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늙도록 섬을 못 떠나고
욕지도 제암마을, 언덕빼기 청보리밭에서 할머니 혼자 보리를 베고 있다. 보리 베는 풍경이 그림 같아 할머니의 뒷모습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할머니가 뒤를 돌아본다.
“저 찍었어요?”
“네, 너무 귀한 모습이라 허락도 없이 찍었습니다.”
“못생긴 얼굴을 뭐할라꼬. 예쁜 모습 찍어야 되는데.”
“고우신데요 뭘.”
“혼자 오셨는가예?”
“예”
“혼자 오면 외로울 낀데.”
보리는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벌써 베는 걸까?
“왜 벌써 보릴 베세요?”
“소 먹일라꼬 그랍니다.”
할머니는 소 세 마리를 키우신다. 소먹이로 보리를 심은 것이다. 청보리 순은 연해서 소 먹이로 적당하다. 생으로도 먹이고 말려뒀다 먹이기도 한다. 욕지도에는 고구마가 가장 흔한 작물이다. 그러니 수확이 끝나면 고구마순도 말렸다가 겨울에 소 먹이로 쓴다. 할머니는 어제 마을 어른들과 함께 관광을 다녀왔다. 경주에 갔다가 내친김에 포항까지 들렀다가 왔다.
“시간이 없어서 차만 댓다가 왔어요. 안 가본 데라 한번 갔어요.”
경주나 포항 사람들은 욕지도로 관광 오고 욕지 사람들은 경주나 포항으로 구경을 간다. 하지만 별거 있으랴.
“구경이 어디 별거 있습니까. 다 거기가 거기고.”
그렇긴 하다. 안 가본 곳을 가면 그것이 여행이고 관광인 것이지. 할머니는 욕지도에서 태어나 욕지도 남자와 결혼해 내내 살았다.
“저 산 너머 덕동마을이 고향입니다. 산 너머 고개 넘어 시집 왔으니 멀리 왔지요.”
농담처럼 말씀 하시지만 어디 고개 하나만 넘어 왔으랴. 삶이 내내 고갯길이었을 것을. 딸들은 서울에 산다.
“대학교를 거기서 나와서 안 내려와요.”
하지만 할머니는 욕지도가 제일 좋다.
“다 다녀 봐도 여가 젤로 좋아요. 제집이 제일이죠.”
섬이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두 분이서 내내 농사만 짓고 살았다. 농사만 지어 자식들 가르치자니 힘들었다. 이 마을에도 젊은 사람이 없다. 50대가 가장 어리다. 과거 욕지도는 어업전진기지였다. 배를 부리는 사람들은 큰돈을 벌었다. 섬이지만 육지 문물이 일찍부터 들어왔고 상업도 발달했다..
“이 섬이 그냥 웃기는 섬이예요. 사는 것은 그저 그런데 하고 다니는 거보면 입는 거나 먹는 거나 서울사람 못지않아요. 명품을 어찌나 좋아 하는지.”
지금은 예전만큼 경기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소비문화의 수준은 그대로다.
“객지 나가서 섬에서 왔다하면 깜짝 깜작 놀래요. 그 정도로 명품을 좋아해요. 옷 같은 거 메이커 고급으로만 입어요.”
딸만 다섯을 둔 딸부자. 하지만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밖에서 나오라고는 안하데요.”
시부모가 아들에게 밖에서 아들을 낳아오란 요구는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란 말씀. 이제는 성장한 딸들이 다 잘한다. 아들 있는 집 하나도 부럽지 않다.
“아들도 아들 나름, 딸도 딸 나름이지. 다 좋을 수가 있나요. 현재까지는 잘하고 있습니다만. 낼은 모르죠. 어짤란지.”
임신을 하고서도 밭일을 쉬지 못했다. 평생 밭만 파고 살았다. 섬살이가 하도 고달파 젊어서는 섬을 떠나고 싶은 적도 많았다.
“후회가 왜 없겠어요. 남들처럼 객지 나가서 남편 벌어다 주는 돈 받아 편히 살았으면 좋았겠지. 여서 나서 여서 크고. 평생을 섬에서 갇혀 살았어요.”
그래도 나가지 못했다. 그것도 팔자려니 했다.
“요 땅에서 나서 요 땅에서 늙어 죽게 됐지요. 아이가 늙도록 섬을 못 떠났네요. 농사짓고 애 키우고 살다보니 한 평생 잠깐이데요.
할머니의 말씀이 서글프다. 그렇게 잠깐 사이 한생이 갔다.
연화욕지두미문어세존
통영은 섬나라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영을 바다의 땅이라 부른다. 통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섬들이 모여 연화열도를 이룬다. 연화열도의 중심 섬인 욕지도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비경을 자랑한다. 통영항에서 32km, 한 시간 거리의 뱃길이다. 청보석의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여들. 욕지도 바다의 풍경은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욕지도는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탁 트인 남태평양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다도해의 소담함과 대해의 장쾌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섬이다. 욕지도를 본섬으로 하는 욕지면은 10개의 유인도와 4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욕지도에 면소재지와 각종 관공서가 위치해 있다. 욕지도에는 2000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각종 욕지도 관광 안내서에는 욕지(欲知)의 뜻을 ‘알고자 하는’으로 풀이해 놓고 있다. 무얼 알고자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그냥 글자 뜻풀이 일 뿐 욕지도란 이름의 진짜 의미를 풀이해 주지는 못한다. 욕지도의 뜻은 그 자체로는 결코 풀이될 수 없다. 욕지도 한 섬만으로도 풀이가 되지 않는다. 욕지도의 뜻은 주변의 다른 섬들,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 등의 섬들과 연계될 때 비로소 실마리가 풀린다. 욕지도를 비롯한 이들 섬의 이름은 “欲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이라는 불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연화세계(극락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그 처음과 끝을 부처님께 물어보라.” 옛날 욕지도를 비롯한 연화열도의 섬들은 스스로 이미 연화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이름은 불국토, 이상향을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획 하에 지어진 것처럼 아귀가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이름의 섬들이 통영바다에만 몰려있을까. 근처의 미륵도와 반야도 또한 이 불국토의 자장 안에서 지어진 이름이리라.
산에 올라야 섬의 진면목이 보인다
욕지도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인 조개무지(패총)가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욕지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삼한시대나 가야,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도 사람살이가 이어졌을 것이다. 가야시대에는 6가야 중 수로의 막내 동생인 말로가 지배하던 소가야 소속이었다. 고려사에는 우왕 4년(1378년) 8월 “배극렴이 욕지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9년(1409년)7월15일 기사에도 욕지도란 지명이 등장한다. 욕지도란 이름은 그만큼 오래된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호주라 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사료는 없다.
욕지도에는 고려 말까지도 주민들이 살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거주가 허가되지 않았다.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에 실시된 공도정책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로 군선들의 정박지로 이용됐다. 통제영 소속이던 욕지도가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실 궁례부의 명례궁 소속으로 바뀌었다. 왕실의 욕심 때문이었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입주가 다시 허락된 것은 조선시대 말에 와서다. 1887년(고종 24년) 조정에서 욕지도 거주 허락이 떨어졌고 1887년 장수나무 아래서 입도인 4명이 소를 잡아 개척제를 지내며 사람살이를 시작했다. 1988년에는 욕지개척 100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개척 당시에는 사슴이 많아서 녹도라 불리기도 했다. 개척자들의 구전에 따르면 입도 당시 욕지도에는 전함이 계류하던 곳인 전선소, 관청인 치소, 손님의 숙소로 쓰던 관소가 있었고, 산정에는 위급을 알리는 봉화대도 있었다. 아직껏 남아 있는 조선포나 관청마을, 옥섬 등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 듯 보인다.
욕지도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입도 후 욕지도 주민들은 대체로 어업에 종사했다. 워낙 어장이 풍성했다. 욕지도는 특히 멸치의 주산지였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한 뒤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주요 어법이었다. 또 김경일과 김홍포 등이 들망을 발명해서 어업기술을 발전시켰다. 일본이 황금어장인 욕지도 바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욕지도는 일제가 식민지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어업 이민지 중 하나가 됐다. 1895년 경부터 도미우라라는 일인이 욕지도를 들락거리며 조업을 하는 동시에 욕지도의 수산물을 매입해 일본에 팔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반에는 아애 욕지도에 정착했다. 선박과 어구, 어업자금을 빌려주고 어민들을 수탈해 갔다. 그가 정착한 곳이 욕지도 고등어 파시가 열렸던 자부포(좌부랑께)였다.
일제 때는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풍어를 이루었고 남해안의 어업전진기지였다. 당시 욕지도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서울, 마산, 일본, 만주 등지로 수출 됐다. 1915년경에는 조선인 2만864명, 일본인 2127명 등 인구가 2만3000명에 이를 정도로 섬이 번창했다. 지금 욕지도는 잡는 어업보다는 기르는 어업이 중심이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득하다. 또 욕지도에서는 처음으로 고등어 양식이 시작되어 성공했다. 서울 등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다.
욕지도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욕지도의 진면목은 해변에 있지 않다. 해변에 가면 섬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욕지도만이 아니다. 어느 섬이든 섬을 온전히 보고 싶으면 섬의 산에 올라야 한다. 욕지도를 찾는 사람들은 주봉인 천왕산에 올라야 진짜 욕지도를 봤다 할 것이다. 가장 높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는 데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발길이 날렵한 사람은 30분만에도 오를 수 있다. 욕지도에는 천왕봉(392m)을 비롯해 대기봉(355m), 약과봉(315m), 일출봉(190m) 등의 여러 산이 있다. 산에는 등산로가 잘 나 있어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에 오르지 못할 형편이라면 혼곡 마을 등산로 입구에서 노적, 통단마을까지 이어진 해변 트레일을 걷는 것도 좋다. 탁 트인 바다와 오솔길을 번갈아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여행자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황홀하다.
천왕봉은 옛날부터 섬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긴 산이다. 섬사람들은 산기슭의 제당에 천왕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동항마을 위 상수원 저수지 기슭에는 아직도 산신당이 있다. 천왕봉은 최근까지도 천황봉이라 불렸다. 본래 천왕봉이었는데 일제 때 천황봉으로 바뀌었다가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의 산 이름은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했다. 천왕봉의 천왕은 사천왕의 그 천왕이다.
욕지도 명물 고구마 막걸리와 밀감
섬 전체가 산악지형인 욕지도에는 아름다운 숲도 많다. 그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숲은 자부포의 모밀잣밤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343호)다. 우리나라 난대림에서 잣밤나무 숲이 이처럼 군락으로 살아남은 경우는 드물다. 그 귀한 잣밤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숲은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면소재지 뒤안 제암마을에서 자부포 대풍바위까지 이어진 임도 또한 한적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욕지도는 논이 거의 없고 비탈 밭이 많다. 밭은 끈적한 찰황토가 아니라 물이 잘 빠지는 마사토에 가까운 황토밭이다. 그래서 고구마 농사가 잘 된다. 욕지 고구마는 해남 화산 고구마만큼이나 달고 맛있다. 넓적하게 잘라서 말린 고구마인 ‘빼떼기’로 끓인 빼데기죽도 유명하다.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 하는데 욕지도 고메 막걸리는 고구마 케잌 속의 고구마 속살보다 더 달콤하다. 운이 좋으면 욕지도의 할머니가 집에서 직접 담근 고메 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다. 욕지항 선창가 붕어빵 수레에서 막걸리를 병에 담아 파신다. 진짜 섬의 전통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또 하나 욕지도의 명물은 밀감이다. 사람들은 제주도에서만 밀감이 나는 줄 알지만 남해안의 거의 모든 섬들에 밀감나무가 자란다. 욕지도의 밀감 재배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토질을 조사한 후 1966년부터 시험재배하면서 시작됐다. 노지에서 나는 욕지도 밀감은 달고 새콤한 맛이 야생의 맛 그대로다.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 해마다 찾는다.
욕지 총각한테 발목 잡힌 제주 해녀
욕지도에는 과거 제주에서 물질을 왔다가 욕지도 총각에게 발목이 잡혀 몇 십 년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사는 해녀들이 여럿이다. 그래서 욕지도 뱃머리에는 해녀가 직접 물질해 온 전복, 해삼, 소라, 합자(조선홍합)들을 맛볼 수 있다. 해녀의 남편인 어부가 낚아온 싱싱한 횟감들은 덤이다. 섬에서는 갓 잡아온 이런 해산물을 먹는 것이야말로 섬 여행 최고의 즐거움이다. 제주에서 물질 왔다가 정착한 어떤 해녀의 집. 해녀는 스무살 처녀시절 욕지도에 물질을 왔다가 어부인 사내를 만났다. 벌써 30년도 전이다. 해녀는 한사코 자신이 발목을 잡혔다하는데 어부는 늘 해녀가 발목을 잡았다고 한단다.
해녀는 자신이 잡아온 성게와 돌멍게, 굴을 까주고 남편인 어부가 잡아온 활 고등어를 회로 떠준다. 성게알의 맛은 달디 달아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돌멍게도 바로 잡아온 것이라 고소하다. 고등어는 너무 작아서 맛이 덜 들었지만 이 또한 달다. 해질녘 욕지도 선창가의 해산물 부페. 서울 어느 특급호텔에서도 결코 맛볼 수 없는 최고의 성찬이다. 술 한잔을 마시자 온몸에 취기가 오른다. 하지만 이런 성찬 앞에서라면 몇 병의 술을 더 마셔도 취기는 처음 그대로일 것이다.
출어를 나갔던 어부가 돌아왔다. 어부는 횟감을 또 잡아왔다. 어부에게 묻는다. 누가 발목을 잡았나요. 어부는 겸연쩍게 웃는다.
“제가 잡았죠.”
해녀는 어이가 없는지 푸하핫 웃는다.
“별일이네 낼은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네. 늘 내가 발목을 잡았다더니.”
해녀는 마침내 어부의 자백을 받아냈다. 기분이 좋은 걸까, 처녀 적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간 걸까. 목소리에 설레임이 묻어난다. 어부가 볼락 한 마리를 회 떠서 서비스로 가져다준다. 해녀는 큼직한 전복 하나를 통째로 잘라다 준다. “양식이 아니라 자연산이에요. 자연산.” 자백을 받아내 준 보답이이라. 아, 이 정겨운 맛을 평생 어찌 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