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살던 섬
갯벌의 한쪽에서 첨단의 항공기가 뜰 때 갯벌 또 한쪽에서는 어부들이 시원의 뻘밭을 일군다. 인천공항이 들어선 곳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갯벌이다. 그래서 공항 주변의 섬들은 아직 가지 않은 과거와 미처 도달하지 못한 미래, 그 어느 조간대(潮間帶) 쯤에 위치한다. 첨단과 시원의 바다 사이로 가뭇없는 시간의 물살이 흐른다. 저 물살이 우리를 어디로 실어다 줄 것인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갯벌에서는 주민들이 허리를 굽혀 호미질을 한다. 그때마다 씨알 굵은 바지락들이 알몸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뻘밭의 농사다. 무의도는 2019년 무의대교 개통으로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용유도와 연결되면서 육지로 편입됐다. 무의도가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실미도>와 <천국의 계단>같은 드라마를 통해서다. 영화와 드라마의 흥행 이후 섬에는 개발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제일 먼저 펜션들이 들어섰고 뒤이어 조립식 주택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섬에는 비슷한 형태의 조립식 주택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다. 조악한 형태의 조립식 가옥들은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내부가 텅 비어 있다. 무의도가 관광단지로 개발됐을 때 보상을 노리고 외지의 투기꾼들이 지어놓은 가짜 집들이다.
면적 9.432㎢, 해안선 길이 31.6㎞의 무의도는 대무의도라고도 하는데 섬사람들은 큰무리 섬이라 불러왔다. 무의도란 이름의 유래는 ‘말을 탄 장군이 옷깃을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선녀가 춤추는 것 같기도 해서 무의도(舞衣島)라 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견강부회다. 무의도 주변에는 소무의도, 실미도, 해리도, 상엽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지어 몰려있다. 본디 무리지어 있는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라 해서 큰무리 혹은 무리섬이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여지도> 등에는 모두 무의도(無依島)로 표기되어 있고 『1872년 지방지도』에만 무의도(舞衣島)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무리섬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무의도(無依島)나 무의도(舞衣島)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서남해의 많은 섬들처럼 무의도 또한 여말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내내 군사용 말을 기르는 국영목장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다시 주민들의 입도가 허락됐다.
섬의 북쪽에는 당산이 있고 중앙에는 국사봉이, 남쪽에는 호룡곡산(245m)이 있다. 국사봉에서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가 모셔졌다. 또 정상에서는 절터와 금동불상, 토우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천 지역의 섬들에는 무의도만이 아니라 국사봉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이 많다. 덕적도와, 영흥도, 자월도 등에도 국사봉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섬들이 개경, 한양 등 왕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왕도 방어의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이었지 싶다. 호룡곡산에는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섬에는 하나개 해수욕장, 실미도 해수욕장 두개의 아름다운 모래 해변이 있는데 모두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실미도 해수욕장은 앞바다에 실미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하나개는 큰 갯벌이란 뜻이다.
실제를 허구로 만들어버린 영화
썰물 때면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 됐던 실미도와 무의도는 하나의 섬으로 연결된다. 지금 실미도는 무인도다. 영화 이전에 북파공작원을 훈련 시켰던 비극의 섬, 실미도와 실미도 사건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실미도 사건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한다. 영화를 통해 실미도 사건은 허구가 되고 말았다. 영화 배경이 됐던 장소의 경우 대체로 허구가 실제처럼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미도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실미도 안내판에도 실제가 없다. 실미도는 그저 영화 <실미도>의 촬영지로만 소개되고 있다. 실미도는 허구일까 실제일까? 제작자는 영화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려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영화로 인해 역사의 진실은 허구처럼 돼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고통의 땅은 그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됐다. 연인들은 더 이상 실미도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화는 허구라 믿기 때문이다. 아픔마저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의 힘.
오랜 시간 풍문으로만 떠돌던 실미도 사건. 사건의 실체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와 강우석 감독의 영화<실미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 사건은 그저 하나의 낭설에 불과했다. 1971년 8월 23일, 인천 실미도에 있던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한 뒤 무기를 들고 탈영했다. 북파공작원들은 8월 23일 낮 12시 20분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했다. 인천에서 육군과 첫 교전을 벌인 공작원들은 버스가 고장 나자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격했다. 진압군과 교전을 벌이던 북파공작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20명이 죽고 4명이 잔존했다. 하지만 생존자 4명도 이듬해인 1972년 3월 서둘러 사형 집행됐다. 이런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으나 박정희 정권의 통제로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하고 역사에 묻혀버렸다. 정부는 그저 실미도 난동 사건으로만 규정하고 30년간이나 철저한 비밀에 붙였는데 소설과 영화를 통해 세상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건의 실체는 상당 부분 은폐되어 있다.
북파부대인 684부대가 탄생한 배경은 1968년 벽두에 있었던 이른바 1.21 사태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원 31명이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해 남파됐고 이들은 감시망을 뚫고 청와대 인근인 세검정까지 침투에 성공했다. 하지만 124군 부대원들은 국군에게 제압당해 김신조를 제외한 전원이 총살당했다. 바로 이 1.21 사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 684부대였다. 그래서 부대는 북한의 124군 부대원과 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며 평양에 침투해 주석궁의 김일성을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684부대는 형식적으로는 공군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설되고 유지됐다. 1968년 4월에 창설되었기에 684부대였다. 일반인, 전과자, 죄수 등 다양한 신분에서 착출된 북파공작원들은 실미도에 마련된 훈련장에서 단 3개월 만에 인간 병기로 거듭났다. 기간병이 1대1로 붙여졌고 훈련은 실전처럼 이루어졌으며 훈련 과정에서 7명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북한 침투 훈련을 마치고서도 부대원들은 침투 명령을 받지 못하고 실미도에서 3년 4개월을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동서 냉전의 벽이 허물어지던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소위 핑퐁외교로 불리는 1971년 4월 미국 탁구선수단의 중국 방문과 뒤이은 키신저와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세계는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런 와중에 북파공작원, 특히 김일성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684부대는 박정희 정권에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 전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80년대까지도 북파 부대가 존재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들에 대한 제거 명령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북파 부대에 합류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제거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은 오히려 인간병기가 된 북파부대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소위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기간병 중에서는 단 6명만 생존했다. 이들의 증언이 소설 <실미도>와 영화 <실미도>의 바탕이 됐다.
국가 폭력 범죄는 시효가 없다
1000만 관객이 들었던 영화의 흥행으로 역사 속에 영영 묻힐 뻔했던 실미도 사건은 수면으로 올라왔고 진상규명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했다. 2004년 당시 여당인 열린 우리당에서는 “실미도사건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실미도 사건을 파고들었다. 2005년 11월에는 벽제시립묘지에서 부대원들의 유골 일부를 발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실미도 사건’은 정권의 필요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생명마저도 파리 목숨 취급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체를 보여준 추악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실미도 사건의 북파부대원들 대부분을 사형수들로 기억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억울할 게 무어 있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형수일지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국가가 함부로 그들의 생사를 좌우 할 권리가 없다. 하물며 684부대원들 대부분이 사형수와는 무관한 죄 없는 민간인이라면 어쩔 것인가. 결국 이들 부대원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는 물증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2004년 초, 1968년 3월 충북 옥천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들 모두가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684부대원 제거 명령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국가범죄임이 확인된 것이다. 국가에 의해 자행된 범죄 일지라도 결코 용서 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실미도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국회는 2024년 12월 31일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재석 289명 중 찬성 179명, 반대 105명, 기권 5명으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국가폭력 범죄는 공소시효가 폐지되었고 국가폭력 범죄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도 소멸시효를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과 마찬가지로 국가폭력 범죄인 실미도 사건에 대해서도 조속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