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섬 2024년 6월호

10억 년 전 시원의 풍광 그대로! 국가지질공원 , 백섬백길 81코스 대청도 서풍받이길

백령도와 함께 서해 최북단의 섬. 서울보다 평양이 더 가까운 섬, 대청도는 국가지질공원이기도 합니다. 대청도 농여해변의 나이테바위는 지층이 세로로 서 있어서 10억 년에 일어났던 강력한 지각 변화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100m 높이의 규암덩어리가 수직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서풍받이는 그 웅장한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옥죽포에는 낙타가 다녀도 될 만큼 드넓은 섬 속의 사막이 있습니다. 사탄동 모래울해변의 솔숲은 서해안 최고의 적송 숲입니다. 대청도는 어느 한 곳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자연경관이 시원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대청도가 이토록 완벽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근의 백령도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동안에도 대청도는 무명의 섬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대청도는 최고의 홍어 어장이었고 그 덕에 홍어, 꽃게, 우럭 등을 잡는 어업이 발달했었지요. 어업으로 돈을 버니 관광 같은데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덕에 대청도의 원시 자연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청도는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의 유배지

오래 전 역사왜곡 논란 속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드라마 <기황후> 속 기승냥(?-?)의 남편이자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재위 1333~1370), 토곤 테무르(타환)의 흔적이 이 땅에도 남아있다. 즉위하기 전 타환은 1년 5개월간 고려로 유배당했는데 그곳이 바로 대청도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서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이다. 대몽 항쟁을 벌이던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뒤 공녀와 환관에 대한 징발이 시작됐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공녀 1000여 명을 시작으로 100여 년 동안 고려 출신의 수많은 공녀와 환관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귀족의 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공녀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왕족이나 고관들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기도 한 고려 말의 유학자 가정 이곡(1298-1351)은 ‘공녀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공녀로 뽑히면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공녀로 끌려가는 여인들의 참혹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일제가 정신대란 이름으로 조선 처녀들을 납치해 간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침략전쟁의 가장 큰 희생양은 여자들이었다. 고려 때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녀 또한 그렇게 공녀로 징발돼 갔다. 공녀인 기씨녀가 원나라 황후가 된 데는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조력이 컸다. 고용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기씨녀를 황제의 다과를 시중드는 궁녀로 만들었다. 고용보와 또 다른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등의 협력으로 기씨녀는 왕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순제의 제2황후가 됐고 나중에는 제1황후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황후는 1353년, 자신의 아들 아유시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 왕실의 재정에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원나라 멸망 때까지 30여 년간 권력을 누렸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징발하는 공녀제도를 폐지시켰다. 원나라가 주원장에게 함락되면서 몽골고원으로 쫓겨 간 이후 기황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아유시다라는 몽골 내륙에 세워진 북원의 초대 황제 소종이 됐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순제(順帝)를 대청도로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 부처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해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하였는데, 얼마 후 돌아가서 등극하였다…순제가 심었던 뽕나무, 옻나무, 쑥, 꼭두서니 따위가 덤불 속에서 멋대로 자라다가 저절로 말라비틀어지고, 궁실의 섬돌과 주추 자리가 지금도 완연하다.”(이중환 <택리지> 팔도 총론)

1330년 원나라의 권신 엔터무르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순제의 아버지 명종을 암살했다. 그때 명종의 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대청도로 유배 보내졌다. 1년 5개월 간 대청도에서 유배살이를 한 토곤 테무르는 원으로 돌아가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로 등극했다. <택리지>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전설이 대청도에도 전해진다. 대청도의 전설은 태자가 계모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것으로 변용되었다. 전설은 지금의 대청초등학교 자리가 순제가 살던 집터였고 대청도의 주산인 삼각산도 순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궁궐터였다는 곳에서는 기왓장도 발굴되었다. 원나라 침략기의 제주도처럼 대청도나 백령도 또한 원 지배계급의 유배지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 <택리지>의 기록은 믿을만한 전언이다.

대청도 사막에 가면

대청도 옥죽포에는 사막이 있다. 사막처럼 거대한 모래언덕, 옥죽포사구가 있다. 바닷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쌓이고 쌓여 생긴 모래언덕이다. 면적이 가로 1㎞, 세로 0.5㎞에 이른다. 해발 80m 높이까지 모래가 쌓였었다. 면적이 20만 평(66만㎡)이 넘던 옥죽포사구는 나무를 심으면서 모래 공급이 차단되고 모래 유실이 가속화되어 현재는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처녀가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주민들의 생업은 물론이고 일상생활마저 불편할 정도였던 까닭에 모래바람을 막고 사구를 안정화시킬 목적으로 1980년대부터 계속해서 사구에 소나무를 심었다. 덕분에 모래바람도 줄어들었고, 나무들이 점차 사구 표면을 덮기 시작했다. 사구가 사라져가는 것을 복원하기 위해 최근에는 다시 나무들 일부를 베어냈다.

사구는 대청도 사막이다. 대청도 사막에 가면 사람들은 사막은 사막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숨구멍 하나 없는 아스팔트 세상이야말로 진짜 사막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사막이야말로 비로소 막혔던 숨통 터주는 오아시스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 대청도 모래사막에 외래종 풀 제거 작업을 나온 어머니들은 옛날 섬에서 부르던 민요를 불러준다. 옥죽포 마을 어머니들은 방아타령을 부르며 그 모진 사막의 세월을 건너왔다.

“아침 방아 찧어라

저녁 방아 찧어라

콩당콩당 찧어라

콩콩 찧어라

잘도 잘도 찍는다”

사막을 갈아 자식들 먹이고 키운 우리 어머니들 방아 찧는 소리다.

“방아 방아 찧어라

아침 멕이 찧어라

저녁 멕이 찧어라

콩당콩당 찧어라

알콩달콩 노놔서

너도 먹고 나도 먹어보자”

북한 땅 장산곶이 건너다보이는 대청도에서 어머니들에게 무서운 것은 북한이 아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삶이다.

“북한 가까워 무섭다 하지 그게 아냐 아무렇지도 않아”

모래바람 몰아치는 사막에서 어머니들은 오늘도 풀을 매고 살아간다.

대청도의 미아해변과 농여해변은 국가지질공원의 일부다. 농여해변의 나이테 바위는 지층이 세로로 서 있어서 10억 년에 일어났던 강력한 지각 변화의 힘을 느끼게 한다. 해변은 시간의 화석이다. 만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지상의 비밀들,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화석.

대청도 미아·농여해변에는 열반에 든 물고기도 있다. 바다는 바다생물들의 자궁인 동시에 무덤이다. 물고기는 제가 놀던 물속 모래밭에서 전설의 고승처럼 선채로 적멸에 들었다. 이제 물고기는 한때 제 먹이였던 것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미아·농여해변에는 시간을 거스르는 물살이 있다. 수억 년 풍파를 견뎌낸 바위들, 풍파를 못 이기고 부셔져 모래알이 된 바위들. 이 해변에는 바위도 먼지가 되고 물고기도 먼지가 되고 사람도 먼지가 되는 시간의 지층이 있다. 미아·농여해변 시간의 화석에는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바위와 모래와 물고기와 사람들, 모두 한 뿌리에서 와서 한 뿌리로 돌아가는 우주가 있다. 물고기와 바위와 모래와 사람과 해파리가 모두 한 형제라는 깨달음의 지층이 있다.

국가지질공원 대청도

대청도는 국가지질공원이다. 국가지질공원은 경관이 우수하고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환경부가 인증한 공원이다. 2019년 7월 옹진군의 국가지질공원이 된 곳은 백령도 두무진과 진촌리 현무암, 사곶해변, 콩돌해안, 용틀임바위다. 대청도에서는 옥죽동 해안사구와 농여해변, 미아해변, 서풍받이, 검은낭이다. 소청도의 분바위와 월띠도 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지질공원으로 인증된 곳이 아니라도 대청도는 거의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아마도 대청도가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청도가 개발의 바람에서 비켜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대청도가 어업의 섬이었기 때문이다. 인근의 백령도가 농업이 주업인 것과는 달리 대청, 소청도는 홍어, 꽃게, 우럭, 놀래미, 해삼 등 어로 활동으로 먹고 사는 섬이었다. 홍어 하면 흑산도를 먼저 떠올리지만 홍어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은 실상 대청도 어장이다. 어업으로 돈을 버니 굳이 관광 같은 거 관심 둘 이유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옥죽포의 몇몇 팬션과 여행사들이 단체관광객을 유치해 관광업도 일정 부분 활성화됐다. 하지만 아직도 대청도는 어업에 기대 산다. 그런데 근래 들어 대청도 어장의 물고기 씨가 마르고 있다. 다양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대량 남획, 바다 환경오염 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래서 어선을 팔려고 내놓은 선주들도 여럿 된다. 바다의 씨가 마르고 있는데 바다 살리기부터 해야 할 해수부는 정작 바다 살리기에는 관심 없다.

그래서 걱정이다. 대청도에 어자원이 줄어들고 배 사업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주력이 관광산업으로 이전해 갈 가능성이 크다. 실제 그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당연히 관광으로 섬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신안의 홍도가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설계를 잘 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 이상 아무 시설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대청도의 관광자원은 최상이다. 옥죽포사막, 미아·농여해변, 모래울해변과 홍송숲, 서풍받이, 지두리 트레킹 코스, 삼각산 등산로 등 이미 넘치도록 충분한 자원이 있다. 더 이상 무슨 시설 같은 거 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시설 같은 거 없는 것이 대청도의 가장 큰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광업의 이득이 일부에게만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섬 주민 전체가 지켜온 자원이니 섬 주민 전체가 먹고 살 수 있게 설계되어야 마땅하다. 섬 전체가 국가지질공원이니 입장료를 받아도 손색이 없다. 그 돈으로 대청도 주민 전체에게 기본소득을 주어도 좋을 것이다. 홍도처럼 유람선도 관광버스도 주민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마을기업에서 운영하게 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 수익 역시 기본소득으로 분배되게 하면 어떨까? 인천시와 옹진군이 관광객 숫자 늘리는 데만 관심 갖지 말고 관광 수입이 주민 전체에게 골고루 나누어질 수 있는 방법을 잘 찾아갔으면 좋겠다. 관광수입으로 기본소득을 주는 섬, 얼마나 멋진 기획인가.

“돈 안 받을 테니까. 빵 하나 먹고 가”

대청도는 면적 12.63㎢, 해안선 24.7㎞.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의 먼 거리에 있지만 북의 황해도 장산곶과는 19㎞에 불과하다. 백령도, 연평도 등과 함께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해 분단을 몸으로 안고 살아왔다. 오늘은 대청면 소재지가 있는 선진포구에서 동내동 방향으로 길을 잡아 도로를 따라 걸었다. 선진포구에도 몇 군데 민박집이 있지만 배낭을 풀지 않고 걸었다. 숙소를 정하고 걷는 길은 짐이 없어서 가벼운 반면 길을 걷다 마음 가는 곳에 머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삶이 그렇듯이 여행 또한 과정이다. 여행은 곧 길이다. 목적지에 이르는 것보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야말로 여행의 진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여행의 과정을, 삶의 과정을 생략해 버리는가? 서둘러 목적지에 가기 위해 과속의 페달을 밟아대기만 하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을. 여행길에는 서둘지 말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걷기보다 더 훌륭한 여행의 기술은 없다. 천천히 걸으면서 나그네는 스스로와 대면하고 세계와 내밀하게 소통한다. 일상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사유의 폭을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인적 없는 길을 세 시간 동안 걸으니 사탄동해변이다. 안개의 계절. 사탄동마을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개의 군단에게 자리를 내준 것일 테지. 하지만 나는 마을이, 해변이, 푸른 소나무들이, 바다와 산과 하늘이 안개 속으로 아주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마을과 사람과 염소와 소나무와 백사장.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다음에야 문득 깨닫는다. 내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 남겨지길 원했구나. 사람은, 존재는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다. 함께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존재들 속에서 문득 혼자인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함께 있어도 함께가 아닌 것들. 사람들, 염소들, 푸른 소나무와 흰 모래 알갱이들, 마을길과 바다와 산들. 은수자가 사막의 모래폭풍을 견디며, 외로움에 미쳐버리지 않고 몇 십 년을 살 수 있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혼자서는 결코 외로울 수도 없는 것이다.

사탄동 해변가 민박집에서 하룻밤 유숙할 생각이었지만 여름철에만 민박을 한다니 별 수 없이 다시 면 소재지까지 나가야 한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다.

“할머니 선착장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나요.”

“멀어, 이 밤중에 거기를 어찌 갈려고.”

할머니는 나그네의 소매를 붙드신다.

“빵이나 하나 먹고 가.”

할머니는 구멍가게 주인이다.

“돈 안 받을 테니까. 먹고 가. 거기까지 갈려면 배 고파서 안 돼.”

할머니는 걸망을 맨 나그네가 안쓰러워 보이셨나 보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저는 부둣가에 가서 밥 먹으면 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빵, 많이 있는데, 하나만 먹고 가지 그래.”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할머니.”

할머니는 밤길 떠나는 길손이 내내 걱정이시다. 길에서 만나는 어머니들은 세상 모든 자식의 어머니다. 어둠 속에서 산길을 넘는다. 해안에는 안개 자욱하고, 파도는 도로까지 넘실거린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대청도의 밤길. 옛적 등짐 진 나그네들도 막막한 이 밤길을 넘어 다녔을 것이다. 네 시간 만에 다시 제자리, 섬 일주도로를 따라 면 소재지 선진포구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