다. 서도면은 네 섬을 다 합쳐도 인구 65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면이다. 주문도에만 그중 절반인 300여 명이 산다. 작은 섬에 초·중·고 세 개의 학교가 다 있다. 다행이다. 학교가 있는 한 섬은 희망이 있다. 섬은 주민들 80%가 개신교 신자다. 섬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어느 한 종교가 다수를 점하면 섬은 그 종교의 왕국이 된다. 종교의 자유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정교일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법은 멀고 삶은 가깝다. 섬의 모든 일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누구든 교회와 등지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 그는 외톨이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누군가는 교회가, 종교가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천만에! 종교가 세속화 됐다는 비난은 부당하고 근거 없다. 어떤 종교가 세속을 떠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종교란 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간을 위해 있지 않은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초세속적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이 섬의 중심은 서도중앙교회(옛 진촌교회)다. 교회는 1923년에 건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한옥에 서양식 건축양식을 접목시킨 교회건물은 세련되고 기품 있다. 예배당 실내는 절의 법당 같다.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섬 주민들의 마음은 절과 교회를 분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해준다면 그것이 절이든 교회든 무슨 상관이랴.

섬은 작고 농토는 비좁지만 이곳에서도 벼농사를 짓고, 고추와 참깨, 옥수수와 콩,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지어 끼니 거르는 사람 없이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이 있고, 부쳐 먹을 땅 한 조각만 있으면 아무리 먼 바다 깊은 산속이라도 찾아들어 살았다. 그렇게 수 천 년의 삶을 이어왔다. 외부의 침략자들, 왜구와 해적들의 노략질과 탐욕스런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의 후예다. 슬픔과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기란 진실로 희귀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로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삶이여! 기적 아닌 삶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고향도 잊어버리고

바닷가 오막살이, 할머니집 마당에는 옥수수가 말라가고 있다. 곡식들은 햇볕을 받아 마를수록 여물어간다. 사람 또한 그렇다. 할아버지는 3년 전에 이승을 하직하셨다. 바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딸 둘, 아들 둘을 키워냈지만 할머니는 혼자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차돌처럼 단단해지셨다. 혼자 남은 할머니의 유일한 의지처는 교회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제사를 모시는 것은 양다리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뒤 할머니는 배 부리던 어구들 태워 없애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할머니에게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어구들이었을 테지만 아쉬운 일이다. 어업의 한 역사가 허망하게 불태워져버렸다. 처마 밑에는 할아버지가 쓰셨을 대나무 낚싯대들이 끼워져 있고, 옛날 쓰던 물지게도 벽에 걸렸다. 부엌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놓여있다.

“할머니 겨울에는 불 때고 사세요?”
“보일러를 못 했시다.”
“오히려 잘 되셨네요. 기름 값도 비싼데.”
할머니는 손을 젓는다.
“매워서, 연기 땜에 맵고, 비 많이 오면 물 나고 말도 못해.”

왜 아닐까. 오랫동안 구들을 손보지 않아 고래가 막혔을 것이다. 그런 아궁이에 환풍기 없이 불을 때면 부엌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찬다. 집이 바다 바람을 피해 저지대에 지어졌으니 큰 비라도 오면 아궁이에는 물이 고이기도 하겠지. 부엌 뒤란에는 장독대가 있다. 장독마다 간장, 된장 등이 한 가득이다. 변소도 물론 재래식. 불을 때고 난 재로 변을 묻어 두었다가 거름으로 내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올핸 배추도 쪼끔 심어야 싱깐. 배추 많이 심어서 머해요. 작년에도 다 담가 놓곤 가질러 와야 하는데 안 오니깐 다 내다 버리느라 혼낫시다. 봄에 다 버렸지, 시어져서 못 먹어. 다들 회사 다니고 바쁘니깐 못 왔지.”

할머니는 가지러 온다는 보장도 없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김치와 된장을 담는다. 김치는 시어터져서 버렸고, 장은 몇 년째 장독대에서 묵어간다. 김장배추를 적게 심겠다고 말은 하지만 할머니는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넉넉하게 김장을 하고 메주를 띄울 것이다. 할머니는 어미인 것이다. 어미는 여든 셋, 얼굴엔 여망 꽃이 피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늘을 찾아가 늘어진다.

“쥐가 하도 들끓어 싸서 어젯저녁에 다른 집서 잠깐 데려다 놨는데 안가고 있시다. 밥 달라기에 밥 줬더니 밥 먹고.”

고양이는 할머니 집이 편하고 좋은 것이다.

“할머니는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 없시다.”
“강화세요?”
“그랫시다.”
“강화 어디신데요?”
“잊어버려서 모르갓시다.”

할머니는 섬으로 시집와서 60년 넘는 세월 동안 친정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옛날 섬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이제 할머니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할머니마저 떠나고 나면 이 집은 폐허가 되고 할머니의 삶을 지탱시켜준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 것이다. 삶의 흔적들이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을 ‘증거’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 삶이 깃들었던 물질들, 죽은 육신과 함께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은 또 어디로 가서 머물게 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