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를 사람들은 야생화의 천국이라 부른다. 해마다 개화시기인 3월이 되면 이 야생화를 찍으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풍도는 야생화들이 모여 있는 군락지가 따로 있지만 후망산을 끼고 도는 둘레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섬의 서북 방향으로 걷다 보면 탁 트인 바다가 시원하게 들어오는 바위 언덕으로 이루어진 붉배가 이 길의 포인트다. 섬이 커 보여도 길이 잘 조성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풍도로 건너왔다. 풍도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안산시지만 섬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인천을 연고로 생활해 왔다. 자녀들도 대부분 인천에서 학교를 나와 인천에 정착해 산다. 작은 섬 풍도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풍도해전이 발발한 곳이다. 구한말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륙 침략의 첫 총성을 울린 곳이 바로 이곳 풍도 앞바다였다. 1894년 7월, 이 바다에서 일본의 포격으로 청나라 함선들이 침몰했고 1100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수장 됐다. 청일 전쟁의 발화지 풍도.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이어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비극적 전쟁의 무대였던 풍도 앞바다가 오늘 비할 데 없이 평화롭다.
풍도의 주택들은 산지를 따라 층층이 앉았다. 삶의 비탈이 그대로 드러난다. 풍도 부두에서 누구보다 먼저 여객선을 맞아주는 것은 방파제에 터 잡고 사는 갈매기들이다. 조선 왕조 실록 <세종실록>에는 풍도(豊島)의 옛 이름이 풍도(楓島)로 기록되어 있다. 섬에 단풍(楓)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섬에는 여전히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 군락이 남아 있다. 현재 섬은 단풍나무 섬이 아니라 풍요의 섬이다. 하지만 풍도는 이름과는 달리 풍요롭지 못하다.
섬은 가파른 비탈과 산지가 대부분이라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고 갯벌이 없어서 바다 것도 풍성하지 않다. 척박한 섬의 환경이 풍요와는 거리가 먼데도 이름이 풍요의 섬으로 바뀐 것은 왜였을까. 풍요를 꿈꾸는 섬사람들의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래전 풍도 사람들은 스스로 풍요를 가꾸기 위해 멀리 떨어진 무인도를 개척해 바다 농장으로 삼았다. 그 섬이 도리도다. 풍도 사람들은 100여 년 동안이나 겨울이면 무인도인 화성군 서신면 도리도로 이주해 바지락을 캐고 굴을 깨며 살다가 이듬해 봄이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섬사람들이 이주할 때는 온갖 살림살이는 물론 가축들까지 따라 갔다. 옮겨가는 학교를 따라 선생님과 아이들, 지서의 경찰들도 따라갔다. 도리도는 한국 최대의 자연산 바지락 밭이었다. 작은 무인도지만 썰물 때가 되면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고 갯벌에는 바지락과 굴 등이 지천으로 널렸다. 풍도 사람들은 그 바지락 밭을 일구며 한 세기를 살아왔다.
부둣가에서 만난 할머니는 8.15 해방 직후에 황해도 옹진 소강이란 곳에서 이 섬으로 시집을 왔다. 할아버지는 6년 전 이승을 뜨셨다. 시집 와서부터 50년 넘게 해마다 음력 9월이면 도리도로 건너가 살았다.
“음력 9월이면 굴 주으러 전체 살림 다 갖고 갔어. 여기는 한 두 사람만 남고, 동네 전체가 다 이사 갔어. 강아지 새끼, 굉이 새끼까지 다 따라다녔지. 배 몇 채에 잘름잘름하게 싣고 물, 나무 다 싣고 가야 하니 힘들었어.”
도리도에는 흙과 돌을 섞어 허술한 죽담집을 지었다. 식구가 많든 적든 방하나 부엌 하나 딸린 비좁은 죽담집에 살았다.
“식구가 열이라도 거기서 다 살았어.”
음력 9월에 도리도로 건너가 굴을 따던 풍도 사람들은 섣달그믐이 되면 다시 풍도로 돌아왔다. 한겨울 두 달 정도 풍도에 살던 사람들은 양력 2월이 되면 다시 도리도로 건너가 굴을 따고 바지락을 캐며 6월까지 살았다. 1년의 반도 넘는 시간을 도리도에서 산 것이다.
“그때 가서 일년 먹을 것을 벌어왔어.”
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정부는 도리도에 집도 지어주고 선착장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풍도 사람들은 도리도에 갈 수 없다. 도리도의 갯벌을 영영 잃고 말았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풍도는 옹진군에 속했다가 안산시로 편입되었지만 도리도는 여전히 화성군에 속한 무인도라는 것이 화근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강화되자 화성군 사람들은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풍도 사람들의 도리도 출입을 막아버렸다. 책상머리에 앉은 행정 관료들은 실정도 모른 채 섬들의 행정구역을 편의대로 나누고 붙였다. 풍도가 화성군이 아니라 안산시에 편입된 것도 풍도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지만 그로인한 피해는 순전히 풍도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100년 동안이나 풍요를 일구던 갯벌을 잃었으니 풍도는 이제 다시 풍요와 먼 섬이 되고 말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꽃게잡이 등으로 살아가지만 100여년 동안 가꾸어온 바지락 밭을 잃은 뒤 풍도 노인들도 삶의 기운을 잃었다.
“그걸 뺏기고 억지로 사는 거예요. 일 년 들어앉았어도 돈 하나 못 보고 살아요. 여기서 안 사먹고 안 쓰고 사니까 살지. 도시라면 못 살지. 쌀 두어 가마니면 일 년을 사니까. 반찬거리는 심어서 먹고.”
부둣가에서 만난 여자 아이 다예는 대남초등학교 풍도 분교 1학년이다. 학교에서는 두 분의 선생님이 세 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3,4학년 언니들은 다예의 좋은 친구들이다. 언니 둘은 2층에서 공부하고 아이는 1층에서 공부 한다. 마을의 여섯 살짜리 꼬마 현민이가 누나들 공부하는 교실에 놀러와 함께 공부하기도 한다. 다예는 언니, 동생들이랑 에버랜드 놀이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 시합도 하고, 갯벌에서 게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조개껍질도 줍고 논다. 또 얼음땡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엄마놀이도 한다. 다예는 안산에서 태어나 경찰공무원인 아빠를 따라 섬으로 온지 3년째다. 처음에는 섬에 오기 싫다고 울고불고 했지만 이제는 안산보다 섬이 더 좋다.
“풍도가 제2번 고향이예요.”
다예는 풍도가 마냥 좋기만 하다.
“맑은 공기도 마실 수 있고, 꽃게 잡을 때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어요. 봄이면 꽃들이 많이 피어요. 가을에는 달래도 많이 따먹어요. 컸을 때도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다예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학생이 한 두 명만 남으면 학교가 없어진대요.”
다예는 고구마 순의 껍질을 벗기는 엄마 곁에 앉아 저도 껍질을 벗긴다.
“애가 풍도를 너무 좋아 해요. 커서도 여기 살겠대요. 그래서 여기 살려면 여기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 했더니 발전소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겠대요. 글쎄.”
섬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에는 젊은 사람들이 근무한다.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런데 다예가 클 때쯤이면 발전소 사람들도 다들 나이가 들어 늙어질 텐데, 걱정이군! 어쩌지!
지금도 다에는 방학 때 친구가 다녀가면 서럽게 운다. 친구가 많은 육지의 학교에 다니면 좋지 않겠느냐 했더니 친구가 한 두 명은 좋은 데 많은 건 싫단다. 이제 언니들이 졸업하거나 전학을 가버리면 학교는 폐교 되고 말 것이다. 한번 사라진 학교가 다시 생기기는 어렵다. 섬의 아이들은 대게 4학년쯤이면 인천으로 나간다. 언니들도 내년이면 육지로 전학을 갈 것이다. 그러면 다예도 사랑하는 섬을 떠나야할 것이다. 한 둘 남은 아이들마저 자꾸 떠나고 섬은 나날이 늙어간다.
해안 길을 따라 섬의 뒤 안으로 간다. 길가에는 고로쇠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섬의 앞쪽에서는 눈치조차 챌 수 없지만 섬의 뒤편으로 오니 산 하나가 절반쯤 잘려나가고 없다. 지금도 여전히 산이 깎여나가는 중이다. 풍도의 토석은 인천 송도 매립지로 실려 간다. 토석을 실은 대형덤프트럭이 바지선에 오른다. 멀쩡한 섬을 반 토막 내고 없애가면서 새 땅을 만드는 심사는 대체 무엇일까. 육지의 개발업자들은 풍도 부근 무인도 중육도를 뭉텅이로 잘라가고, 풀등의 모래를 쓸어 담아 가고, 풍도의 산을 깎아 간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섬들을 다 없애서라도 인천 앞바다를 매워 빌딩을 올리고 아파트를 짓고 싶을 것이다.
풍도는 야생화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봄이면 탐방객과 사진가들로 붐빈다. 산에 약초도 많다. 마을의 한 민박집 마당에 산초와 더덕 씨앗이 말라 간다. 산초는 제피와 비슷하지만 잎이 크고 잎의 배열이 마주보기다. 제피는 잎이 작고 잎의 배열은 어긋나기다. 제피나무에 가시가 더 많지만 향도 제피가 더 진하다. 향이 짙을수록 가시가 많은 것은 사람도 다르지 않다. 산초나 제피 씨앗이 민물고기 요리나 참게장 담그는데 많이 쓰이는 것은 디스토마균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민박집 주인 노인이 알려준다. 노인은 예전에는 약초만 캐다 인천에 내다팔아 생활했었다.
“풍도에는 눈 속에 피는 꽃들도 많고 전호가 젤로 많아. 오가피, 헛개나무, 느릅나무, 다른 데 없는 게 많아요. 전에는 창출, 백출, 시호도 많았는데 나무를 하지 않으면서 다 죽었어.”
노인은 원주에서 한약방을 하던 큰 고무부의 일을 도우며 약재에 대한 지식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노인은 당귀, 천궁 등의 씨앗도 사다 심어 키운다. 이제는 중국산에 밀려 약재 수입이 예전만 못하다. 그저 소일거리로 약재를 말린다.
산길을 오른다. 마을은 산자락을 따라 동향하여 앉아 있다. 산자락의 중간까지 집들이 들어섰고 산의 윗부분은 밭들이다. 밭은 요즘 고구마 수확철이다. 밭에는 고추와 콩과 녹두, 호박과 쪽파와 김장 배추와 무를 빼곡하게 심었다. 어느 한자락 놀리는 땅이 없다. 고구마 밭을 기웃거리자 할머니들이 드시던 으름을 나눠 주신다. 바나나처럼 길죽한 으름. 과즙은 달지만 씨앗은 쓰고 떫다. 할머니 한분은 걷는 것도 힘겨워 보이지만 밭일을 그만둘 수 없다.
“소처럼 일 하던 사람인데 신경통이 생겨 수술하고는 잘 걷지를 못해. 여그는 암 것도 없고 늙은네만 살아요. 도리도 댕겨서 병신 되고. 여그는 아주 막막하고 죽을 일만 있어요.”
섬에는 보건진료소도 없다. 큰 병이면 육지로 가겠지만 고질병은 아파도 기댈 곳이 없다. 병원선이 한 달에 한 번씩 들어오면 그때 배에 가서 약을 타오는 것이 전부다. 산자락의 끝 즈음에 은행나무 고목 한분이 서 계시다. 당산나무는 아니지만 물경 500년 동안 마을을 굽어보고 살아왔다. 섬의 흥망성쇠를 은행나무는 놓치지 않고 나이테에 새겼을 것이다. 나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더 먼 세월의 저편에서 온 시간의 전령이자 섬의 장로다. 나무는 타임머신의 유일한 증거다.
시간의 결을 타고 500년 전의 과거로부터 날아온 나무. 하지만 나무는 과거의 나무인 동시에 현재의 나무이며 미래의 나무이기도 하다. 삼세를 아우르는 우주목. 은행나무는 삼세의 법음을 전하는 삼세불. 하지만 저 삼세불 부처님도 생사의 문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에 오르던 길에 묶여 있는 염소를 봤다. 육지로 보내려나 했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염소가 없다. 대신 담벼락에는 배를 갈라 내장이 텅 빈 된 염소의 시체가 걸려있다. 인천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염소를 기르는 주민들이 잡아서 여객선에 실어 보낸다. 저 염소는 내일이면 인천의 어느 집 식탁에 오를 것이다.
“뼈는 푹 고아먹고, 살은 삶아먹고, 산에 약초가 많아 여기 염소가 약이 되요.”
동네 노인이 주석을 달아 주신다. 30분 전에는 산목숨이더니 지금은 고깃덩어리로 남은 염소. 허망하구나. 목숨이여!
풍도를 사람들은 야생화의 천국이라 부른다. 해마다 개화시기인 3월이 되면 이 야생화를 찍으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풍도는 야생화들이 모여 있는 군락지가 따로 있지만 후망산을 끼고 도는 둘레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섬의 서북 방향으로 걷다 보면 탁 트인 바다가 시원하게 들어오는 바위 언덕으로 이루어진 붉배가 이 길의 포인트다. 섬이 커 보여도 길이 잘 조성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풍도로 건너왔다. 풍도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안산시지만 섬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인천을 연고로 생활해 왔다. 자녀들도 대부분 인천에서 학교를 나와 인천에 정착해 산다. 작은 섬 풍도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풍도해전이 발발한 곳이다. 구한말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륙 침략의 첫 총성을 울린 곳이 바로 이곳 풍도 앞바다였다. 1894년 7월, 이 바다에서 일본의 포격으로 청나라 함선들이 침몰했고 1100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수장 됐다. 청일 전쟁의 발화지 풍도.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이어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비극적 전쟁의 무대였던 풍도 앞바다가 오늘 비할 데 없이 평화롭다.
풍도의 주택들은 산지를 따라 층층이 앉았다. 삶의 비탈이 그대로 드러난다. 풍도 부두에서 누구보다 먼저 여객선을 맞아주는 것은 방파제에 터 잡고 사는 갈매기들이다. 조선 왕조 실록 <세종실록>에는 풍도(豊島)의 옛 이름이 풍도(楓島)로 기록되어 있다. 섬에 단풍(楓)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섬에는 여전히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 군락이 남아 있다. 현재 섬은 단풍나무 섬이 아니라 풍요의 섬이다. 하지만 풍도는 이름과는 달리 풍요롭지 못하다.
섬은 가파른 비탈과 산지가 대부분이라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고 갯벌이 없어서 바다 것도 풍성하지 않다. 척박한 섬의 환경이 풍요와는 거리가 먼데도 이름이 풍요의 섬으로 바뀐 것은 왜였을까. 풍요를 꿈꾸는 섬사람들의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래전 풍도 사람들은 스스로 풍요를 가꾸기 위해 멀리 떨어진 무인도를 개척해 바다 농장으로 삼았다. 그 섬이 도리도다. 풍도 사람들은 100여 년 동안이나 겨울이면 무인도인 화성군 서신면 도리도로 이주해 바지락을 캐고 굴을 깨며 살다가 이듬해 봄이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섬사람들이 이주할 때는 온갖 살림살이는 물론 가축들까지 따라 갔다. 옮겨가는 학교를 따라 선생님과 아이들, 지서의 경찰들도 따라갔다. 도리도는 한국 최대의 자연산 바지락 밭이었다. 작은 무인도지만 썰물 때가 되면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고 갯벌에는 바지락과 굴 등이 지천으로 널렸다. 풍도 사람들은 그 바지락 밭을 일구며 한 세기를 살아왔다.
부둣가에서 만난 할머니는 8.15 해방 직후에 황해도 옹진 소강이란 곳에서 이 섬으로 시집을 왔다. 할아버지는 6년 전 이승을 뜨셨다. 시집 와서부터 50년 넘게 해마다 음력 9월이면 도리도로 건너가 살았다.
“음력 9월이면 굴 주으러 전체 살림 다 갖고 갔어. 여기는 한 두 사람만 남고, 동네 전체가 다 이사 갔어. 강아지 새끼, 굉이 새끼까지 다 따라다녔지. 배 몇 채에 잘름잘름하게 싣고 물, 나무 다 싣고 가야 하니 힘들었어.”
도리도에는 흙과 돌을 섞어 허술한 죽담집을 지었다. 식구가 많든 적든 방하나 부엌 하나 딸린 비좁은 죽담집에 살았다.
“식구가 열이라도 거기서 다 살았어.”
음력 9월에 도리도로 건너가 굴을 따던 풍도 사람들은 섣달그믐이 되면 다시 풍도로 돌아왔다. 한겨울 두 달 정도 풍도에 살던 사람들은 양력 2월이 되면 다시 도리도로 건너가 굴을 따고 바지락을 캐며 6월까지 살았다. 1년의 반도 넘는 시간을 도리도에서 산 것이다.
“그때 가서 일년 먹을 것을 벌어왔어.”
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정부는 도리도에 집도 지어주고 선착장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풍도 사람들은 도리도에 갈 수 없다. 도리도의 갯벌을 영영 잃고 말았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풍도는 옹진군에 속했다가 안산시로 편입되었지만 도리도는 여전히 화성군에 속한 무인도라는 것이 화근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강화되자 화성군 사람들은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풍도 사람들의 도리도 출입을 막아버렸다. 책상머리에 앉은 행정 관료들은 실정도 모른 채 섬들의 행정구역을 편의대로 나누고 붙였다. 풍도가 화성군이 아니라 안산시에 편입된 것도 풍도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지만 그로인한 피해는 순전히 풍도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100년 동안이나 풍요를 일구던 갯벌을 잃었으니 풍도는 이제 다시 풍요와 먼 섬이 되고 말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꽃게잡이 등으로 살아가지만 100여년 동안 가꾸어온 바지락 밭을 잃은 뒤 풍도 노인들도 삶의 기운을 잃었다.
“그걸 뺏기고 억지로 사는 거예요. 일 년 들어앉았어도 돈 하나 못 보고 살아요. 여기서 안 사먹고 안 쓰고 사니까 살지. 도시라면 못 살지. 쌀 두어 가마니면 일 년을 사니까. 반찬거리는 심어서 먹고.”
부둣가에서 만난 여자 아이 다예는 대남초등학교 풍도 분교 1학년이다. 학교에서는 두 분의 선생님이 세 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3,4학년 언니들은 다예의 좋은 친구들이다. 언니 둘은 2층에서 공부하고 아이는 1층에서 공부 한다. 마을의 여섯 살짜리 꼬마 현민이가 누나들 공부하는 교실에 놀러와 함께 공부하기도 한다. 다예는 언니, 동생들이랑 에버랜드 놀이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 시합도 하고, 갯벌에서 게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조개껍질도 줍고 논다. 또 얼음땡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엄마놀이도 한다. 다예는 안산에서 태어나 경찰공무원인 아빠를 따라 섬으로 온지 3년째다. 처음에는 섬에 오기 싫다고 울고불고 했지만 이제는 안산보다 섬이 더 좋다.
“풍도가 제2번 고향이예요.”
다예는 풍도가 마냥 좋기만 하다.
“맑은 공기도 마실 수 있고, 꽃게 잡을 때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어요. 봄이면 꽃들이 많이 피어요. 가을에는 달래도 많이 따먹어요. 컸을 때도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다예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학생이 한 두 명만 남으면 학교가 없어진대요.”
다예는 고구마 순의 껍질을 벗기는 엄마 곁에 앉아 저도 껍질을 벗긴다.
“애가 풍도를 너무 좋아 해요. 커서도 여기 살겠대요. 그래서 여기 살려면 여기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 했더니 발전소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겠대요. 글쎄.”
섬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에는 젊은 사람들이 근무한다.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런데 다예가 클 때쯤이면 발전소 사람들도 다들 나이가 들어 늙어질 텐데, 걱정이군! 어쩌지!
지금도 다에는 방학 때 친구가 다녀가면 서럽게 운다. 친구가 많은 육지의 학교에 다니면 좋지 않겠느냐 했더니 친구가 한 두 명은 좋은 데 많은 건 싫단다. 이제 언니들이 졸업하거나 전학을 가버리면 학교는 폐교 되고 말 것이다. 한번 사라진 학교가 다시 생기기는 어렵다. 섬의 아이들은 대게 4학년쯤이면 인천으로 나간다. 언니들도 내년이면 육지로 전학을 갈 것이다. 그러면 다예도 사랑하는 섬을 떠나야할 것이다. 한 둘 남은 아이들마저 자꾸 떠나고 섬은 나날이 늙어간다.
해안 길을 따라 섬의 뒤 안으로 간다. 길가에는 고로쇠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섬의 앞쪽에서는 눈치조차 챌 수 없지만 섬의 뒤편으로 오니 산 하나가 절반쯤 잘려나가고 없다. 지금도 여전히 산이 깎여나가는 중이다. 풍도의 토석은 인천 송도 매립지로 실려 간다. 토석을 실은 대형덤프트럭이 바지선에 오른다. 멀쩡한 섬을 반 토막 내고 없애가면서 새 땅을 만드는 심사는 대체 무엇일까. 육지의 개발업자들은 풍도 부근 무인도 중육도를 뭉텅이로 잘라가고, 풀등의 모래를 쓸어 담아 가고, 풍도의 산을 깎아 간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섬들을 다 없애서라도 인천 앞바다를 매워 빌딩을 올리고 아파트를 짓고 싶을 것이다.
풍도는 야생화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봄이면 탐방객과 사진가들로 붐빈다. 산에 약초도 많다. 마을의 한 민박집 마당에 산초와 더덕 씨앗이 말라 간다. 산초는 제피와 비슷하지만 잎이 크고 잎의 배열이 마주보기다. 제피는 잎이 작고 잎의 배열은 어긋나기다. 제피나무에 가시가 더 많지만 향도 제피가 더 진하다. 향이 짙을수록 가시가 많은 것은 사람도 다르지 않다. 산초나 제피 씨앗이 민물고기 요리나 참게장 담그는데 많이 쓰이는 것은 디스토마균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민박집 주인 노인이 알려준다. 노인은 예전에는 약초만 캐다 인천에 내다팔아 생활했었다.
“풍도에는 눈 속에 피는 꽃들도 많고 전호가 젤로 많아. 오가피, 헛개나무, 느릅나무, 다른 데 없는 게 많아요. 전에는 창출, 백출, 시호도 많았는데 나무를 하지 않으면서 다 죽었어.”
노인은 원주에서 한약방을 하던 큰 고무부의 일을 도우며 약재에 대한 지식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노인은 당귀, 천궁 등의 씨앗도 사다 심어 키운다. 이제는 중국산에 밀려 약재 수입이 예전만 못하다. 그저 소일거리로 약재를 말린다.
산길을 오른다. 마을은 산자락을 따라 동향하여 앉아 있다. 산자락의 중간까지 집들이 들어섰고 산의 윗부분은 밭들이다. 밭은 요즘 고구마 수확철이다. 밭에는 고추와 콩과 녹두, 호박과 쪽파와 김장 배추와 무를 빼곡하게 심었다. 어느 한자락 놀리는 땅이 없다. 고구마 밭을 기웃거리자 할머니들이 드시던 으름을 나눠 주신다. 바나나처럼 길죽한 으름. 과즙은 달지만 씨앗은 쓰고 떫다. 할머니 한분은 걷는 것도 힘겨워 보이지만 밭일을 그만둘 수 없다.
“소처럼 일 하던 사람인데 신경통이 생겨 수술하고는 잘 걷지를 못해. 여그는 암 것도 없고 늙은네만 살아요. 도리도 댕겨서 병신 되고. 여그는 아주 막막하고 죽을 일만 있어요.”
섬에는 보건진료소도 없다. 큰 병이면 육지로 가겠지만 고질병은 아파도 기댈 곳이 없다. 병원선이 한 달에 한 번씩 들어오면 그때 배에 가서 약을 타오는 것이 전부다. 산자락의 끝 즈음에 은행나무 고목 한분이 서 계시다. 당산나무는 아니지만 물경 500년 동안 마을을 굽어보고 살아왔다. 섬의 흥망성쇠를 은행나무는 놓치지 않고 나이테에 새겼을 것이다. 나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더 먼 세월의 저편에서 온 시간의 전령이자 섬의 장로다. 나무는 타임머신의 유일한 증거다.
시간의 결을 타고 500년 전의 과거로부터 날아온 나무. 하지만 나무는 과거의 나무인 동시에 현재의 나무이며 미래의 나무이기도 하다. 삼세를 아우르는 우주목. 은행나무는 삼세의 법음을 전하는 삼세불. 하지만 저 삼세불 부처님도 생사의 문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에 오르던 길에 묶여 있는 염소를 봤다. 육지로 보내려나 했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염소가 없다. 대신 담벼락에는 배를 갈라 내장이 텅 빈 된 염소의 시체가 걸려있다. 인천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염소를 기르는 주민들이 잡아서 여객선에 실어 보낸다. 저 염소는 내일이면 인천의 어느 집 식탁에 오를 것이다.
“뼈는 푹 고아먹고, 살은 삶아먹고, 산에 약초가 많아 여기 염소가 약이 되요.”
동네 노인이 주석을 달아 주신다. 30분 전에는 산목숨이더니 지금은 고깃덩어리로 남은 염소. 허망하구나. 목숨이여!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