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은 ‘섬의 날’이다. ‘섬의 날’은 소중한 삶의 터전인 ‘섬’의 가치와 중요성을 국민과 함께 공감하기 위해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올해 2024년 8월 8일은 제 5회 섬의 날이다. “섬, 좋다”는 주제로 행정안전부와 충청남도, 보령시가 주최하는데 9~10일에는 섬의 날 공식 행사의 하나도 백섬백길 걷기 대회가 열린다. 참가자들은 제주올레 창시자 서명숙 이사장, 영화배우 류승룡과 함께 백섬백길 72코스 보령시 삽시도 둘레길과 73코스 효자도 둘레길을 걷는다.
8월 이달의 섬에서는 72코스 보령 삽시도 둘레길을 소개한다.
바지락과 홍합과 석화의 섬
삽시도(揷矢島) 밤섬 선창가. 여객선이 도착하자 어민들은 뭍으로 보낼 홍합과 바지락 망태기를 싣느라 분주해진다. 오후 막배에는 섬에서 나가는 사람보다 조개들이 더 많다. 삽시도는 충남 보령의 섬이다. 면적 3.78㎢. 안면도 남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다. 200여 가구 500여 명의 주민들이 터잡고 살아간다. 대천항에서 여객선이 오간다. 마한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지만 조개무지가 발견된 것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이미 사람살이가 시작됐을 것이다. 섬의 형태가 마치 화살촉과 같은 모양이라 해서 삽시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거멀너머, 진너머, 밤섬해변 등 물놀이하기 좋은 해변이 많아 여름이면 사람들이 몰린다. 섬 곳곳에 새로 지은 팬션과 방갈로들이 제법 눈에 띈다. 민박도 많다. 더러 IMF 때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 숙박업을 하며 생계를 꾸리기도 한다.
오늘 섬은 온통 구수한 멸치젓 냄새로 은은하다. 섬사람들은 늙어가고 섬은 깊이깊이 곰삭아간다. 이즈음 삽시도는 한창 홍합철이다. 멸치잡이철이다. 배를 가진 어민들은 안강망 그물로 멸치를 잡고 무인도에 가서 홍합을 따온다. 홀로 사는 노인들은 갯가에 나가 바지락을 파다 살아간다. 저물녘 선창가에는 할머니 한 분, 바닷물에 열무를 씻고 있다. 텃밭에서 솎아온 열무들. 바닷물에 담갔다 건져내면 소금뿌리지 않아도 간간하게 저려진다. 난생 처음 들어가보는 바닷속이 숨막혔던 것일까. 땅속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빳빳하게 고개 쳐들고 있던 열무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고무 대야에 숨죽이고 누웠다.
작은 섬이어도 삽시도는 농토가 많다. 밭농사뿐만 아니라 논농사도 자급이 가능할 정도다.
“할머니 어디 묵을 만한 데 있나요?” “이 동네는 민박할 곳 많아유. 좋은 집 데려다 줄테니 따라와유.”
“할머니 집은 민박 안 하세요?”
“우리 집은 별로 안 좋아.”
“그래도 할머니 집에 재워주세요.”
할머니는 바닷물에 저려 손수레에 싣고 온 열무로 김치를 담근다. 내일 아침 도시 사는 아들집에 꽃게무침이랑 택배로 부치실 생각이다. 움직일 힘이 있는 한 내내 그러하실 게다.
선창가 벽보판에는 삽시도 어촌계의 안내말씀이 붙었다. 삽시도 주위 갯바위는 해삼, 전복 양식장이다. 섬 주민의 텃밭인 것이다. 매년 막대한 돈을 들여 해삼, 전복의 종패를 뿌려 키우고 있으니 관광객들은 갯바위에 들어가 해삼, 전복을 채취하지 말아 달라. 주민들이 조를 짜서 주야 순찰하고 있으니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 바지락 양식장도 통제하고 있으니 알아달란 말씀들이다. 그동안 몰지각한 관광객들로 인해 피해가 컸었나 보다.
삽시도에는 여객선이 접안하는 선창이 두 곳이다. 윗말 선착장과 이곳 밤섬 선착장. 들고 나는 물때에 따라 대는 선착장이 다르다. 수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40여 가구가 사는 밤섬 마을 앞 해변 갯벌은 펄과 모래가 섞인 혼합갯벌인데 바지락 양식장이기도 하다. 삽시도는 바지락섬이다. 89ha나 되는 갯벌에서 바지락을 양식한다. 삽시도 어촌계 120여 가구가 참가하는 바지락 채취는 봄, 가을 두 번이다. 4월부터 6월까지, 또 9월부터 10월까지 채취하는데 연간 무려 200여 톤의 바지락이 채취된다. 삽시도 바지락은 타 지역의 바지락보다 속이 꽉 차고 씨알이 월등히 크다. 그래서 타 지역보다 20∼30% 비싼 가격에 판매된다. 주민들도 큰 소득을 올린다. 바지락 채취가 없는 늦가을부터 겨울 동안은 홍합을 따거나 해변에서 굴을 깨 소득을 올린다. 삽시도 갯벌은 그야말로 황금벌판이다.
모래섬의 둘레길을 걷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삽시도 둘레길을 걸으러 간다. 밤섬마을 뒤안 해변은 밤섬해수욕장이다. 수루미해수욕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해변은 길이 1km의 아담한 해수욕장이지만 폭이 100m나 되는 너른 백사장이 있고 수심도 낮아 물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물길이 끝나는 곳이라 해서 수루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이 백사장은 푸른 솔숲이 감싸고 있어 그야말로 백사청송의 장관을 이룬다. 수루미해변 앞 바다에는 불모도가 있어 물안개라도 피어오른 날이면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불모도는 또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구실을 한다. 불모도는 여객선이 들어가지 않는 섬인데 원주민들은 모두 떠나고 외지인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뽀트’를 타고 수시로 다녀간다고 해변에서 만난 노인이 알려준다. 불모도 옆에는 추여, 용메기라고도 하는 바위섬이 병풍처럼 서 있다.
밤섬 선착장에서 만난 키 작은 개 한 녀석이 내내 따라온다. 해변에서 만난 노인은 애완견이었는데 버려져 들개가 됐다고 일러준다. 녀석은 눈망울이 더없이 순하고 슬퍼 보인다. 사람에게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뒤따르는 녀석의 순정이 눈물겹다. 녀석은 앞서 가다가도 내가 잠깐 멈추면 저도 멈춰서 기다려준다. 해변에는 금송사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절의 스님일까? 밀짚모자를 쓴 노인 한 분이 절 근처 텃밭에서 풀을 뽑고 있다. 금송사 주변은 온통 너른 솔숲이다. 이 섬도 신안의 임자도나 자은도 같은 모래섬이다. 땅은 온통 모래땅이고 곳곳에 방죽이 있다. 저 또한 모래치, 물치이리라.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구릉을 이루고 그 사이 웅덩이가 생겨 모래들이 머금고 있던 물이 흘러들어 모래치라는 방죽이 생긴 것이다. 방죽에서는 개구리가 울어댄다.
금송사에서 거멀너머로 가는 숲길을 빠져나오자 산속에 분지가 나타난다. 작은 방죽이 있고 그 옆으로는 제법 너른 습지가 있다. 이곳은 늪일까. 일부는 농사를 짓던 논 같기도 한데 지금은 온갖 수서생물들이 살아가는 늪처럼 보인다. 첨벙거리며 울어대는 개구리떼 울음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장엄한 생명의 대합창 소리다. 요즈음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밭일을 하는 노인에게 물으니 3∼4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던 논이란다. 대천에 살던 이가 트랙터까지 가져와 벼농사를 지었는데 모가 한참 자랄 때 태풍을 맞고 말았다. 1만 평의 논농사가 파농이 된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후 결국 농사를 짓던 이는 병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논은 묵혀져버렸다.
그 사이 모래섬답게 물이 풍부한 덕에 묵혀진 논은 습지로 변했다. 단지 3년 남짓 사람의 개입이 중단된 것뿐인데 생태계가 살아난 것이다. 사람이 논으로 만들기 전에는 이곳 또한 자연습지였을 것이다. 이 습지가 된 논은 공유지가 많다고 한다. 되살아난 습지를 그대로 살려 생태습지로 보존한다면 삽시도의 또다른 보물이 될 듯하다. 습지의 끝자락 진너머해수욕장 부근에서 둘레길이 시작된다. 삽시도 서쪽 해변 산중턱을 따라 길을 낸 둘레길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새로 만든 길이라 아직은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솔숲길은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둘레길은 면삽지에서 물망터, 황금곰솔을 지나 다시 수루미해변의 금송사까지 이어진다. 면삽지는 삽시도와 연결된 아주 작은 무인도다. 물이 들면 서로 다른 섬이 되고 썰물이면 하나가 된다. 물망터는 들물이면 바다 속에 잠기고 물이 빠지면 민물이 나오는 곳이다. 칠월칠석날 목욕을 하면 신병이 없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황금 곰솔은 수령 45년의 작은 소나무다. 염록소 부족으로 솔잎이 푸르지 않고 황금빛을 띈다. 백사나 흰동백 같은 변이종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소나무라 보존가치가 크다. 둘레길은 수루미해변에서 끝이 난다. 나그네는 둘레길도 좋지만 섬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오고간 작은 오솔길들이 더 아늑하고 좋다. 이런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이야말로 삽시도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자식들 다 줘도 안 아깝죠
웃말 논둑길을 걷는다. 논둑길의 끝은 뒷말이다. 텃밭이 볏짚으로 덮여있다. 무얼 심은 걸까. “마늘을 심었시유.” 톳을 널고 빈 수레를 끌고 오던 초로의 여자가 말을 받는다.
“삽시도서 얼마 안 살았슈, 한 30년밖에 안 됐는디.”
여자는 뭍에서 시집와 살았던 세월을 짧다고 한다. 섬에서 태어나 살아온 노인들에 비해 짧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고단한 섬살이 30년이 어찌 짧을 것인가. 여자는 부여의 무량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자의 나이 스물아홉일 때 뭍으로 시집와 살던 큰 시누이 소개로 섬 남자를 만났다. 그때까지 여자는 베 짜는 일을 했었다. 기모노 만드는 베를 짜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가내수공업 공장을 다녔다.
문명을 누리던 여자가 섬으로 왔을 때 섬에는 발전소가 없었다. 자가발전으로 저녁에만 잠깐 전기를 쓸 수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석유를 들고 가서 발전기를 돌렸다. 199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온전히 전기를 쓸 수 있게 됐다. 난생 처음 불 때서 밥을 하려니 힘들었다. 석유를 때는 풍로도 없었다. 섬살이가 하도 힘들어서 몇 번인가 도망칠 맘도 있었다.
“근디 배가 없어서 못 도망가.”
여객선밖에는 섬 밖으로 나갈 길이 없는데, 마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거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바다로 나가 김발을 했다. 김이 잘 안 되자 자망배를 타고 꽃게를 잡으러 다녔다. 그렇게 섬살이에 적응해갈 무렵 남편이 덜컥 죽었다. 바다 나갔다가 경운기를 타고 오던 중 경운기가 뒤집어져버렸다.
“운이 나빠서 그랬지.”
큰 아들이 중1 때였으니 벌써 16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여자는 혼자 힘으로 삼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다.
“삼남매 기르느라 죽을 뻔 봤어요.”
섬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떠했을까.
“큰 아들은 학교도 안 댕기고, 고등학교 넣는데 홀랑 도망가고, 그거 붙잡으러 다니느라 울기도 숱하게 울었시유.”
근방 섬 어디나처럼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천에 나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부모가 곁에 없으니 돈은 돈대로 더 들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고생이다.
“대천읍 피시방으로 잡으러 다니고. 엄마 아빠 떨어져 있으니 애들이 탈선하기 쉽죠. 부모 책임도 있죠. 애들만 보내놓고 안 됐어서 돈 달라면 달라는 대로 주고, 모르고도 속고, 알고도 속아주고, 가끔 가면 반간께(반가우니까) 잘해주지. 그런데서 역효과도 나고.”
하지만 아들은 끝내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었다. 지금은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던 그 회사에 취직해서 성실하게 산다. 그렇게 온전하게 제몫을 살아주니 고맙고 또 고맙다.
“도둑질 안하고 경찰서 안간 것만 해도 어딘디. 그것만 해도 감사하지유.”
여자는 아이들이 셋 다 착하게 자라주어서 마음 든든하다. 여자가 커피를 타온다. 잔을 건네는데 손가락이 셋이나 없다.
“시집와서 손가락도 잘렸어요. 그 이쁜 손가락.”
두 개는 꽃게잡이 나갔다가 그물 감던 롤라에 잘리고 또 한 개는 그 전에 김발하다 잘렸다. 그 시절 그 섬에서는 봉합수술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옆집에서 멸치 말리는 일 도와주러 오라는 전화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배도 부리고 어장도 하며 살지만 여자는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파고 고동도 잡고 멸치 말리는 일도 다니며 그렇게 살아간다. 여자는 섬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과 달리 절엘 다닌다. 벌써 몇 십 년째, 고향 부여의 무량사에 다닌다. 그 힘으로 외롭고 고단한 섬에서의 세월을 견뎌왔을 것이다. 잔뜩 주름이 졌으나 여자의 얼굴은 보살님처럼 편안하다.
“이제 자식들도 다 컸는데 쉬어가며 일하고 그러세요.”
“그래도 애들 도와줘야죠. 다 줘도 안 아깝죠.”
그렇게 섬의 한 세월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