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올레길

백섬백길

61

11.3km

태고 제주의 압축판, 섬 속의 섬

우도 올레길

백섬백길

61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코스 소개

소가 드러누운 모습이라해서 이름붙여진 우도는 제주도의 축소판이다. 제주도에 딸린 많은 섬들 중 가장 넓은 곳이자 제주도에 속한 유인도들 중 가장 제주다운 모습을 간직한 섬이다. 곳곳에 있는 초원과 현무암지대, 태고의 신비함을 간직한 해안 절벽, 홍조단괴가 부서져 생긴 독특한 해변 등 볼거리가 많은 길이다. 일년 내내 푸른 바다를 따라 돌담길, 땅콩과 보리가 자라는 밭길, 초원길 등 다양한 형태의 길을 걸어보고 싶다면 우도로 가보자.

코스세부정보

천진항( 0 km) 홍조단괴해빈( 2.3 km) 하우목동항( 1.1 km) 산물통 입구( 1.2 km) 파평윤씨공원( 0.9 km) 하고수동해수욕장( 1.2 km) 연자마( 1.2 km) 우도봉 입구( 0.7 km) 천진항( 2.7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요즈음의 우도는 그저 한해 200만명이 넘게 찾아가는 낭만적인 섬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우도는 구좌와 함께 일제 강점기 제주 해녀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제주 전역에서 1만7000명의 해녀가 참여한 해녀항일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여성사회운동이었다. 우도 천진항에는 해녀항쟁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들 대부분은 무심히 지나친다. 다들 아이스크림 가게나 카페나 맛집을 찾아갈 뿐 섬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의 고달픔을 잊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섬여행을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왠지 안타깝기만 하다. 섬에 갔으면 그 섬이 어떤 역사를 간직한 섬인지 정도는 알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말이다.

해녀항쟁기념비에는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됐던 우도 출신 강관순이 작사한 해녀가, <제주 해녀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금된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만들었고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면서 해녀들이 부르게 됐다. 강관순이 작사한 해녀가를 해녀들은 행진곡풍으로 불렀는데 제주는 물론 타지역으로 이주한 출가 해녀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창됐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하루 종일 헤매었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 형제 이별코/ 일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 기관 설비해 놓고/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제주 해녀 항쟁. 일제는 일본인 악덕 상인에게만 전복, 감태, 우뭇가사리 등의 해산물을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헐값에 팔도록 ‘지정판매’를 강요했다. 제주산 전복은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과 상하이 등까지 수출되어 프랑스와 영국 등의 미식가들까지 즐겨 찾는 요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감태는 요오드와 공업용 아교, 화장품 원료로, 우뭇가사리로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과자의 원료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헐값에 해산물을 강탈당한 해녀들은 뼈빠지게 물질을 해도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런 일제의 해녀 수탈에 맞서 일어난 것이 제주해녀항쟁이었다. 1932년 1월 7일 구좌읍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5일장이 서는 세화리 장터로 향하면서 항쟁이 시작됐다. 인근의 해녀들도 시위대에 합류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일제 경찰도 속수무책이었다.  

5일 후인 1월 12일에도 1000여명의 해녀들은 세화리 장터에서 대대적인 연합시위를 벌였다. 그때 우도에서 건너온 우도해녀 300여 명과 시흥리의 해녀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합세했다. 우도의 해녀들 300여 명은 5일간의 식량과 호미와 빗창을 들고 10대의 돛단배에 나눠타고 우도 바다를 건너가 합세 했 던 것이다. 해녀항쟁은 청년교사들이 주도한 야학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야학당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바로 하도리와 우도였다. 

그런데 해녀항일운동의 배후가 하도리 야학당과 우도 영명의숙의 청년 교사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제주 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표했다. 20여명의 해녀대표단은 당시 제주도의 행정책임자였던 다구치 도사와 협상해 지정판매 절대반대와 조합재정 공개 등 8개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구치는 경찰에게 해녀항쟁의 배후조종자를 체포시킬 것을 명령했다.

세화리와 종달리의 문도배, 김시곤, 한양택, 한원택, 우도의 신재홍과 강관순 등 수십명의 청년들이 체포됐다. 체포된 청년들을 호송하는 경찰차를 해녀들 1500여명이 가로막고 청년들을 탈출시켰다. 경찰들은 해녀들의 해산을 설득하는 척하면서 몰래 해녀들의 옷에 도장을 찍었다가 다음날 도장이 찍힌 해녀 100여명을 체포에 구금시켰다. 이에 항거해 해녀들 500여명은 다시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하고 세화리 경찰 주재소를 급습해 전날 체포된 100여의 해녀들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주재소 급습 작전을 지휘한 부춘화 해녀 등 34명이 체포돼 수감됐다.

해녀들을 구출한 청년교사들과 해녀대표들이 우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들은 우도로 건너가 40여 명의 청년교사와 해녀대표들을 체포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도해녀 800여 명이 몰려가 거칠게 항의하고 돛단배로 뒤쫓아가기까지 했지만 일제 경찰들은 위협 사격을 하며 겨우 빠져나갔다. 1932년 조선일보에는 “800여명 해녀 대거‘ 하야 피검자 탈환기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우도에서 남자 11명을 검거하여 가지고 우도서 떠나려 할 때에 팔백여명의 해녀가 배를 둘러싸고 배의 길을 막으며 방해함으로 경관은 부득이 공포 십여발을 놓아 해녀를 위협했다.”

작은 섬이지만 우도는 이토록 장엄한 해녀 항일운동의 역사를 지닌 섬이다. 작지만 우도는 90여개 제주의 부속 섬들중에서는 가장 큰 섬이기도 하다. 우도는 오랫동안 조정에서 소(牛)와 말(馬)을 가두어 기르던 목장으로 이용됐다. 1800년 초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됐다. 우도는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牛頭形)이라고 해서 소섬(牛島)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형상 제주목사의 <남환박물>에는 숙종23년(1697) 유한명 목사(절제사) 당시 우도에 국유목장이 설치해 말 200여 필을 우도에 처음 방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우도장(牛島場)이라 하였다. 

우도는 또 한때 연평리(演坪里)라 했다. 1900년 서당에서 훈학을 하던 오완철이 “물에 뜬 두둑” 같다고 해서 연평리라 명명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1986년 4월 1일 우도가 면으로 승격될 때까지 섬은 연평리란 이름이 사용됐다. 면 승격 당시 모든 기관의 명칭이 우도로 바뀌었지만 초, 중학교만 계속 연평이란 이름을 쓰다가 2010년이 돼서야 우도로 바뀌었다. 우도의 가장 높은 산 우도봉은 우도봉 혹은 우두산이라 불렸다. 

우도의 길을 걷다 보면 작은 저수지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저수지들에는 ‘물통’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어째서 저수지가 아니라 물통이라 했을까? 언뜻 보기에도 수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물이 가득찬 저수지. 우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고 살았다. 그래서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라 마실 물을 담아둔 ‘물통’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삼다수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수출될 정도로 제주의 물이 풍부하지만 옛날에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제주도는 내륙보다 강수량이 많아도 화산섬이라 현무암 및 조면암류가 대부분인 까닭에 빗물 대부분이 지하로 흘러들어가 물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마을을 형성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물 때문이었다. 해변에는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물은 용천수(湧泉水)와 봉천수(奉天水)로 구분되는데-용천수는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후에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이다. 봉천수는 개인 집의 지붕이나 나무에서 내리는 빗물을 항아리에 모아 사용하거나 마을 공동의 저수지에 빗물을 받아 사용하던 물이다. 우도 곳곳에 있는 작은 저수지들은 바로 봉천수 물통이다. 제주 본 섬보다 물 사정이 더 열악했던 우도에서는 대부분의 식수를 이런 봉천수로 해결했다. 우도에도 용천수가 나오는 산물통이 1곳 있지만 짠물이 섞여 식수로 사용하기에 어려워 빗물을 모아 사용하는 봉천수 물통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봉천수 물은 동물의 배설물 등으로 오염이 심했고 뱀, 개구리, 모기 유충 등이 모여 살기도 하고 떼로 죽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우도 사람들은 오염된 식수 때문에 풍토병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간장질환 등에 시달리기도 했고 아이들의 익사 사고도 자주 있었다. 그래서 물을 길어다 담아두던 가정의 물통에다는 금붕어를 기르기도 했는데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 등을 퇴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가뭄이면 이 더러운 물통들마져 말라버려 극심한 섬은 물부족에 시달리기 다반사였다. 가뭄 때면 물통을 지키기 위해 이웃 동네 사람들과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그야말로 물 전쟁이었다. 몰래 물을 훔처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래서 우도에는 쌀 도둑은 없어도 물 도둑은 있다고 했다. 물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우도 사람들은 가뭄이면 제주 본섬 성산포나 종달리까지 왕북 4시간 노를 저어 물을 공수해다 먹기도 했다. 참으로 고단한 섬살이였다, 근래에는 제주 본섬의 물이 해저관로를 통해 공급되면서 우도의 물 문제도 해결됐다. 이제 비로소 우도는 살만한 섬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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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1.3km

태고 제주의 압축판, 섬 속의 섬

코스 소개

소가 드러누운 모습이라해서 이름붙여진 우도는 제주도의 축소판이다. 제주도에 딸린 많은 섬들 중 가장 넓은 곳이자 제주도에 속한 유인도들 중 가장 제주다운 모습을 간직한 섬이다. 곳곳에 있는 초원과 현무암지대, 태고의 신비함을 간직한 해안 절벽, 홍조단괴가 부서져 생긴 독특한 해변 등 볼거리가 많은 길이다. 일년 내내 푸른 바다를 따라 돌담길, 땅콩과 보리가 자라는 밭길, 초원길 등 다양한 형태의 길을 걸어보고 싶다면 우도로 가보자.

코스세부정보

천진항( 0 km) 홍조단괴해빈( 2.3 km) 하우목동항( 1.1 km) 산물통 입구( 1.2 km) 파평윤씨공원( 0.9 km) 하고수동해수욕장( 1.2 km) 연자마( 1.2 km) 우도봉 입구( 0.7 km) 천진항( 2.7 km)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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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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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출발지

도착지

요즈음의 우도는 그저 한해 200만명이 넘게 찾아가는 낭만적인 섬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우도는 구좌와 함께 일제 강점기 제주 해녀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제주 전역에서 1만7000명의 해녀가 참여한 해녀항일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여성사회운동이었다. 우도 천진항에는 해녀항쟁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들 대부분은 무심히 지나친다. 다들 아이스크림 가게나 카페나 맛집을 찾아갈 뿐 섬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의 고달픔을 잊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섬여행을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왠지 안타깝기만 하다. 섬에 갔으면 그 섬이 어떤 역사를 간직한 섬인지 정도는 알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말이다.

해녀항쟁기념비에는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됐던 우도 출신 강관순이 작사한 해녀가, <제주 해녀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금된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만들었고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면서 해녀들이 부르게 됐다. 강관순이 작사한 해녀가를 해녀들은 행진곡풍으로 불렀는데 제주는 물론 타지역으로 이주한 출가 해녀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창됐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하루 종일 헤매었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 형제 이별코/ 일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 기관 설비해 놓고/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제주 해녀 항쟁. 일제는 일본인 악덕 상인에게만 전복, 감태, 우뭇가사리 등의 해산물을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헐값에 팔도록 ‘지정판매’를 강요했다. 제주산 전복은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과 상하이 등까지 수출되어 프랑스와 영국 등의 미식가들까지 즐겨 찾는 요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감태는 요오드와 공업용 아교, 화장품 원료로, 우뭇가사리로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과자의 원료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헐값에 해산물을 강탈당한 해녀들은 뼈빠지게 물질을 해도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런 일제의 해녀 수탈에 맞서 일어난 것이 제주해녀항쟁이었다. 1932년 1월 7일 구좌읍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5일장이 서는 세화리 장터로 향하면서 항쟁이 시작됐다. 인근의 해녀들도 시위대에 합류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일제 경찰도 속수무책이었다.  

5일 후인 1월 12일에도 1000여명의 해녀들은 세화리 장터에서 대대적인 연합시위를 벌였다. 그때 우도에서 건너온 우도해녀 300여 명과 시흥리의 해녀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합세했다. 우도의 해녀들 300여 명은 5일간의 식량과 호미와 빗창을 들고 10대의 돛단배에 나눠타고 우도 바다를 건너가 합세 했 던 것이다. 해녀항쟁은 청년교사들이 주도한 야학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야학당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바로 하도리와 우도였다. 

그런데 해녀항일운동의 배후가 하도리 야학당과 우도 영명의숙의 청년 교사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제주 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표했다. 20여명의 해녀대표단은 당시 제주도의 행정책임자였던 다구치 도사와 협상해 지정판매 절대반대와 조합재정 공개 등 8개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구치는 경찰에게 해녀항쟁의 배후조종자를 체포시킬 것을 명령했다.

세화리와 종달리의 문도배, 김시곤, 한양택, 한원택, 우도의 신재홍과 강관순 등 수십명의 청년들이 체포됐다. 체포된 청년들을 호송하는 경찰차를 해녀들 1500여명이 가로막고 청년들을 탈출시켰다. 경찰들은 해녀들의 해산을 설득하는 척하면서 몰래 해녀들의 옷에 도장을 찍었다가 다음날 도장이 찍힌 해녀 100여명을 체포에 구금시켰다. 이에 항거해 해녀들 500여명은 다시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하고 세화리 경찰 주재소를 급습해 전날 체포된 100여의 해녀들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주재소 급습 작전을 지휘한 부춘화 해녀 등 34명이 체포돼 수감됐다.

해녀들을 구출한 청년교사들과 해녀대표들이 우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들은 우도로 건너가 40여 명의 청년교사와 해녀대표들을 체포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도해녀 800여 명이 몰려가 거칠게 항의하고 돛단배로 뒤쫓아가기까지 했지만 일제 경찰들은 위협 사격을 하며 겨우 빠져나갔다. 1932년 조선일보에는 “800여명 해녀 대거‘ 하야 피검자 탈환기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우도에서 남자 11명을 검거하여 가지고 우도서 떠나려 할 때에 팔백여명의 해녀가 배를 둘러싸고 배의 길을 막으며 방해함으로 경관은 부득이 공포 십여발을 놓아 해녀를 위협했다.”

작은 섬이지만 우도는 이토록 장엄한 해녀 항일운동의 역사를 지닌 섬이다. 작지만 우도는 90여개 제주의 부속 섬들중에서는 가장 큰 섬이기도 하다. 우도는 오랫동안 조정에서 소(牛)와 말(馬)을 가두어 기르던 목장으로 이용됐다. 1800년 초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됐다. 우도는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牛頭形)이라고 해서 소섬(牛島)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형상 제주목사의 <남환박물>에는 숙종23년(1697) 유한명 목사(절제사) 당시 우도에 국유목장이 설치해 말 200여 필을 우도에 처음 방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우도장(牛島場)이라 하였다. 

우도는 또 한때 연평리(演坪里)라 했다. 1900년 서당에서 훈학을 하던 오완철이 “물에 뜬 두둑” 같다고 해서 연평리라 명명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1986년 4월 1일 우도가 면으로 승격될 때까지 섬은 연평리란 이름이 사용됐다. 면 승격 당시 모든 기관의 명칭이 우도로 바뀌었지만 초, 중학교만 계속 연평이란 이름을 쓰다가 2010년이 돼서야 우도로 바뀌었다. 우도의 가장 높은 산 우도봉은 우도봉 혹은 우두산이라 불렸다. 

우도의 길을 걷다 보면 작은 저수지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저수지들에는 ‘물통’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어째서 저수지가 아니라 물통이라 했을까? 언뜻 보기에도 수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물이 가득찬 저수지. 우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고 살았다. 그래서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라 마실 물을 담아둔 ‘물통’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삼다수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수출될 정도로 제주의 물이 풍부하지만 옛날에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제주도는 내륙보다 강수량이 많아도 화산섬이라 현무암 및 조면암류가 대부분인 까닭에 빗물 대부분이 지하로 흘러들어가 물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마을을 형성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물 때문이었다. 해변에는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물은 용천수(湧泉水)와 봉천수(奉天水)로 구분되는데-용천수는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후에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이다. 봉천수는 개인 집의 지붕이나 나무에서 내리는 빗물을 항아리에 모아 사용하거나 마을 공동의 저수지에 빗물을 받아 사용하던 물이다. 우도 곳곳에 있는 작은 저수지들은 바로 봉천수 물통이다. 제주 본 섬보다 물 사정이 더 열악했던 우도에서는 대부분의 식수를 이런 봉천수로 해결했다. 우도에도 용천수가 나오는 산물통이 1곳 있지만 짠물이 섞여 식수로 사용하기에 어려워 빗물을 모아 사용하는 봉천수 물통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봉천수 물은 동물의 배설물 등으로 오염이 심했고 뱀, 개구리, 모기 유충 등이 모여 살기도 하고 떼로 죽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우도 사람들은 오염된 식수 때문에 풍토병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간장질환 등에 시달리기도 했고 아이들의 익사 사고도 자주 있었다. 그래서 물을 길어다 담아두던 가정의 물통에다는 금붕어를 기르기도 했는데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 등을 퇴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가뭄이면 이 더러운 물통들마져 말라버려 극심한 섬은 물부족에 시달리기 다반사였다. 가뭄 때면 물통을 지키기 위해 이웃 동네 사람들과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그야말로 물 전쟁이었다. 몰래 물을 훔처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래서 우도에는 쌀 도둑은 없어도 물 도둑은 있다고 했다. 물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우도 사람들은 가뭄이면 제주 본섬 성산포나 종달리까지 왕북 4시간 노를 저어 물을 공수해다 먹기도 했다. 참으로 고단한 섬살이였다, 근래에는 제주 본섬의 물이 해저관로를 통해 공급되면서 우도의 물 문제도 해결됐다. 이제 비로소 우도는 살만한 섬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