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는 남섬과 북섬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사이 긴 사주가 연결되어 하나의 섬을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선유도를 필두로 양쪽으로 신시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가 이어져 있어 여러 섬을 한 번에 걸어볼 수 있다. 선유도 주변 바다들은 파도가 거의 없어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 특히 길을 걷다 해질녘 섬과 바다가 모두 붉게 변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게 된다. 섬의 경치와 석양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신선이 놀았던 곳’이라니 이 순간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면적 2.13㎢의 크지 않은 섬 선유도는 오랜 세월 신선이 노닐다 갈 만큼 선경이었다. 무분별한 개발로 지금은 그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선유도는 여전히 서해의 보석이다.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이다.
선유도는 고려시대, 고려와 송나라 간 항로의 중간 기항지였으며 최무선 장군이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진포해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 때는 명량해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들었던 곳이다. 송나라 때 사신 서긍이 쓴 고려방문기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선유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1123년 송나라 사신단 200여 명이 몇 척의 배에 나눠 타고 가거도, 홍도, 비금도 등을 거처 고려를 방문하는데 고려왕조의 환영단이 마중 나온 곳이 바로 선유도다. 그때 환영단의 대표로 선유도까지 왔던 사람은 놀랍게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다. 선유도가 역사의 무대였던 셈이다.
“6일 정해일 아침 밀물을 타고 항해하여 오전 8시쯤에 군산도에 정박하였다. 그 산은 12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성처럼 원형으로 둘러쳐 있다. 6척의 배가 와서 맞이했는데, 무장한 병사를 싣고 징을 울리고 고동 나팔을 불며 호위하였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연안에는 군기를 잡고 늘어선 자가 1백여 인이나 되었다.”
해상왕국답게 고려는 외국 사신단의 환영행사를 섬에서 치를 만큼 섬을 중요시 했었다.
“사신단이 동접반 김부식 등과 군산정에서 만났다. 그 정자는 바닷가에 있고 뒤로 두 봉우리에 의지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관문 밖에는 관아 십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와 지복사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崇山行宮)이 있고, 전후좌우에는 주민 십여 가구가 있다.”
선유도에는 왕의 임시 거주지인 행궁까지 있었다. 고려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예성강 입구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가 그렇듯이 해상왕국 고려가 섬들을 얼마나 가치 있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증표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오룡묘(五龍墓)라는 선유도의 신전은 그때도 있었다. 오룡묘는 1천 년 이상을 이어온 대단한 신전이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토속 신전에 대한 대우는 참으로 야박하기 그지없다. 선유 3구 밭 너머 마을에서 망주봉을 돌아가면 새터마을이다. 새터마을에서 올라가는 망주봉 길 중턱에 오룡묘가 있다. 예전에는 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숲이 울창해져 길마저 사라지고 없다. 바위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암벽등반을 한 뒤에야 간신히 오룡묘에 이를 수 있다. 오룡묘는 1990년, 마지막 무당이 죽은 뒤부터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오룡묘에는 아직도 윗당, 아랫당 두 개의 당집 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랫당에 봉안 되었던 명두 아가씨, 최씨 부인, 성주 등 다섯 토착신의 화상은 도난당해 그 자리가 비어 있다. 기울어 가는 당집은 노거수 그늘에 파묻혀 소멸의 시간을 기다린다. 가여운 신들. 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섬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살아온 토착 신들. 당집은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풍어를 이루도록 도와준 신들을 모시던 신전이다. 지금 당집에 살던 신들은 어디론가 쫓겨 사라지고 말았다.
선유도는 본래 3개의 다른 섬이었으나 중앙에 긴 모래톱이 쌓이면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선유도에는 여러 산이 있지만 다들 200m가 넘지 않는 낮은 산들이다. 방파제 공사로 많은 모래가 유실되었으나 선유팔경의 하나인 명사십리 해변에서 보는 일몰도 여전히 장관이다. 선유 2구와 3구 사이, 기러기가 내려앉은 모양의 모래톱 평사낙안의 풍경 또한 비경이다. 선유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 망주봉(望主峰 152m)이다. 단단한 바위산의 에너지가 강렬하게 전달된다. 주인을 기다리는 봉우리, 선유도의 주산 망주봉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내려온다.
하나는 충신 버전이다. 선유도에 유배된 관리가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북쪽의 한양에 있는 왕을 사모하였다 해서 망주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하나는 번외 버전이다. 이 버전은 <정감록>에 젖줄을 대고 있다. <정감록>은 이씨 조선이 멸망한 뒤 정도령이 계룡산에 도읍하여 몇 백 년을 다스리고 그 후 조씨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이 계속된 뒤 범씨의 완산 도읍이 시작된다고 예언한다. 선유도 망주봉은 범씨 완산 도읍 천년왕국의 섬나라 버전이다. 그 천년왕국의 주인 범씨 왕을 기다리는 산이 망주봉이다.
선유도에도 선유팔경(仙遊八景)이 있다. 옛날부터 각 지방의 빼어난 경관들은 팔경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즈음은 부쩍 그 숫자가 더 늘었다. 어느 지역엘 가나 팔경이 있다. 더러 십경이나 십이경도 있지만 대다수는 팔경이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일 것이다. 선유팔경의 역사는 생각 없이 급조된 팔경들보다 역사가 깊다. 그런데 어째서 팔경일까. 선유팔경이나 대한팔경, 관동팔경, 단양팔경 같은 팔경의 원조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하필 팔경인 것은 주역의 8괘와 연관이 있다. 춘하추동 4계절에 명승지를 음양으로 두 개씩 배정해서 팔경으로 정한 것이다. 소상(瀟湘)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양자강의 두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말한다. 소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많은 시인들이 노래해 왔다. 팔경의 전통이 하나의 미학으로 확립된 것은 북송 때 화가들이 <소상팔경도>를 그리면서부터다. 이후 동북아에서 소상팔경은 관념 산수시대 최고의 미학이 됐다.
선유팔경의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은 망주봉 아래 바다에 형성된 모래톱이 망주봉에서 바라보면 모래사장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 기러기 형상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선유팔경인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 또한 중국 사천성의 무산십이봉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선유도 안내 팜플렛은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을 방축도, 명도, 말도 등 고군산 섬들의 산봉우리 12개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병사 혹은 무사 모양 같아서 무산이라고 했다면서 무(武)가 아니라 춤출 무(舞)를 쓰는 것은 모순이다. 설명은 견강부회 같다. 실상 무산십이봉은 신선 사상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니 무(武)도 무(舞) 아닌 무(巫)를 쓰는 것이 옳다.
동양에서 신선정원(神仙庭園)을 만들 때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은 그 골격이 되는 산이다. 본래 무산(巫山)은 중국 사천성(四川省) 우산현(巫山縣)의 남동쪽 바산산맥(巴山山脈) 속의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이다. 그런데 그 형세(形勢)가 무자(巫字)와 같다 해서 무산이라 일컫는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첩첩으로 하늘을 가리고 큰 강이 그 사이를 흘러 무협(巫峽)을 이루며, 12개의 봉우리 밑에 신녀묘(神女廟)가 있다고 믿어진다. 동양의 정원에서 산이나 연못의 섬 등으로 사용하는 석가산(石假山)도 이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선유도는 바로 곁의 섬, 장자도, 무녀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장자도는 또 대장도와 연결되어 있다. 4개의 섬은 이미 하나다. 4개의 섬 모두를 걸어볼 수 있다. 작은 섬들이니 네 섬 모두를 걷는데도 하루면 족하다. 길이 평탄하여 자전거를 타기도 좋다. 자전거로 돌면 몇 시간 걸리지 않는다. 선유도는 이제 육지와 다리로 연결됐다. 더 이상 배를 타고 가는 섬이 아니다. 다리가 놓이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하지만 선유도는 여전히 서해 최고의 비경 중 하나다.
선유도는 남섬과 북섬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사이 긴 사주가 연결되어 하나의 섬을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선유도를 필두로 양쪽으로 신시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가 이어져 있어 여러 섬을 한 번에 걸어볼 수 있다. 선유도 주변 바다들은 파도가 거의 없어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 특히 길을 걷다 해질녘 섬과 바다가 모두 붉게 변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게 된다. 섬의 경치와 석양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신선이 놀았던 곳’이라니 이 순간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면적 2.13㎢의 크지 않은 섬 선유도는 오랜 세월 신선이 노닐다 갈 만큼 선경이었다. 무분별한 개발로 지금은 그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선유도는 여전히 서해의 보석이다.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이다.
선유도는 고려시대, 고려와 송나라 간 항로의 중간 기항지였으며 최무선 장군이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진포해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 때는 명량해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들었던 곳이다. 송나라 때 사신 서긍이 쓴 고려방문기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선유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1123년 송나라 사신단 200여 명이 몇 척의 배에 나눠 타고 가거도, 홍도, 비금도 등을 거처 고려를 방문하는데 고려왕조의 환영단이 마중 나온 곳이 바로 선유도다. 그때 환영단의 대표로 선유도까지 왔던 사람은 놀랍게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다. 선유도가 역사의 무대였던 셈이다.
“6일 정해일 아침 밀물을 타고 항해하여 오전 8시쯤에 군산도에 정박하였다. 그 산은 12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성처럼 원형으로 둘러쳐 있다. 6척의 배가 와서 맞이했는데, 무장한 병사를 싣고 징을 울리고 고동 나팔을 불며 호위하였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연안에는 군기를 잡고 늘어선 자가 1백여 인이나 되었다.”
해상왕국답게 고려는 외국 사신단의 환영행사를 섬에서 치를 만큼 섬을 중요시 했었다.
“사신단이 동접반 김부식 등과 군산정에서 만났다. 그 정자는 바닷가에 있고 뒤로 두 봉우리에 의지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관문 밖에는 관아 십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와 지복사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崇山行宮)이 있고, 전후좌우에는 주민 십여 가구가 있다.”
선유도에는 왕의 임시 거주지인 행궁까지 있었다. 고려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예성강 입구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가 그렇듯이 해상왕국 고려가 섬들을 얼마나 가치 있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증표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오룡묘(五龍墓)라는 선유도의 신전은 그때도 있었다. 오룡묘는 1천 년 이상을 이어온 대단한 신전이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토속 신전에 대한 대우는 참으로 야박하기 그지없다. 선유 3구 밭 너머 마을에서 망주봉을 돌아가면 새터마을이다. 새터마을에서 올라가는 망주봉 길 중턱에 오룡묘가 있다. 예전에는 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숲이 울창해져 길마저 사라지고 없다. 바위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암벽등반을 한 뒤에야 간신히 오룡묘에 이를 수 있다. 오룡묘는 1990년, 마지막 무당이 죽은 뒤부터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오룡묘에는 아직도 윗당, 아랫당 두 개의 당집 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랫당에 봉안 되었던 명두 아가씨, 최씨 부인, 성주 등 다섯 토착신의 화상은 도난당해 그 자리가 비어 있다. 기울어 가는 당집은 노거수 그늘에 파묻혀 소멸의 시간을 기다린다. 가여운 신들. 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섬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살아온 토착 신들. 당집은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풍어를 이루도록 도와준 신들을 모시던 신전이다. 지금 당집에 살던 신들은 어디론가 쫓겨 사라지고 말았다.
선유도는 본래 3개의 다른 섬이었으나 중앙에 긴 모래톱이 쌓이면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선유도에는 여러 산이 있지만 다들 200m가 넘지 않는 낮은 산들이다. 방파제 공사로 많은 모래가 유실되었으나 선유팔경의 하나인 명사십리 해변에서 보는 일몰도 여전히 장관이다. 선유 2구와 3구 사이, 기러기가 내려앉은 모양의 모래톱 평사낙안의 풍경 또한 비경이다. 선유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 망주봉(望主峰 152m)이다. 단단한 바위산의 에너지가 강렬하게 전달된다. 주인을 기다리는 봉우리, 선유도의 주산 망주봉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내려온다.
하나는 충신 버전이다. 선유도에 유배된 관리가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북쪽의 한양에 있는 왕을 사모하였다 해서 망주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하나는 번외 버전이다. 이 버전은 <정감록>에 젖줄을 대고 있다. <정감록>은 이씨 조선이 멸망한 뒤 정도령이 계룡산에 도읍하여 몇 백 년을 다스리고 그 후 조씨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이 계속된 뒤 범씨의 완산 도읍이 시작된다고 예언한다. 선유도 망주봉은 범씨 완산 도읍 천년왕국의 섬나라 버전이다. 그 천년왕국의 주인 범씨 왕을 기다리는 산이 망주봉이다.
선유도에도 선유팔경(仙遊八景)이 있다. 옛날부터 각 지방의 빼어난 경관들은 팔경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즈음은 부쩍 그 숫자가 더 늘었다. 어느 지역엘 가나 팔경이 있다. 더러 십경이나 십이경도 있지만 대다수는 팔경이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일 것이다. 선유팔경의 역사는 생각 없이 급조된 팔경들보다 역사가 깊다. 그런데 어째서 팔경일까. 선유팔경이나 대한팔경, 관동팔경, 단양팔경 같은 팔경의 원조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하필 팔경인 것은 주역의 8괘와 연관이 있다. 춘하추동 4계절에 명승지를 음양으로 두 개씩 배정해서 팔경으로 정한 것이다. 소상(瀟湘)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양자강의 두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말한다. 소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많은 시인들이 노래해 왔다. 팔경의 전통이 하나의 미학으로 확립된 것은 북송 때 화가들이 <소상팔경도>를 그리면서부터다. 이후 동북아에서 소상팔경은 관념 산수시대 최고의 미학이 됐다.
선유팔경의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은 망주봉 아래 바다에 형성된 모래톱이 망주봉에서 바라보면 모래사장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 기러기 형상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선유팔경인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 또한 중국 사천성의 무산십이봉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선유도 안내 팜플렛은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을 방축도, 명도, 말도 등 고군산 섬들의 산봉우리 12개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병사 혹은 무사 모양 같아서 무산이라고 했다면서 무(武)가 아니라 춤출 무(舞)를 쓰는 것은 모순이다. 설명은 견강부회 같다. 실상 무산십이봉은 신선 사상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니 무(武)도 무(舞) 아닌 무(巫)를 쓰는 것이 옳다.
동양에서 신선정원(神仙庭園)을 만들 때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은 그 골격이 되는 산이다. 본래 무산(巫山)은 중국 사천성(四川省) 우산현(巫山縣)의 남동쪽 바산산맥(巴山山脈) 속의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이다. 그런데 그 형세(形勢)가 무자(巫字)와 같다 해서 무산이라 일컫는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첩첩으로 하늘을 가리고 큰 강이 그 사이를 흘러 무협(巫峽)을 이루며, 12개의 봉우리 밑에 신녀묘(神女廟)가 있다고 믿어진다. 동양의 정원에서 산이나 연못의 섬 등으로 사용하는 석가산(石假山)도 이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선유도는 바로 곁의 섬, 장자도, 무녀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장자도는 또 대장도와 연결되어 있다. 4개의 섬은 이미 하나다. 4개의 섬 모두를 걸어볼 수 있다. 작은 섬들이니 네 섬 모두를 걷는데도 하루면 족하다. 길이 평탄하여 자전거를 타기도 좋다. 자전거로 돌면 몇 시간 걸리지 않는다. 선유도는 이제 육지와 다리로 연결됐다. 더 이상 배를 타고 가는 섬이 아니다. 다리가 놓이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하지만 선유도는 여전히 서해 최고의 비경 중 하나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