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작도 갯티길

백섬백길

92

4.5km

해적들의 은신처가 있던 휘청골을 따라 걷는 해안길

소이작도 갯티길

백섬백길

92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리

코스 소개

소이작도는 대이작도와 함께 조선 시대 해적들의 소굴이 있던 섬이다. 소이작도 갯티길은 숲과 해안을 따라 총 5개의 코스(7.5km)로 구성돼 있는데, 소이작도항에서 손가락바위를 거쳐 동서로 뻗은 해적숲길을 따라 벌안해수욕장 근처 여행자센터까지 가는 코스가 좋다. 이 코스는 내내 바다와 풀등을 보며 한적하게 걷기에 좋은 길이다.

코스세부정보

소이작도항( 0 km) 손가락바위( 0.8 km) 장간여 전망대( 2.2 km) 여행자센터(벌안해수욕장)( 1.5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소이작도 콩돌 해변의 끝에 ‘손가락 바위’가 있다. 주먹을 쥐고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 모습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과도 같다. 거인은 무슨 까닭으로 내내 손가락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일까?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이었다. 선사는 누구든 불법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구지 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구지 선사가 물었다.
“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 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선사는 칼을 꺼내 동자승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 버렸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었다.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아차, 그런데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동자승은 퍼뜩 깨쳤다.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자승은 대체 무엇을 깨쳤던 것일까. ‘무아(無我)’를 깨쳤던 것일까.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섬의 북쪽 휘청골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선착장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휘청골이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하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인다. 해적들의 집터였을까.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았다. 숲에는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이다. 숲 속을 뒤져봐도 해적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았다면 해적들의 무덤은 비바람에 흩어져 다시 숲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이 섬 또한 해적 섬이 되기 이전에는 왜구의 거점이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과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있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다.

소이작도 갯티길

백섬백길

92

4.5km

해적들의 은신처가 있던 휘청골을 따라 걷는 해안길

코스 소개

소이작도는 대이작도와 함께 조선 시대 해적들의 소굴이 있던 섬이다. 소이작도 갯티길은 숲과 해안을 따라 총 5개의 코스(7.5km)로 구성돼 있는데, 소이작도항에서 손가락바위를 거쳐 동서로 뻗은 해적숲길을 따라 벌안해수욕장 근처 여행자센터까지 가는 코스가 좋다. 이 코스는 내내 바다와 풀등을 보며 한적하게 걷기에 좋은 길이다.

코스세부정보

소이작도항( 0 km) 손가락바위( 0.8 km) 장간여 전망대( 2.2 km) 여행자센터(벌안해수욕장)( 1.5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소이작도 콩돌 해변의 끝에 ‘손가락 바위’가 있다. 주먹을 쥐고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 모습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과도 같다. 거인은 무슨 까닭으로 내내 손가락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일까?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이었다. 선사는 누구든 불법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구지 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구지 선사가 물었다.
“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 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선사는 칼을 꺼내 동자승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 버렸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었다.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아차, 그런데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동자승은 퍼뜩 깨쳤다.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자승은 대체 무엇을 깨쳤던 것일까. ‘무아(無我)’를 깨쳤던 것일까.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섬의 북쪽 휘청골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선착장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휘청골이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하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인다. 해적들의 집터였을까.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았다. 숲에는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이다. 숲 속을 뒤져봐도 해적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았다면 해적들의 무덤은 비바람에 흩어져 다시 숲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이 섬 또한 해적 섬이 되기 이전에는 왜구의 거점이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과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있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