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차귀도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인도다. 제주 본섬 수월봉에서 차귀도 쪽으로 바라보는 일몰을 ‘월봉낙조(月峰落照)’라고 부를 정도로 낙조가 아름다운 섬이다. 해안과 평원을 따라 가는 차귀도 둘레길은 사방팔방 어디 한 군데 막힌데가 없다. 그 어느 섬에서도 느낄 수 없는 목가적인 풍경으로 걷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차귀도(遮歸島)는 본래 대나무가 많아 죽도(竹島)라고 불렀으나 호종단(胡宗旦) 전설 때문에 섬 이름이 바뀌었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제주도의 산천이 뛰어나므로 인재가 많이 태어나 중국에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송나라 장수 호종단이 제주도로 건너와 섬의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고 다녔다 한다. 그런데 호종단이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갈 때 매로 변신한 한라산 수호신이 돛대 위에 앉아 돌풍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고 호종단은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호종단이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고 하여 차귀(遮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라산 산신이 변했던 매처럼 생긴 바위가 지실이 섬이다.
호종단은 역사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제주에서 고종달이라 불리는데 고려 예종 때 귀화인이다. 송나라 복주(福州) 출신으로 상사생(上舍生)이 되고, 절강성에서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와 귀화했다. 고려 예종(1106~1122) 연간에 탐라(제주)에 들어와 산수지기(山水之氣)를 제압하였다고 전하는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 효종 때의 제주목사 이원진은 『탐라지(耽羅志)』에서 ‘호종단은 고려에서 벼슬이 기거사인에 이르렀으니 그에 관한 전설은 근거 없는 말’이라고 평하였다. 호종단은 성품이 총명하고 박학하여 글을 잘 짓고 예능에도 능했으며, 압승술(壓勝術)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차귀도는 2000년 7월 18일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천연보호구역이다. 면적 0.16㎢로 제주특별자치도에 딸린 무인도 가운데 가장 크다. 차귀도는 본섬인 죽도와 지실이섬, 누운섬 등 무인도를 통칭해 부르는 지명이다. 차귀도는 동서 길이 920m, 남북 길이 430m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면적은 155,861㎡이다.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고봉의 표고는 61m이다. 제주도 고산리 해안과 약 2km 떨어져 있다. 고산 자구네 포구에서 배로 10분 정도 거리다. 수월봉에서 차귀도 쪽으로 바라보는 일몰을 월봉낙조(月峰落照)라고 부를 정도로 낙조가 아름다운 섬이다.
차귀도는 주로 응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산 해안의 수월봉과 같이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하이드로볼케이노(hydrovolcano)다. 하이드로볼케이노는 분화 시 마그마가 외부의 물과 접촉하여 강력한 폭발을 일으켜 만들어지는 화산체이다.차귀도 남쪽의 장군바위 일대가 분화의 중심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차귀도는 제주도에서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지역으로 아열대성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5∼10m 수심에는 수 많은 홍조식물이 자라고 있다. 학술적 가치와 생물학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차귀도에는 1911년 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고산리 살던 강씨 집안이 뗏목을 타고 대나무만 무성하던 차귀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전한다. 1973년도에 3가구 12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1977년까지도 2가구가 살았다. 하지만 차귀도는 1978년부터 무인도가 됐다. 섬 지역에서 간첩단 사건이 빈발하자 이후 정부는 10가구 미만의 섬이나 마을들은 소개령이 내렸다. 그렇게 안보상의 이유로 차귀도는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무인도가 된 후에도 사람들은 1980년대까지 농사를 짓고, 해초를 채취하기 위해 차귀도를 드나들었다. 차귀도에는 농사짓던 밭과 집터, 빗물을 저장 시설 등이 남아있다. 섬 동쪽에는 배가 드나들던 차귀포의 흔적도 남아 있다. 현재 차귀도의 유일한 건축물인 차귀도 등대는 1957년 차귀도와 고산리 주민들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볼레기 동산은 주민들이 등대를 만들 때 무거운 돌과 자재들을 직접 이고 지고 언덕을 오르면서 볼렉볼렉(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2000년 천연기념물 지정 후 출입이 금지돼 있다가 2011년부터 일반에 개방됐다.
2000년 7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차귀도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인도다. 제주 본섬 수월봉에서 차귀도 쪽으로 바라보는 일몰을 ‘월봉낙조(月峰落照)’라고 부를 정도로 낙조가 아름다운 섬이다. 해안과 평원을 따라 가는 차귀도 둘레길은 사방팔방 어디 한 군데 막힌데가 없다. 그 어느 섬에서도 느낄 수 없는 목가적인 풍경으로 걷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차귀도(遮歸島)는 본래 대나무가 많아 죽도(竹島)라고 불렀으나 호종단(胡宗旦) 전설 때문에 섬 이름이 바뀌었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제주도의 산천이 뛰어나므로 인재가 많이 태어나 중국에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송나라 장수 호종단이 제주도로 건너와 섬의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고 다녔다 한다. 그런데 호종단이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갈 때 매로 변신한 한라산 수호신이 돛대 위에 앉아 돌풍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고 호종단은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호종단이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고 하여 차귀(遮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라산 산신이 변했던 매처럼 생긴 바위가 지실이 섬이다.
호종단은 역사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제주에서 고종달이라 불리는데 고려 예종 때 귀화인이다. 송나라 복주(福州) 출신으로 상사생(上舍生)이 되고, 절강성에서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와 귀화했다. 고려 예종(1106~1122) 연간에 탐라(제주)에 들어와 산수지기(山水之氣)를 제압하였다고 전하는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 효종 때의 제주목사 이원진은 『탐라지(耽羅志)』에서 ‘호종단은 고려에서 벼슬이 기거사인에 이르렀으니 그에 관한 전설은 근거 없는 말’이라고 평하였다. 호종단은 성품이 총명하고 박학하여 글을 잘 짓고 예능에도 능했으며, 압승술(壓勝術)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차귀도는 2000년 7월 18일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천연보호구역이다. 면적 0.16㎢로 제주특별자치도에 딸린 무인도 가운데 가장 크다. 차귀도는 본섬인 죽도와 지실이섬, 누운섬 등 무인도를 통칭해 부르는 지명이다. 차귀도는 동서 길이 920m, 남북 길이 430m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면적은 155,861㎡이다.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고봉의 표고는 61m이다. 제주도 고산리 해안과 약 2km 떨어져 있다. 고산 자구네 포구에서 배로 10분 정도 거리다. 수월봉에서 차귀도 쪽으로 바라보는 일몰을 월봉낙조(月峰落照)라고 부를 정도로 낙조가 아름다운 섬이다.
차귀도는 주로 응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산 해안의 수월봉과 같이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하이드로볼케이노(hydrovolcano)다. 하이드로볼케이노는 분화 시 마그마가 외부의 물과 접촉하여 강력한 폭발을 일으켜 만들어지는 화산체이다.차귀도 남쪽의 장군바위 일대가 분화의 중심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차귀도는 제주도에서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지역으로 아열대성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5∼10m 수심에는 수 많은 홍조식물이 자라고 있다. 학술적 가치와 생물학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차귀도에는 1911년 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고산리 살던 강씨 집안이 뗏목을 타고 대나무만 무성하던 차귀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전한다. 1973년도에 3가구 12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1977년까지도 2가구가 살았다. 하지만 차귀도는 1978년부터 무인도가 됐다. 섬 지역에서 간첩단 사건이 빈발하자 이후 정부는 10가구 미만의 섬이나 마을들은 소개령이 내렸다. 그렇게 안보상의 이유로 차귀도는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무인도가 된 후에도 사람들은 1980년대까지 농사를 짓고, 해초를 채취하기 위해 차귀도를 드나들었다. 차귀도에는 농사짓던 밭과 집터, 빗물을 저장 시설 등이 남아있다. 섬 동쪽에는 배가 드나들던 차귀포의 흔적도 남아 있다. 현재 차귀도의 유일한 건축물인 차귀도 등대는 1957년 차귀도와 고산리 주민들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볼레기 동산은 주민들이 등대를 만들 때 무거운 돌과 자재들을 직접 이고 지고 언덕을 오르면서 볼렉볼렉(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2000년 천연기념물 지정 후 출입이 금지돼 있다가 2011년부터 일반에 개방됐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