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 그래서 그녀는 카멜리아의 여인(동백꽃 여인)으로 불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춘희>에 나오는 이야기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겨울이면 자주 듣게 되는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 또한 동백을 노래한 것이다. 애절한 정조가 울듯 울듯하면서도 끝내 울음을 참아내는 송창식의 음색과 잘 어울리는 절창이다.
동백은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대표적인 겨울 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동백에 대한 사랑은 깊을대로 대로 깊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살다간 사람들처럼 동백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이들이 또 있을까. 고려시대의 이규보, 조선시대의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도 동백을 노래했다. 퇴계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1538년~1593년)도 매화와 함께 동백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꼽으며 지극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두 가지 동백나무 각자 다른 정 있나니/동백 춘백 그 풍도를 누가 능히 평하리오/사람들은 모두 봄철 늦게 핀 꽃 좋아하나/나는 홀로 눈 속에 핀 동백 너를 좋아하네”
꽃에 미쳐 살았던 조선의 선비 유박(1730-1787)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 평하며 동백이 도골선풍을 지녔다고 찬탄했다.
옛날 통영 사람들의 동백 사랑도 유별났다. 충렬사 부근 마을에 살던 처녀들은 충렬사 입구 명정샘으로 물을 길러 다녔다. 충렬사 경내에는 500년이나 된 아름드리 동백나무 네 그루가 서 있는데 겨울 새벽이면 처녀들은 물을 긷기 전에 이 오래된 동백나무에서 동백꽃 한두 송이를 땄다. 샘물을 기른 처녀들은 물동이 위에 동백꽃을 띄웠다. 처녀들이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녀들은 그녀들 속에서 타오르는 붉디붉은 정념을 물동이에 띄워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박경리 선생도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충렬사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고 통영 동백을 기록했다.
동백열매는 실용성도 뛰어났다. 요즘 들어 동백오일을 함유한 화장품이 인기지만 옛날부터 여인들은 동백씨앗을 짜 머릿기름으로 사용했고 식용이나 등잔불 밝히는 데도 썼다. 여수의 거문도에는 섣달그믐 저녁이면 동백꽃 우린 물로 목욕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동백꽃 물로 목욕을 하면 종기도 치료되고 피부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백은 주술적인 힘도 지녔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볼기나 엉덩이를 치면 그 여자는 사내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