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바다가 가장 잔잔한 때는 10월이다. 늦은 태풍만 오지 않는다면 먼바다의 섬들은 무조건 10월에 가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파도가 가장 잔잔하기 때문이다. 바다가 장판같다는 표현이 닥 어울리는 때가 10월이다. 사람들이 울릉도를 가장 많이 찾는 달은 8월이다. 휴가철이기도 하지만 광복절이 있어서 독도 입도를 위해 많이 찾는다. 그래서 울릉도를 가지만 제1의 목적은 늘 독도이고 울릉도는 뒷전이다. 그런데 독도에 가기 좋은 때도 10월이다. 파도가 잔잔기 때문이다. 10월은 또 울릉도 트레일을 걷기에 딱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단풍이 시작되는 울릉도의 산도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울릉도 여행자들은 대부분 관광버스로 섬을 둘러본다. 하지만 울릉도엔 걷기 좋은 길이 많다. 특히 가을 울릉도는 ‘걷기 천국’이다. 울릉도의 대표적인 길은 ‘해담길’이다. 2017년 울릉군에서 울릉도의 옛사람들이 다니던 옛길을 발굴해 만들었다. 해담길이란 ‘울릉도의 이른 아침 밝은 해가 담긴 길’이란 뜻이다.
해담길은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을 출발해 저동, 천부, 태하, 옥천 등을 거친 뒤 해안 둘레를 따라 다시 도동으로 돌아오는 35㎞ 길이의 트레일이다. 모두 9개 코스로 구성됐다.
울릉도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 내수전~석포 길
저동은 울릉도의 어업 전진 기지다. 울릉도의 어선들은 저동항으로 입항하고 저동항에 정박한다. 그래서 저동은 울릉도에서도 가장 어촌다운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울릉도 어선뿐 아니라 동해안에서 조업하는 모든 선박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저동항은 동해 어업전진기지로 만들어졌다. 저동의 본래 이름은 모시개. 모시 잎이 많아 모시개라 했는데 한자화 과정에서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苧洞)이 됐다. 개는 바닷가를 이르는 한글 말이니 저동은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이란 뜻이다.
저동의 내수전에서 석포에 이르는 길은 울릉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길로 꼽힌다. 내수전은 옛날 울릉도 개척 당시 제주도 대정 출신의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수전 전망대 입구에서 길은 갈림길이다. 내수전 전망대에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오면 석포로 가는 숲길이 이어진다. 또 한동안 길을 가다 보면 느닷없이 쉼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매화골이다. 옛날 개척민 중 정매화란 이가 살던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매화가 살다 간 뒤 이곳은 1962년 9월부터 이효영 씨 부부가 삼남매와 살았다. 이씨 일가는 1981년까지 19년을 이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이씨 부부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폭설, 폭우에 조난당하거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300여 명이나 구조한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길의 끝자락에서 울릉읍 저동을 벗어나면 북면 지역이다. 울릉도의 북단이다.
영원한 울릉도 지킴이 석포~안용복기념관 길
울릉도 해담길 안내 책자에는 석포~추산 구간도 있지만 이 길은 걷기 어렵다. 석포에서 천부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유실되고 없기 때문이다. 대책 없이 산길로 들어섰다가는 조난당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 길은 포기하고 내수전길 끝에서 석포 마을로 들어가 마을을 돌아보는 게 좋다.
석포마을에는 안용복기념관과 의용수비대기념관, 석포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다. 일주도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석포는 울릉도의 오지였다. 정들포, 정들께라고도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워낙 험한 산속이라 처음 찾아왔을 때는 막막하지만 막상 떠나려면 정이 들어서 떠나기 힘들 정도로 정이 많은 산마을이었다. 그래서 정들포다.
석포 일출전망대는 의용수비대기념관과 붙어 있는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망루 역할을 했다. 안용복기념관은 왕조가 버린 섬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안용복(安龍福·1658~?)을 비롯한 백성들의 분투를 기념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안용복은 홀로 일본에 건너가 “죽도(울릉도)와 자산도(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법 월경해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계속했다. 안용복은 조정의 관원으로 위장한 뒤 2차 도일을 감행해 담판을 짓고 돌아오려 했으나 실패하고 송환됐다. 조선 조정은 그런 안용복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사형을 시키려다가 감형해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유배 이후 안용복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슬픈 역사다.
울릉도의 정수를 한눈에, 알봉둘레길~알봉~깃대봉
나리분지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다. 동서길이 약 1.5㎞, 남북길이가 2㎞ 남짓 된다. 나리분지는 1만5000~2만 년 전 일어난 화산 폭발 당시 칼데라 화구가 함몰해 형성된 성인봉(984m) 북쪽의 화구원(火口原)이다. 면적 198만㎡. 알봉마을 분지까지 포함하면 330만㎡다. 나리분지는 그 화구 안에서 다시 분출한 알봉(611m)에서 흘러내린 용암에 의해 형성된 알봉분지, 두 개의 화구원으로 분리돼 있다.
북동쪽의 평지인 나리분지에 나리마을이, 남서쪽의 평지인 알봉분지에 알봉마을이 있다. 지금은 알봉분지에 주민이 살지 않고 나리분지에만 산다. 개척 초기부터 개척민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땅이 척박해 농사가 잘 안되면 근방에 널려 있던 섬말나리를 캐먹으며 굶주림을 면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나리마을이 됐다.
나리분지는 울릉도 여행객의 필수 코스다. 화구안의 산, 이중 화산으로 형성된 까닭에 알봉은 마치 분화구 안에 하늘이 낳아 놓은 알처럼 둥그렇게 놓여 있다. 그래서 이름도 알봉이다. 알봉의 둘레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알봉 둘레길은 5.5㎞.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걷기에 좋다.
나리분지와 알봉분지에서는 개척민이 살았던 너와집과 투막집도 볼 수가 있다. 이 길의 백미는 깃대봉이다. 나리분지에서 깃대봉까지는 4.4㎞. 5분 남짓 가파른 길을 오르면 그다음부터는 평탄한 산 둘레길이다. 정상 부근에서 길은 잠시 다시 가파르다. 정상에 올라서면 갑자기 탄성이 절로 난다.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 나리분지의 전경과 성인봉, 말잔등, 미륵산, 옥녀봉을 비롯한 봉우리들과 대풍감, 송곳봉, 노인봉, 공암 등의 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울릉도의 정수를 온전히 조망할 수 있는 산봉우리. 가장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성인봉도 깃대봉의 풍경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섬사람의 애환이 담겨 있는 현포~태하 수토사 길
현포마을에서 현포령을 넘어 태하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일대는 울릉도의 고대 왕국 우산국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고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현포는 가문작지라고도 한다. 이 마을의 수문장은 노인봉과 촛대바위다. 산 중턱의 촛대바위 그림자가 바다에 비추면 바닷물이 검게 보인다 해서 가문작지라 했다는 지명 유래가 있다. 현포항의 상징은 노인봉이다. 우뚝 솟아오른 200m 암벽의 주름이 노인의 주름 같아서 노인봉이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주름까지는 안 보이고 그래도 언뜻 보면 등 굽은 노인이 서 있는 듯하다.
일주도로와 해안도로 사이 밭 가운데 현포 고분군이 있다. 깜빡 방심하면 놓치기 쉽다. 경상북도 기념물 73호. 울릉도의 고대 무덤인 고분을 이 지역 사람들은 고려장이라 불렀다. 늙으면 부모를 버렸다던 그 고려장이란 이름이 어찌 여기까지 따라온 것일까.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울릉도에서 고려장이란 막연히 옛날 무덤이란 뜻으로 쓰인다. 고분을 둘러보고 나오면 길은 다시 울릉도 독도 해양과학기지 앞으로 이어진다. 동해안 해양 연구의 첨병이다. 기지 앞에는 아담한 몽돌 해변이 있다.
길은 다시 과학기지 건물 뒤편 숙소 동 옆에서 이어진다. 순환도로로 나서면 현포 전망대가 있다. 현포항, 노인봉, 추산, 대풍감까지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한다. 태하로 가는 샛길에 태하리 광서명각석문 안내판이 있다.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각석문은 울릉도 개척기의 기록이다.
태하에는 울릉도의 가장 오래된 신당인 성하 신당이 있다. 오랜 세월 태하마을 주민들은 매년 삼월 삼짇날이면 성하신당에서 당제를 모셨다.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태하마을 해변 끝자락에 수토(搜討)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1893년 이전까지 울릉도는 공도 정책으로 주민 거주가 금지됐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주기적으로 안무사나 수토사를 보내 주민들을 쇄환하는 정책을 폈다. 주민들이 일군 터전이 왜구의 근거지가 되거나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군역과 부역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런 쇄환 정책의 역사를 모아 놓은 곳이 수토역사관이다. 섬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이 아닌 역사관 앞에서 섬의 석양이 애달프게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