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섬 2023년 11월호

주민 20명이 왜구 해적선 9척과 싸워 이긴 전설의 섬, 백섬백길 47코스 신안 암태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작 20명의 섬 주민이 왜구의 해적선 9척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왜구의 해적선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200명, 소선도 40~80명 정도가 승선했다. 물론 더 작은 선박도 9척이면 최소 수백명은 될 터인데 열배가 넘는 잔인한 해적들을 고작 20여명의 섬사람들이 어찌 이길 수 있었단 말인가? 정규군도 아니라 무기도 변변찮은 섬 주민들이. 이 놀라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은 신안의 섬 암태도 사람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전국적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농민운동 발화점 또한 암태도였다. 암태도 소작쟁의.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친일 지주 문재철에 대항하던 암태도 농민대표들이 일제 경찰에 의해 구속되자 암태도 주민들은 아사동맹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 1차로 400명이 또 2차로 600명이 목포로 나가 목포경찰서 앞에서 단식투쟁으로 저항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이 항일 정신의 뿌리가 왜구와 일당백으로 싸워서 승리한 역사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왜구 해적선 9척, 수백명이 암태도를 침략한 것은 조선 태종 8년(1408년)이었다. 왜구들과 맞서 싸운 것은 염간 김나진과 갈금 등이었다. 염간은 소금막에서 자염(煮鹽)을 만들던 염부를 말한다.

“왜선(倭船) 9척이 연일(連日)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니,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賊)이 곧 물러갔다.” 태종실록 8년 1408년 2월 03일 기사

오랫동안 의문을 풀 수 없었다. 도대체 고작 20여명의 섬 주민들이 어찌 수백의 왜구들을 이길 수 있었을까. 그런데 문득 오늘 아침 그 의문이 풀리는 듯하다. 전투의 장소가 섬이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왜구가 침략하면 그저 허망하게 당하거나 도망 갈 틈이 있으면 도망치면 됐다. 군사들이 있으니 주민들이 자강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섬에서는 지켜줄 군사도 없고 도망 갈 곳도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으니 죽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늘 단련했을 것이니 암태도 사람들의 전투력 또한 강력했을 것이다. 강력한 섬사람들 20여명이 죽기로 싸웠으니 왜구들 수백명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 말 압해도 사람들이 몽골군 전함 70여척을 물리쳤던 것처럼. 영화<300>의 스파르타인들 300명이 수십만의 페르시아 군대와 맞섰던 것처럼.

필사즉생을 몸으로 보여준 신안 섬사람들. 국토의 전위, 최전방에서 왜구들을 물리치고 국토를 수호한 이들이 바로 신안 섬사람들이었다. 오랜 세월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에게 빚지고 살았다. 그런데 육지인들은 이런 역사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 또한 다르지 않다. 국경의 끝자락인 영해 기점 23곳 중 20곳이 섬이다. 휴전선뿐일까? 최전방 국경에서 섬사람들이 영토를 지키며 살고 있어 육지는 평화롭다. 육지인들은 섬사람들에게 감사해야 마땅하다.

*이 암태도 전투 이야기를 일전에 한번 포스팅 한적 있는데 이를 눈여겨본 시나리오 작가 후배가 왜구라는 제목으로 시놉시스를 써서 시나리오 공모전에 제출했다가 뽑힌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최동원을 소재로 쓴 시놉도 함께 뽑히자 규정상 한쪽을 포기해야 했고 왜구를 포기 했다고 전해 들었다. 물론 이후에도 계속 왜구로 작업 중이란 소리도 들었다. 반드시 영화화 됐으면 좋겠다.

섬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대부분 근거 없는 두려움으로 섬을 왜곡해 그리는 경우가 많다. 작가도 감독도 게으르고 상상력이 빈곤한 까닭이다. 공부를 좀 하면서 섬 이야기를 영화화 한다면 무궁하고 다양한 소재들이 널려있다. 암태도 왜구 전투, 압해도 몽골군과의 전투 이런 얘기들을 좀 영화화 하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