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도 호룡곡산에서 하나개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중에는 무의도 길 중 가장 오밀조밀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이 있어 서해의 알프스라 불리는 곳이 있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환상의 길’은 산림욕 길과 이어져 무의도 해안 데크길과 넓게 뻗어 있는 해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다. 접근하기 쉽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호룡곡산을 가본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더욱 소개하고 싶은 섬길이다.
면적 9.432㎢, 해안선 길이 31.6㎞의 무의도는 대무의도라고도 한다. 무의도 주민들은 큰무리섬이라 부른다. 섬의 북쪽에는 당산이 있고 중앙에는 국사봉이, 남쪽에는 호룡곡산(245m)이 있다. 국사봉에서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가 지내졌다고 전해진다. 또 정상에서는 절터와 금동불상, 토우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천 지역의 섬들에는 무의도만이 아니라 국사봉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이 많다. 덕적도와, 영흥도, 자월도 등에도 국사봉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섬들이 개경, 한양 등 왕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왕도 방어의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이었지 싶다. 호룡곡산에는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섬에는 하나개해수욕장, 실미도해수욕장 두개의 아름다운 모래 해변이 있는데 모두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실미도해수욕장은 앞바다에 실미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하나개는 큰 갯벌이란 뜻이다.
무의도에 대한 지명 유래는 말을 탄 장군이 옷깃을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선녀가 춤추는 것 같기도 해서 무의도(舞衣島)라 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견강부회다. 무의도 주변에는 소무의도, 실미도, 해리도, 상엽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지어 몰려있다. 본디 무리지어 있는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라 해서 큰무리 혹은 무리섬이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는 모두 무의도(無依島)로 표기되어 있고 <1872년 지방지도>에만 무의도(舞衣島)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무리섬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무의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서남해의 많은 섬들처럼 무의도 또한 여말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내내 군사용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다시 주민들의 입도가 허락됐다.
무의도 광명항, 어느 식당 앞에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철망 안에 갇혀 애절하게 울어댄다. 아기는 탈출을 위해 철망을 긁어도 보고 매달리기도 하고, 야옹야옹 울음 울며 바깥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가망없는 일이다. 갇힌 아기에게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밥그릇의 갈치구이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울며 자유만을 애타게 갈구한다. 아직 부질없는 줄 깨닫지 못한 어린 아기는 철망을 오르내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광명항은 다리가 놓여지기 전 소무의도행 나룻배가 오가던 곳이다. 지금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414m 길이의 인도교가 놓여져 더 이상 나룻배는 없다. 예전에 두 섬 사이를 오가는 나룻배 선장을 만났던 적이 있다. 선장은 소무의도 태생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어촌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작은 인천’이라 했다고, 선장은 소무의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었다. 면 소재지 세금의 7할을 소무의도에서 낼 정도였고 수협출장소까지 있었단다. 소무의도 선착장 들머리에는 해태(김) 양식을 준비하는 어민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지금은 소무의도에 들어오려면 무의도를 거처야 하지만 옛날에는 하인천에서 출항한 여객선이 가장 먼저 소무의도로 바로 왔다. 바다 가운데 여객선에서 중간 연락선인 전마선으로 200명이 내리면 그중 150명이 소무의도로 들어왔다. 그만큼 소무의도가 호황이었다. 월미도와 하인천도 지척이다. 당시에는 여객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 모든 섬들을 다 돌아다녔다. 하인천을 출발한 여객선은 영종도-소무의도-자월도-덕적도까지 갔다가 덕적도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작도나 승봉도는 이틀에 한 번씩밖에 안 갔다. 선장은 1950년대 후반 서울의 무학여고와 수도고녀 수영부 선수들과 정구 선수들이 소무의도로 전지훈련을 왔던 일을 기억한다. 여름이면 몇 백 명씩 다녀가곤 했다. 여학생들은 군용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여학생들은 꽁치통조림이랑 양파 등의 부식을 싣고 와서 직접 밥을 해먹으며 훈련을 했다. 선장의 나이 열다섯 살 무렵에는 섬에 휴양 차 온 박정희 대통령과 미 대사관 직원들의 파티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선장은 박정희가 세 번쯤 이 섬을 다녀갔다고 기억했다. 동네 어른들은 섬의 뒤편 해안에 대통령이 온 것을 몰랐다. 아이들이 전마선으로 노를 젓고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요리사들이 파티하고 남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까만 선글라스에 반바지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소식을 알렸지만 어른들은 마을 뒤쪽 해변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권총을 찬 경비원들이 통제했기 때문이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섬에는 조기잡이 중선 배들이 7~8척 가량 있었다. 봄 조기철이면 배를 타는 선원들만 100여 명이 넘었다. 저인망 어선도 한 척 있었다. 이승만 때 북쪽의 어로저지선을 넘어갔던 배를 압수해서 섬에 준 것이다. 지금은 고작 35가구에 노인들만 60여 명 살 뿐이지만 그 무렵에는 90호,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고 초등학생만 80~90명이 될 정도로 섬이 흥청거렸다.
지금 저 산비탈들이 다 대지요. 다 집터였지. 섬사람들은 굴비도 많이 만들었다. 연평도 바다에서 잡아온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굴비로 만들었다. 굴비는 마산, 진해에서 온 배가 사서 실어갔다. 조기를 말릴 때면 하루는 배가 남쪽을 보게 널고 하루는 북쪽을 보고 널었다. 법성포처럼 덕장에 널어 말리는 것이 아니니 매일 뒤집어줘야 잘 말랐기 때문이다. 섬 근해에서는 새우도 많이 났다. 대하, 꽃새우 등은 말려서 미국이나 대만으로 수출했다. 김장에 넣는 새우인 동백하도 많이 났다. 그것이 큰돈이 됐다 생새우 한 광주리 들고 인천에 나가면 돈이 한 광주리였어. 50년대에는 섬에 미군 켈로부대(3840부대) 유격대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섬사람들은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그때 먹어봤다. 선장은 광명항이 있는 무의도 샘꾸미마을을 가르치며 웃었다. 저기는 우리가 다 지배하던 데야. 다들 선원으로 여길 왔었지. 거긴 배가 달랑 두 척밖에 없었거든. 소무의도와 팔미도 사이 바다에는 민어가 많이 잡혔다. 민어를 쫓아 무의도와 소무의도 사이 해협으로 상어떼도 뒤따라 왔다. 민어가 엄청 많았어. 이 골로 상어떼도 엄청 많이 다녔지. 상어들이 민어 머리하고 내장은 안 먹어. 어장마다 잡히는 민어의 크기가 달랐다. 풀치끝 큰골 민어는 사람만큼 컸어. 왕산이 민어는 어른 팔뚝만 했고, 덕적도 뒤 뺄골 것은 빨래 방망이만큼밖에 안 됐어. 민어는 계량 단위가 ‘층’이었다. 한 층은 1백 근. 큰 것은 두 마리면 한 층이었다. 민어 한 마리가 돼지 한 마리만큼 컸다는 이야기다. 민어는 우는 소리가 꼭 개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울대라는 대나무통을 바닷물에 꽂은 뒤, 귀에 대고 민어가 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하지만 민어가 많을 때는 굳이 울대가 필요없었다. 민어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크고 많던 민어들이 어느 때부터 사라져버렸고 섬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선장은 그 이유를 낚시로만 잡다가 그물배가 들어오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삼천포, 통영, 여수에서 온 유자망 배들이 그물로 씨를 말려버렸어. 산란기고 뭐고 없이. 그렇게 몇 년 긁으니까 씨가 마르더라고.
소무의도의 옛 이름은 떼무리다. 떼는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무리란 뜻이니, 떼무리란 그냥 무리 중 하나란 뜻일 게다. 섬의 앞뒤로 마을이 있다. 동쪽은 해변이 넓지만 무의도쪽은 가파르고 옹색하다. 요즈음도 섬에서는 꽃게잡이가 주업이다. 섬은 유난히 폐가가 많다. 제법 규모 있어 보이는 집, 담장도 빨간 벽돌이다. 잠겨진 대문 틈으로 보니 이 집도 폐가다. 그 옆집은 다 허물어져 간다. 해변 갯돌밭에서 할머니 두 분이 타작한 들깨를 바람에 키질 하고 있다.
“어째 이리 버러지가 많어. 나가지도 안 해. 버러지들이 여기서 뺑뺑 돌아.”
“약 안 줘서 그렇지 뭐.”
“바람에 후달려서 키질도 못하겠어.”
할머니들은 들기름을 짜서 자식들에게도 주고 자신들도 먹을 생각이다.
“뭐든지 약 넣는다. 약 넣는다 하잖아. 이런 건 해먹으면 오리지날이자나. 애들 먹는 과자까지 약 넣는다잖아.”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던 소무의도가 요즈음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2011년 무의도 광명항과 소무의도 떼무리항을 잇는 인도교가 놓이고 섬 둘레를 따라 2.5㎞ 코스의 ‘무의바다누리길’이 조성된 까닭이다. 주말이면 트레킹을 위해 찾아드는 여행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 섬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고양이를 개처럼 묶어 키운다. 어떤 밭 한가운데도 고양이 집이 있다. 곡식을 탐하는 쥐를 쫓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리한 쥐들이 묶인 고양이를 언제까지나 무서워할까. 쥐들은 쉽게 눈치채고 말 것이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풀려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광명항의 철망에 갇힌 새끼 고양이도 그렇게 평생을 묶여 살게 될 것이다.
무의도 호룡곡산에서 하나개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중에는 무의도 길 중 가장 오밀조밀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이 있어 서해의 알프스라 불리는 곳이 있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환상의 길’은 산림욕 길과 이어져 무의도 해안 데크길과 넓게 뻗어 있는 해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다. 접근하기 쉽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호룡곡산을 가본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더욱 소개하고 싶은 섬길이다.
면적 9.432㎢, 해안선 길이 31.6㎞의 무의도는 대무의도라고도 한다. 무의도 주민들은 큰무리섬이라 부른다. 섬의 북쪽에는 당산이 있고 중앙에는 국사봉이, 남쪽에는 호룡곡산(245m)이 있다. 국사봉에서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가 지내졌다고 전해진다. 또 정상에서는 절터와 금동불상, 토우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천 지역의 섬들에는 무의도만이 아니라 국사봉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이 많다. 덕적도와, 영흥도, 자월도 등에도 국사봉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섬들이 개경, 한양 등 왕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왕도 방어의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이었지 싶다. 호룡곡산에는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섬에는 하나개해수욕장, 실미도해수욕장 두개의 아름다운 모래 해변이 있는데 모두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실미도해수욕장은 앞바다에 실미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하나개는 큰 갯벌이란 뜻이다.
무의도에 대한 지명 유래는 말을 탄 장군이 옷깃을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선녀가 춤추는 것 같기도 해서 무의도(舞衣島)라 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견강부회다. 무의도 주변에는 소무의도, 실미도, 해리도, 상엽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지어 몰려있다. 본디 무리지어 있는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라 해서 큰무리 혹은 무리섬이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는 모두 무의도(無依島)로 표기되어 있고 <1872년 지방지도>에만 무의도(舞衣島)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무리섬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무의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서남해의 많은 섬들처럼 무의도 또한 여말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내내 군사용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다시 주민들의 입도가 허락됐다.
무의도 광명항, 어느 식당 앞에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철망 안에 갇혀 애절하게 울어댄다. 아기는 탈출을 위해 철망을 긁어도 보고 매달리기도 하고, 야옹야옹 울음 울며 바깥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가망없는 일이다. 갇힌 아기에게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밥그릇의 갈치구이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울며 자유만을 애타게 갈구한다. 아직 부질없는 줄 깨닫지 못한 어린 아기는 철망을 오르내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광명항은 다리가 놓여지기 전 소무의도행 나룻배가 오가던 곳이다. 지금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414m 길이의 인도교가 놓여져 더 이상 나룻배는 없다. 예전에 두 섬 사이를 오가는 나룻배 선장을 만났던 적이 있다. 선장은 소무의도 태생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어촌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작은 인천’이라 했다고, 선장은 소무의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었다. 면 소재지 세금의 7할을 소무의도에서 낼 정도였고 수협출장소까지 있었단다. 소무의도 선착장 들머리에는 해태(김) 양식을 준비하는 어민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지금은 소무의도에 들어오려면 무의도를 거처야 하지만 옛날에는 하인천에서 출항한 여객선이 가장 먼저 소무의도로 바로 왔다. 바다 가운데 여객선에서 중간 연락선인 전마선으로 200명이 내리면 그중 150명이 소무의도로 들어왔다. 그만큼 소무의도가 호황이었다. 월미도와 하인천도 지척이다. 당시에는 여객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 모든 섬들을 다 돌아다녔다. 하인천을 출발한 여객선은 영종도-소무의도-자월도-덕적도까지 갔다가 덕적도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작도나 승봉도는 이틀에 한 번씩밖에 안 갔다. 선장은 1950년대 후반 서울의 무학여고와 수도고녀 수영부 선수들과 정구 선수들이 소무의도로 전지훈련을 왔던 일을 기억한다. 여름이면 몇 백 명씩 다녀가곤 했다. 여학생들은 군용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여학생들은 꽁치통조림이랑 양파 등의 부식을 싣고 와서 직접 밥을 해먹으며 훈련을 했다. 선장의 나이 열다섯 살 무렵에는 섬에 휴양 차 온 박정희 대통령과 미 대사관 직원들의 파티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선장은 박정희가 세 번쯤 이 섬을 다녀갔다고 기억했다. 동네 어른들은 섬의 뒤편 해안에 대통령이 온 것을 몰랐다. 아이들이 전마선으로 노를 젓고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요리사들이 파티하고 남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까만 선글라스에 반바지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소식을 알렸지만 어른들은 마을 뒤쪽 해변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권총을 찬 경비원들이 통제했기 때문이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섬에는 조기잡이 중선 배들이 7~8척 가량 있었다. 봄 조기철이면 배를 타는 선원들만 100여 명이 넘었다. 저인망 어선도 한 척 있었다. 이승만 때 북쪽의 어로저지선을 넘어갔던 배를 압수해서 섬에 준 것이다. 지금은 고작 35가구에 노인들만 60여 명 살 뿐이지만 그 무렵에는 90호,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고 초등학생만 80~90명이 될 정도로 섬이 흥청거렸다.
지금 저 산비탈들이 다 대지요. 다 집터였지. 섬사람들은 굴비도 많이 만들었다. 연평도 바다에서 잡아온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굴비로 만들었다. 굴비는 마산, 진해에서 온 배가 사서 실어갔다. 조기를 말릴 때면 하루는 배가 남쪽을 보게 널고 하루는 북쪽을 보고 널었다. 법성포처럼 덕장에 널어 말리는 것이 아니니 매일 뒤집어줘야 잘 말랐기 때문이다. 섬 근해에서는 새우도 많이 났다. 대하, 꽃새우 등은 말려서 미국이나 대만으로 수출했다. 김장에 넣는 새우인 동백하도 많이 났다. 그것이 큰돈이 됐다 생새우 한 광주리 들고 인천에 나가면 돈이 한 광주리였어. 50년대에는 섬에 미군 켈로부대(3840부대) 유격대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섬사람들은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그때 먹어봤다. 선장은 광명항이 있는 무의도 샘꾸미마을을 가르치며 웃었다. 저기는 우리가 다 지배하던 데야. 다들 선원으로 여길 왔었지. 거긴 배가 달랑 두 척밖에 없었거든. 소무의도와 팔미도 사이 바다에는 민어가 많이 잡혔다. 민어를 쫓아 무의도와 소무의도 사이 해협으로 상어떼도 뒤따라 왔다. 민어가 엄청 많았어. 이 골로 상어떼도 엄청 많이 다녔지. 상어들이 민어 머리하고 내장은 안 먹어. 어장마다 잡히는 민어의 크기가 달랐다. 풀치끝 큰골 민어는 사람만큼 컸어. 왕산이 민어는 어른 팔뚝만 했고, 덕적도 뒤 뺄골 것은 빨래 방망이만큼밖에 안 됐어. 민어는 계량 단위가 ‘층’이었다. 한 층은 1백 근. 큰 것은 두 마리면 한 층이었다. 민어 한 마리가 돼지 한 마리만큼 컸다는 이야기다. 민어는 우는 소리가 꼭 개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울대라는 대나무통을 바닷물에 꽂은 뒤, 귀에 대고 민어가 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하지만 민어가 많을 때는 굳이 울대가 필요없었다. 민어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크고 많던 민어들이 어느 때부터 사라져버렸고 섬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선장은 그 이유를 낚시로만 잡다가 그물배가 들어오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삼천포, 통영, 여수에서 온 유자망 배들이 그물로 씨를 말려버렸어. 산란기고 뭐고 없이. 그렇게 몇 년 긁으니까 씨가 마르더라고.
소무의도의 옛 이름은 떼무리다. 떼는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무리란 뜻이니, 떼무리란 그냥 무리 중 하나란 뜻일 게다. 섬의 앞뒤로 마을이 있다. 동쪽은 해변이 넓지만 무의도쪽은 가파르고 옹색하다. 요즈음도 섬에서는 꽃게잡이가 주업이다. 섬은 유난히 폐가가 많다. 제법 규모 있어 보이는 집, 담장도 빨간 벽돌이다. 잠겨진 대문 틈으로 보니 이 집도 폐가다. 그 옆집은 다 허물어져 간다. 해변 갯돌밭에서 할머니 두 분이 타작한 들깨를 바람에 키질 하고 있다.
“어째 이리 버러지가 많어. 나가지도 안 해. 버러지들이 여기서 뺑뺑 돌아.”
“약 안 줘서 그렇지 뭐.”
“바람에 후달려서 키질도 못하겠어.”
할머니들은 들기름을 짜서 자식들에게도 주고 자신들도 먹을 생각이다.
“뭐든지 약 넣는다. 약 넣는다 하잖아. 이런 건 해먹으면 오리지날이자나. 애들 먹는 과자까지 약 넣는다잖아.”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던 소무의도가 요즈음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2011년 무의도 광명항과 소무의도 떼무리항을 잇는 인도교가 놓이고 섬 둘레를 따라 2.5㎞ 코스의 ‘무의바다누리길’이 조성된 까닭이다. 주말이면 트레킹을 위해 찾아드는 여행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 섬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고양이를 개처럼 묶어 키운다. 어떤 밭 한가운데도 고양이 집이 있다. 곡식을 탐하는 쥐를 쫓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리한 쥐들이 묶인 고양이를 언제까지나 무서워할까. 쥐들은 쉽게 눈치채고 말 것이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풀려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광명항의 철망에 갇힌 새끼 고양이도 그렇게 평생을 묶여 살게 될 것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