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섬들을 버렸지만 나라를 지킨 것은 섬이었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한산해전 후 조선의 바다를 지킨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은 한산도를 근거지 삼았다. 목포의 고하도, 완도의 고금도 등이 또한 조선 수군의 근거지였다. 수군들뿐일까. 섬사람들의 희생으로 나라가 지켜졌다. 진도 또한 그런 섬이었다. 12척의 배로 수백척의 왜적을 격파한 명량해전, 역사는 이순신 장군만을 기억하지만 그 또한 진도 섬사람들과 해남 바닷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이룩 된 승리였다.
송가인 때문에 진도에 가는 관광객들이 늘었다고 한다. 고마운 송가인. 부디 진도로 가는 사람들은 송가인 집이나 유명 관광지만 보고 오지 말고 꼭 이곳도 참배하고 오시라.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에 있다. 이 묘역에는 뼈아픈 역사의 진실이 매장되어 있다. 역사는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록한다. 그러나 전투는 진도 섬 주민들과 해남 바닷가 사람들의 희생 하에 이룩된 피어린 승리였다. 명량해전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으로 적의 함대 133척에 맞서 전함 31척을 파손한 대승으로 기억한다. 아군의 전함은 전혀 손실이 없었고 단 2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도 2명뿐 완벽한 승리.
하지만 이것이 진실일까? 전투의 승리가 진정 승리로만 끝난 것일까. 아니다. 명량해전 전후로 수없이 많은 진도 섬과 해남 우수영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는 왜군 함대가 전열을 정비해 공격하기 전에 서둘러 진도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그야말로 승산 없는 전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가 신안 당사도와 부안 위도를 거처 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가 은신한 사이 진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야말로 진도는 인간 도살장이 되었다. 진도 사람들이 명량해전의 뒷감당을 한 것이다. 왜군은 진도에 상륙해 진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며 이순신 함대에 패배한 보복을 자행했다. 이순신의 고향 아산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이순신에 대한 보복을 위해 조직된 왜군 특공대는 아산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고 그 와중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보복의 대상이 되고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진도 섬과 해남바닷가 사람들이었다.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에는 진도 사람 조응량 등 232기의 시신들이 묻혀있다. 양반들 몇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조차 없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진실이 봉분으로 기록된 것이다. 시신이 수습되어 무덤에 묻힌 이들이 232명일뿐, 실제 얼마나 더 많은 진도 사람들이 살육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섬의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진도에 가는 분들은 <정유재란 순절자 묘역>에 꼭 들러서 숨겨진 역사를 기억해 내고 오시라. 이순신 장군, 송가인만 기억하지 말고.
나그네의 섬 연구서 <신안>(21세기북스)에도 신안 섬사람들이 나라를 지킨 이야기들이 발굴되어 있다.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을 수면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 세계 최강 몽골군을 물리친 압해도 사람들 이야기부터 조선 태종8년, 불과 20여명의 암태도 주민들이 노략질을 하러온 왜선 9척과 맞서 싸워 물리친 이야기도 있다. 주인공은 염간 김나진과 갈금 등이다. 염간은 소금막에서 자염(煮鹽)을 만들던 염부 들이었다. 섬에서 소금 구우며 왜구와 싸워 나라를 지킨 진짜 영웅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섬을 너무 몰라서 함부로 대한다. 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