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군 대청도는 몽고제국의 황제 순제가 태자 시절 유배를 살았던 섬이자 우리나라에서 홍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섬, 섬 전체가 국가지질공원인 섬이다. 대청도에는 걷는 길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 서풍을 막아주는 서풍받이 절벽을 따라 걷는 서풍받이길이 최고다. 서풍받이, 조각바위, 마당바위를 거치는 대청도 서풍받이길은 대청도 최고의 경관 트레일로, 자연이 만든 걸작품의 연속이다.
오래 전 역사왜곡 논란 속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드라마 <기황후> 속 기승냥(?-?)의 남편이자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재위 1333~1370), 토곤 테무르(타환)의 흔적이 이 땅에도 남아있다. 즉위하기 전 타환은 1년 5개월간 고려로 유배당했는데 그곳이 바로 대청도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서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이다. 대몽 항쟁을 벌이던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뒤 공녀와 환관에 대한 징발이 시작됐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공녀 1000여 명을 시작으로 100여 년 동안 고려 출신의 수많은 공녀와 환관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귀족의 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공녀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왕족이나 고관들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기도 한 고려 말의 유학자 가정 이곡(1298-1351)은 ‘공녀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공녀로 뽑히면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공녀로 끌려가는 여인들의 참혹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일제가 정신대란 이름으로 조선 처녀들을 납치해 간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침략전쟁의 가장 큰 희생양은 여자들이었다. 고려 때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녀 또한 그렇게 공녀로 징발돼 갔다. 공녀인 기씨녀가 원나라 황후가 된 데는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조력이 컸다. 고용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기씨녀를 황제의 다과를 시중드는 궁녀로 만들었다. 고용보와 또 다른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등의 협력으로 기씨녀는 왕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순제의 제2황후가 됐고 나중에는 제1황후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황후는 1353년, 자신의 아들 아유시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 왕실의 재정에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원나라 멸망 때까지 30여 년간 권력을 누렸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징발하는 공녀제도를 폐지시켰다. 원나라가 주원장에게 함락되면서 몽골고원으로 쫓겨 간 이후 기황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아유시다라는 몽골 내륙에 세워진 북원의 초대 황제 소종이 됐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황후의 남편인 원 순제가 대청도에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순제(順帝)를 대청도로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 부처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해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하였는데, 얼마 후 돌아가서 등극하였다…순제가 심었던 뽕나무, 옻나무, 쑥, 꼭두서니 따위가 덤불 속에서 멋대로 자라다가 저절로 말라비틀어지고, 궁실의 섬돌과 주추 자리가 지금도 완연하다.”(이중환 <택리지> 팔도 총론)
1330년 원나라의 권신 엔터무르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순제의 아버지 명종을 암살했다. 그때 명종의 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대청도로 유배 보내졌다. 1년 5개월 간 대청도에서 유배살이를 한 토곤 테무르는 원으로 돌아가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로 등극했다. <택리지>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전설이 대청도에도 전해진다. 대청도의 전설은 태자가 계모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것으로 변용되었다. 전설은 지금의 대청초등학교 자리가 순제가 살던 집터였고 대청도의 주산인 삼각산도 순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궁궐터였다는 곳에서는 기왓장도 발굴되었다. 원나라 침략기의 제주도처럼 대청도나 백령도 또한 원 지배계급의 유배지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 <택리지>의 기록은 믿을만한 전언이다.
대청도는 백령도와 함께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서울보다 평양이 더 가깝다. 대청도는 면적 12.63㎢, 해안선 24.7㎞로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의 먼 거리에 있지만 북의 황해도 장산곶과는 19㎞에 불과하다. 백령도, 연평도 등과 함께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해 분단을 몸으로 안고 살아왔다.
대청도는 국가지질공원이다. 대청도 농여해변의 나이테바위는 지층이 세로로 서 있어서 10억 년에 일어났던 강력한 지각 변화의 힘을 느끼게 한다. 100m 높이의 규암덩어리가 수직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서풍받이는 그 웅장한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옥죽포에는 낙타가 다녀도 될 만큼 드넓은 섬 속의 사막이 있다. 사막처럼 거대한 모래언덕, 옥죽포사구가 있다. 바닷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쌓이고 쌓여 생긴 모래언덕이다. 면적이 가로 1㎞, 세로 0.5㎞에 이른다. “처녀가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탄동 모래울해변의 솔숲은 서해안 최고의 적송 숲이다. 대청도는 어느 한 곳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자연경관이 시원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섬이다. 대청도가 이토록 완벽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다. 인근의 백령도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동안에도 대청도는 무명의 섬으로 남아 있었다. 대청도는 최고의 홍어 어장이었고 그 덕에 홍어, 꽃게, 우럭 등을 잡는 어업이 발달했다. 어업으로 돈을 버니 관광 같은 데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 덕에 대청도의 원시 자연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옹진군 대청도는 몽고제국의 황제 순제가 태자 시절 유배를 살았던 섬이자 우리나라에서 홍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섬, 섬 전체가 국가지질공원인 섬이다. 대청도에는 걷는 길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 서풍을 막아주는 서풍받이 절벽을 따라 걷는 서풍받이길이 최고다. 서풍받이, 조각바위, 마당바위를 거치는 대청도 서풍받이길은 대청도 최고의 경관 트레일로, 자연이 만든 걸작품의 연속이다.
오래 전 역사왜곡 논란 속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드라마 <기황후> 속 기승냥(?-?)의 남편이자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재위 1333~1370), 토곤 테무르(타환)의 흔적이 이 땅에도 남아있다. 즉위하기 전 타환은 1년 5개월간 고려로 유배당했는데 그곳이 바로 대청도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서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이다. 대몽 항쟁을 벌이던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뒤 공녀와 환관에 대한 징발이 시작됐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공녀 1000여 명을 시작으로 100여 년 동안 고려 출신의 수많은 공녀와 환관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귀족의 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공녀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왕족이나 고관들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기도 한 고려 말의 유학자 가정 이곡(1298-1351)은 ‘공녀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공녀로 뽑히면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공녀로 끌려가는 여인들의 참혹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일제가 정신대란 이름으로 조선 처녀들을 납치해 간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침략전쟁의 가장 큰 희생양은 여자들이었다. 고려 때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녀 또한 그렇게 공녀로 징발돼 갔다. 공녀인 기씨녀가 원나라 황후가 된 데는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조력이 컸다. 고용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기씨녀를 황제의 다과를 시중드는 궁녀로 만들었다. 고용보와 또 다른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등의 협력으로 기씨녀는 왕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순제의 제2황후가 됐고 나중에는 제1황후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황후는 1353년, 자신의 아들 아유시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 왕실의 재정에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원나라 멸망 때까지 30여 년간 권력을 누렸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징발하는 공녀제도를 폐지시켰다. 원나라가 주원장에게 함락되면서 몽골고원으로 쫓겨 간 이후 기황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아유시다라는 몽골 내륙에 세워진 북원의 초대 황제 소종이 됐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황후의 남편인 원 순제가 대청도에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순제(順帝)를 대청도로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 부처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해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하였는데, 얼마 후 돌아가서 등극하였다…순제가 심었던 뽕나무, 옻나무, 쑥, 꼭두서니 따위가 덤불 속에서 멋대로 자라다가 저절로 말라비틀어지고, 궁실의 섬돌과 주추 자리가 지금도 완연하다.”(이중환 <택리지> 팔도 총론)
1330년 원나라의 권신 엔터무르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순제의 아버지 명종을 암살했다. 그때 명종의 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대청도로 유배 보내졌다. 1년 5개월 간 대청도에서 유배살이를 한 토곤 테무르는 원으로 돌아가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로 등극했다. <택리지>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전설이 대청도에도 전해진다. 대청도의 전설은 태자가 계모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것으로 변용되었다. 전설은 지금의 대청초등학교 자리가 순제가 살던 집터였고 대청도의 주산인 삼각산도 순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궁궐터였다는 곳에서는 기왓장도 발굴되었다. 원나라 침략기의 제주도처럼 대청도나 백령도 또한 원 지배계급의 유배지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 <택리지>의 기록은 믿을만한 전언이다.
대청도는 백령도와 함께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서울보다 평양이 더 가깝다. 대청도는 면적 12.63㎢, 해안선 24.7㎞로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의 먼 거리에 있지만 북의 황해도 장산곶과는 19㎞에 불과하다. 백령도, 연평도 등과 함께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해 분단을 몸으로 안고 살아왔다.
대청도는 국가지질공원이다. 대청도 농여해변의 나이테바위는 지층이 세로로 서 있어서 10억 년에 일어났던 강력한 지각 변화의 힘을 느끼게 한다. 100m 높이의 규암덩어리가 수직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서풍받이는 그 웅장한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옥죽포에는 낙타가 다녀도 될 만큼 드넓은 섬 속의 사막이 있다. 사막처럼 거대한 모래언덕, 옥죽포사구가 있다. 바닷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쌓이고 쌓여 생긴 모래언덕이다. 면적이 가로 1㎞, 세로 0.5㎞에 이른다. “처녀가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탄동 모래울해변의 솔숲은 서해안 최고의 적송 숲이다. 대청도는 어느 한 곳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자연경관이 시원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섬이다. 대청도가 이토록 완벽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다. 인근의 백령도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동안에도 대청도는 무명의 섬으로 남아 있었다. 대청도는 최고의 홍어 어장이었고 그 덕에 홍어, 꽃게, 우럭 등을 잡는 어업이 발달했다. 어업으로 돈을 버니 관광 같은 데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 덕에 대청도의 원시 자연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