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을 담았던 상자가 지금은 둘레길의 계단이 되었다. 연평도는 둘레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늘 평화를 바라는 섬이다. 평화공원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보교육장, 망향전망대, 가래칠기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연평도의 상흔과 아픔, 평화를 바라는 주민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눈물의 연평도’라는 노래가 생겨난 이유는 1959년의 태풍 ‘사라’ 때문이다. 그때 연평도 어장으로 조기잡이를 갔던 많은 어부들은 끝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은 퇴락했지만 연평도는 역사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섬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고, 영광의 칠산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다. 해마다 5월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면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일 정도로 황금어장이었던 곳. 조기 철이면 연평도에는 파시(波市)가 섰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한 배를 타면 천 배를 건너다녔다” 연평도는 주민과 선원, 상인들 수만 명이 북적거리는 하나의 해상도시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연평도는 해주문화권이었다. 연평도에서 해주는 불과 30km.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해주가 북한 땅이 되면서 연평도는 인천 문화권으로 편입됐다. 그때 연평도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등은 이제 북한의 영토다. 연평도에서 1.6km 거리에 북방한계선(NLL)이 지난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인해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깝던 이웃 섬마을이 갈 수 없는 먼 나라가 돼버렸다. 연평도는 옛날부터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왜구와 해적들을 감시했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인천에서 뱃길 122km의 먼 거리지만 연평도는 이제 생활권도 행정구역도 인천이다.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개의 유인도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크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연평면의 본섬인 대연평도 또한 가로 3.7km, 세로 2.7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라 할 수 있다. 섬은 동북쪽의 낭까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세 개의 뿌리를 축으로 삼각형 모양의 해안선을 이룬다.
조기의 섬, 연평도의 조기잡이가 역사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의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토산(土産)은 조기[石首魚]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난다.”(<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의 시장, 파시.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다. 한창 때는 색주가만 100여 곳이 생겼고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파시 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고. 10톤 남짓 되는 중선(안강망 어선) 한 척이 한 번 조업에 참조기를 100동(10만 마리)씩 잡는 것도 예사였다.
1800년대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기잡이 선단이 연평도로 몰려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연평도 조기파시의 역사는 조선 중기부터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1910년에는 황해, 경기, 평안도 등지에서 300여 척 이상의 중선 배들이 몰렸다. 1934년에는 어선이 600~1,000여 척, 1936년에는 조기 안강망 어선 1,000척과 운반선 300척, 봉선 700척 등 2,000여 척의 선박이 몰려들었다. <매일신보>는 파시가 절정에 달한 1943년 4월 말, 연평도에 무려 5,000여 척의 배들이 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4년에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에 달했고,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 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연평도에서는 파시보다 작사(作詐)란 말을 주로 썼다. 연평파시가 아니라 연평작사(作詐)라 했다. 지금도 연평도 노인들은 “작사 때…”로 칭합니다. 작사(作詐)란 ‘거짓을 만든다’는 뜻이니 없던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가 쓰였을 것이 아닐까.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 이전투구, 연평작사에서는 물건을 거래하며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이었느니 오죽했겠을까.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간조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의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를 비롯한 섬과 어촌지역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당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의 연평도 방문 이전부터 있어왔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에도 이미 연평도의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설은 전설 나름의 생명력을 지니는 것일까.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빴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 받았는데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릿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 집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한 집에 작부가 5명씩은 됐으니 줄잡아 보아도 500명이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 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던 것이다. 해변인 ‘갱변’에는 판자로 지은 가건물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다. 색주가는 주인의 고향에 따라 인천옥, 목포옥, 해주옥, 군산옥, 비금옥, 위도집, 흑산집 등의 간판을 달았고, 일제 때는 일본 유곽과 일본 기생들도 많았다.
1930년대 연평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릿집과 음식점이 가장 많았다. 어느 해에는 요릿집에 일본 기생만도 50명이 넘었다 한다. 카페도 있었으며 여관, 대서소를 비롯해 이발관이 9개 목욕탕도 3개나 있었다. 파시 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담가서 내다 팔거나 색주가에 댔다. 쌀밥은 못 먹어도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던 것이다. 바람이 불어서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에게는 큰 대목이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끝나면 미련 없이 섬을 떠났다.
영원할 것 같던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갑자기 종말을 맞이했다. 어느 순간 그 많던 조기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연평도를 찾는 어선도 상인도 더 이상 없어졌다. 파시는 끝이 났다. 연평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 칠산 어장에도 조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 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를 찾아 들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다.
조기가 떠나면서 연평도의 황금기도 끝이 났다. 이제 연평도는 군사적 긴장이 흐르는 작은 섬일뿐이다. 북한의 폭격을 받은 뒤에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섬이 돼버렸다. 폭격을 당한 집들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몇 채는 ‘안보관광’용으로 허물지 않고 ‘전시중’이다. 부서진 집들은 처참하기 그지없다다. 군인과 군부대 공사를 하던 인부 몇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다행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이 허물어졌는데 주민들의 인명사고는 없었다.
마침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동네에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다. 여객선 시간에 맞춰 주민들은 대부분 선창가로 나갔다고 한다. 인천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마중하거나 인천에서 보내오는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 여객선 시간이 아닌 때 폭탄이 떨어졌다면 수십,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허물어진 채 보존된 집을 보는데 한 주민이 말을 건낸다.
“주민들은 해경 배를 타고 밤새 인천으로 피난을 떠났어요. 피난을 나갔을 때는 찜질방에 잠을 자면서도 다시 연평도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들어가기 싫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평도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자 주민들 대부분이 다시 돌아왔다.
“생활 터전이 여기니 해먹고 살게 없는데 어쩌겠어요.”
그는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하지만 포 소리만 나면 여전히 가슴이 철렁한다고 한다. 폭격 전에는 50년 넘게 포 소리를 듣고 살아왔지만 불안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포 소리 들릴 때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아직 악몽에 시달린다.
“다들 똑같은 꿈을 꿔요.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한 번 쐈는데 설마 또 쏘겠는가 하는 생각이지요.”
연평도 주민들은 별로 큰 욕심이 없다.
“큰 욕심 없어요. 옛날처럼 평화롭게 살 수만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다.
“여기가 없는 사람들 살기 좋아요. 자기만 노력하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어요. 남북이 서로 대화도 많이 하고 포 떨어지기 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수류탄을 담았던 상자가 지금은 둘레길의 계단이 되었다. 연평도는 둘레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늘 평화를 바라는 섬이다. 평화공원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보교육장, 망향전망대, 가래칠기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연평도의 상흔과 아픔, 평화를 바라는 주민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눈물의 연평도’라는 노래가 생겨난 이유는 1959년의 태풍 ‘사라’ 때문이다. 그때 연평도 어장으로 조기잡이를 갔던 많은 어부들은 끝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은 퇴락했지만 연평도는 역사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섬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고, 영광의 칠산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다. 해마다 5월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면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일 정도로 황금어장이었던 곳. 조기 철이면 연평도에는 파시(波市)가 섰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한 배를 타면 천 배를 건너다녔다” 연평도는 주민과 선원, 상인들 수만 명이 북적거리는 하나의 해상도시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연평도는 해주문화권이었다. 연평도에서 해주는 불과 30km.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해주가 북한 땅이 되면서 연평도는 인천 문화권으로 편입됐다. 그때 연평도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등은 이제 북한의 영토다. 연평도에서 1.6km 거리에 북방한계선(NLL)이 지난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인해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깝던 이웃 섬마을이 갈 수 없는 먼 나라가 돼버렸다. 연평도는 옛날부터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왜구와 해적들을 감시했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인천에서 뱃길 122km의 먼 거리지만 연평도는 이제 생활권도 행정구역도 인천이다.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개의 유인도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크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연평면의 본섬인 대연평도 또한 가로 3.7km, 세로 2.7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라 할 수 있다. 섬은 동북쪽의 낭까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세 개의 뿌리를 축으로 삼각형 모양의 해안선을 이룬다.
조기의 섬, 연평도의 조기잡이가 역사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의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토산(土産)은 조기[石首魚]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난다.”(<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의 시장, 파시.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다. 한창 때는 색주가만 100여 곳이 생겼고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파시 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고. 10톤 남짓 되는 중선(안강망 어선) 한 척이 한 번 조업에 참조기를 100동(10만 마리)씩 잡는 것도 예사였다.
1800년대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기잡이 선단이 연평도로 몰려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연평도 조기파시의 역사는 조선 중기부터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1910년에는 황해, 경기, 평안도 등지에서 300여 척 이상의 중선 배들이 몰렸다. 1934년에는 어선이 600~1,000여 척, 1936년에는 조기 안강망 어선 1,000척과 운반선 300척, 봉선 700척 등 2,000여 척의 선박이 몰려들었다. <매일신보>는 파시가 절정에 달한 1943년 4월 말, 연평도에 무려 5,000여 척의 배들이 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4년에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에 달했고,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 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연평도에서는 파시보다 작사(作詐)란 말을 주로 썼다. 연평파시가 아니라 연평작사(作詐)라 했다. 지금도 연평도 노인들은 “작사 때…”로 칭합니다. 작사(作詐)란 ‘거짓을 만든다’는 뜻이니 없던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가 쓰였을 것이 아닐까.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 이전투구, 연평작사에서는 물건을 거래하며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이었느니 오죽했겠을까.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간조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의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를 비롯한 섬과 어촌지역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당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의 연평도 방문 이전부터 있어왔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에도 이미 연평도의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설은 전설 나름의 생명력을 지니는 것일까.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빴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 받았는데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릿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 집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한 집에 작부가 5명씩은 됐으니 줄잡아 보아도 500명이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 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던 것이다. 해변인 ‘갱변’에는 판자로 지은 가건물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다. 색주가는 주인의 고향에 따라 인천옥, 목포옥, 해주옥, 군산옥, 비금옥, 위도집, 흑산집 등의 간판을 달았고, 일제 때는 일본 유곽과 일본 기생들도 많았다.
1930년대 연평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릿집과 음식점이 가장 많았다. 어느 해에는 요릿집에 일본 기생만도 50명이 넘었다 한다. 카페도 있었으며 여관, 대서소를 비롯해 이발관이 9개 목욕탕도 3개나 있었다. 파시 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담가서 내다 팔거나 색주가에 댔다. 쌀밥은 못 먹어도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던 것이다. 바람이 불어서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에게는 큰 대목이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끝나면 미련 없이 섬을 떠났다.
영원할 것 같던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갑자기 종말을 맞이했다. 어느 순간 그 많던 조기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연평도를 찾는 어선도 상인도 더 이상 없어졌다. 파시는 끝이 났다. 연평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 칠산 어장에도 조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 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를 찾아 들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다.
조기가 떠나면서 연평도의 황금기도 끝이 났다. 이제 연평도는 군사적 긴장이 흐르는 작은 섬일뿐이다. 북한의 폭격을 받은 뒤에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섬이 돼버렸다. 폭격을 당한 집들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몇 채는 ‘안보관광’용으로 허물지 않고 ‘전시중’이다. 부서진 집들은 처참하기 그지없다다. 군인과 군부대 공사를 하던 인부 몇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다행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집이 허물어졌는데 주민들의 인명사고는 없었다.
마침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동네에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다. 여객선 시간에 맞춰 주민들은 대부분 선창가로 나갔다고 한다. 인천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마중하거나 인천에서 보내오는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 여객선 시간이 아닌 때 폭탄이 떨어졌다면 수십,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허물어진 채 보존된 집을 보는데 한 주민이 말을 건낸다.
“주민들은 해경 배를 타고 밤새 인천으로 피난을 떠났어요. 피난을 나갔을 때는 찜질방에 잠을 자면서도 다시 연평도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들어가기 싫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평도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자 주민들 대부분이 다시 돌아왔다.
“생활 터전이 여기니 해먹고 살게 없는데 어쩌겠어요.”
그는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하지만 포 소리만 나면 여전히 가슴이 철렁한다고 한다. 폭격 전에는 50년 넘게 포 소리를 듣고 살아왔지만 불안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포 소리 들릴 때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아직 악몽에 시달린다.
“다들 똑같은 꿈을 꿔요.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한 번 쐈는데 설마 또 쏘겠는가 하는 생각이지요.”
연평도 주민들은 별로 큰 욕심이 없다.
“큰 욕심 없어요. 옛날처럼 평화롭게 살 수만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다.
“여기가 없는 사람들 살기 좋아요. 자기만 노력하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어요. 남북이 서로 대화도 많이 하고 포 떨어지기 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