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유명한 홍어 집에 가면 고래 고기를 판다. 홍어의 도시에 웬 고래 고기일까 궁금했다. 그 의문을 풀어줄 열쇠가 바로 흑산도에 있었다. 지금은 홍어의 본향이지만 과거 흑산도는 고래의 섬이기도 했다. 흔히 고래는 동해에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포경 근거지라면 동해의 장생포를 떠올린다. 하지만 고래는 동서남해 한국의 바다 모든 곳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과거에는 동해 장생포만이 아니라 서귀포, 대청도, 어청도, 흑산도 등 서남해의 여러 섬들도 고래잡이의 전진 기지였다. 홍어의 섬 흑산도에 홍어공원은 없지만 고래공원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래공원은 흑산도 사람들이 고래판장이라 부르는 예리 마을 고래 해체 작업장 있던 자리에 들어서 있다.
공원에는 고래 모형 조각이 하나 서 있지만 왜 이곳이 고래공원인지 설명은 없다. 면사무소나 여객터미널 앞 자산문화관에도 흑산도에서 잡혔던 고래 사진이 걸려 있지만 이 또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도무지 흑산도 고래 이야기의 실체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흑산도 고래잡이를 연구한 논문을 만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흑산도 출신의 현직 기자인 이주빈이 쓴 <일제 강점기 대흑산도 포경 근거지 연구>(2017.3 목포대학교 대학원). 일제시대 흑산도 고래잡이의 실체를 밝혀주는 아주 귀한 자료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흑산도 고래 이야기는 전적으로 이주빈 기자의 연구에 기반 했다.
예리 선착장에 내려 고래 판장 가는 길. 파시 골목 모퉁이 집, 할머니 한분이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식사 중이다. 나그네가 기웃거리자 대뜸 어서 들어와 밥 한술 뜨고 가라신다. 나그네가 이 집의 손님으로 왔나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초대. 이것이 섬의 인심이다. “나는 아무라도 우리 집에 와서 밥 묵고 가면 좋다니깐.” 할머니는 도초도가 고향이다. 열아홉에 흑산으로 시집 와서 55년을 살았다. 어머니가 도초도에서 흑산도로 재가해 왔다. “학교도 못가고 농사만 농사만 지었어. 나이는 이라고 째깐 묵은 것이 만고풍상을 다 겪었네.” 할머니는 흑산도가 좋다. “여가 살기가 좋아. 보릿고개 숭년(흉년) 때도 춥고 배고픈 사람 없었어.” 복 받은 섬이다. “절대 추접하게 밥 묵고 살면 안돼.” 할머니 말씀이 가슴을 때린다. 추하게 밥 벌어 먹고 살지 말라는 일갈. 영혼이 허기진 나그네는 냉큼 할머니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다. 오래된 토속의 섬 맛이 그득하다. 할머니는 집채만 한 고래가 잡혀와 해체되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한다. 벌써 40년도 전이다. 하지만 고래잡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흑산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이주빈 기자의 논문이 더욱 귀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한반도 바다에서 고래잡이가 본격화 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조선시대에는 포경업이 따로 없었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 직후부터 일본은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잡이 독점권을 장악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바다에서 본격적인 포경업이 시작된 것이다. 일제 포경선들이 한반도 바다에서 포획한 고래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1612마리, 1911년부터 1944년까지 6646마리, 도합 8259마리다. 이중 대형 고래의 남획이 극심했다. 참고래 5166마리, 귀신고래 1313마리, 대왕고래 29마리 향유고래 3마리 등이었다. 기록을 찾지 못한 1907년부터 1911년 사이에도 포경이 성행했을 것이니 적어도 일제가 40여 년 동안 한반도 바다에서 잡아들인 고래는 무려 1만 마리 이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바다의 대형 고래들은 일제에 의해 전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가 1911년 6월3일 어업령을 공포한 뒤 한반도 근해 고래잡이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만들었다. 1939년 기준, 총독부가 허가한 한반도의 포경 근거지는 울산 장생포, 제주 서귀포, 전남 (대)흑산도, 황해도 대청도였다. 울산 장생포를 근거지로 동해의 고래잡이에 집중했던 일제 포경업이 서남해로 근거지를 확장 시킨 것은 동해의 고래가 남획으로 귀해진 탓이었다. 1917년에서 1934년 사이 한반도에서 조업한 포경선은 모두 437척이었는데 서남해에서 조업한 포경선이 297척이나 된다. 서남해가 동해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 기간 경북에서 조업한 포경선 한척이 1.3마리의 고래를 잡을 때 흑산도를 근거지로 한 전라도 근해의 포경선은 11.52마리나 잡았다. 흑산 바다에, 서남해 바다에 그만큼 고래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바다에도 잔챙이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집채만 한 고래, 마당만한 가오리, 영화 죠스에 나오는 대형 백상아리 같은 대물들의 시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1914년부터 서남해로 근거지를 확장한 일제 포경선단은 1916년부터 흑산도에 포경 근거지를 만들고 본격적인 고래잡이에 나섰다. 흑산도 근해는 수온과 수심이 적당하고 조기, 멸치, 새우, 청어 등의 먹이가 풍부해 중국 하이난 바다와 함께 대형 고래들의 산란장이었다. 특히 흑산도는 해마다 산란을 위해 한반도 서해 바다를 회유하는 조기 군단의 통로였다. 조기떼를 따라 고래와 상어 같은 대형 어종들이 무시로 흑산 바다에 출몰했던 것이다. 흑산도 포경 근거지는 조선총독부에서 허가권을 가지고 관리했다. 어업세 징수가 목적이었다. 총독부는 고래뿐만 아니라 흑산도에서 유리의 원료가 되는 규사까지 수탈해 갔다. 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일제가 수탈해 간 흑산도의 규사는 매달 1천 톤에 달했다. 조선 총독부는 직원을 직접 파견해 ’대흑산도 포경 근거지와 규사 장치장‘ 두 곳의 업무를 보게 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과 조선 총독부 탁지부 장관의 공문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가 육지뿐만 아니라 이 나라 섬과 바다의 자원까지 얼마나 극악하게 수탈해 갔는지를 알려주는 증표다.
흑산도를 근거지로 둔 포경선들은 지금 고래 공원이 있는 지역에 고래 해체장을 설치하고 작업을 했다. 흑산도 고래잡이는 11월-5월 사이였다. 이때는 50여명이 상주하던 흑산도의 일본인들이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해체장 위에는 신사도 있었다. 곤삐라 신을 모시는 곤삐라 신사였다. 불교의 수호신장인 금비라(곤삐라, 金毘羅)는 여러 야차들을 거느리고 불법을 지키기로 서원한 야차왕이다. 비를 내리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장이다. 흑산도 사람들은 앞산이라 불렀던 이 산이 신사가 들어선 이후에는 곤삐라 산으로 불렸다.
해체장 일대에는 포경회사 사무실, 창고, 해체 작업장, 직원 목욕탕 같은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해체장에서 일인들은 주로 사무직을 했고, 고래 해체 작업 같은 허드렛일은 조선인들이 도맡았다. 작업장에는 뼈 가공팀, 껍질 가공팀, 고래기름 가공팀, 고래수염 가공팀 등이 있었다. 고래를 삶는 대형 가마솥이 두 개 있었고 고래수염을 튀기는 솥도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임금을 고래고기로 받기도 했다. 고래고기는 주로 목포로 나가 쌀로 바꿔왔다. 목포 홍어집에 고래고기를 파는 풍습이 남아 있는 이유다.
흑산 바다에서 잡아 흑산도에서 해체된 고래 고기는 시모네세키로, 고래 부산물로 만든 비료는 효고현으로 운송됐다. 일제 강점기 내내 한반도 해역의 고래들을 대량 학살한 탓에 일제 말에는 고래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매일 신보(1944.1.26) 기사는 “조선 근해의 최근 일 년 동안의 포경 어황은 조선총독부 수산과 보고에 따르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전한다. 해방 이후에도 흑산도는 고래잡이 근거지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 포경이 금지 되면서 그 역사의 막을 내렸다.
수십 년 지속된 고래의 집단 학살로 흑산도 근해에서 이제는 더 이상 대형 고래를 만나기 어렵다. 흑산 바다는 피로 물든 고래의 기억만을 간직한 체 검푸르다. 흑산도의 고래판장에도 포경시대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흑산도 고래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연구자 이주빈 기자는 “현재 흑산면 예리 1길에 는 집단 학살당한 고래의 살과 피로 전승된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를 현재의 시점에서 승화의 관점으로 교호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흑산도가 고래를 죽이는 섬이 아니라 살리는 섬, 고래 생태의 섬으로 복원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흑산도에 ‘서남해 고래 연구’ 허브를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고래를 죽이던 섬이 고래를 살리는 섬으로 되살아난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