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올레길은 산과 바다와 내륙이 어우러진 절경의 연속이다. 또 사방으로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등대에 올라서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늑한 해안길과 마을길, 산길까지 여러 코스가 있어 심심할 수 없는 길이이기도 하다. 특히 나바론 하늘길과 이어지는 숲길들은 하늘과 바다 모두와 맞닿아있는 느낌을 준다. 북적거리는 도시로 돌아온 후 항상 생각날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상추자도 대서리. 추자도는 영광 법성포와 연평도 어장에서 사라진 조기잡이의 새로운 메카다. 추자항 주변 물량장에서는 조기 따는 작업이 한창이다. 연안유자망 어선 해창호(7.03톤)도 부두에 정박 작업중이다. 오늘 해창호는 추자와 제주 사이의 바다에서 조업했다. 해창호는 조기가 걸린 그물을 그대로 싣고 입항했다. 품팔이를 나온 마을 여자들과 선원들 12명이 일렬로 서서 배에 실린 그물을 뭍으로 끌어당기며 조기를 딴다. 조기들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추자도 역시 올해 조기는 잘다. 오늘 해창호의 어획량은 200여 상자. 잡어는 추려내고 조기만 한 곳으로 모은다. 모든 작업을 마치려면 7~8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물에서 따낸 조기는 깨끗이 세척한 뒤 얼음물에 한 시간 남짓 재워둔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 후에는 다시 꺼내 나무상자에 넣고 얼음을 채운다. 하루 정도 지나면 조기의 몸이 더욱 노란 빛깔로 변한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해창호 선주 부인의 대답이 걸작이다.
“조기가 마술을 부리나 보죠.”
낚싯줄 재료인 경심줄로 만든 그물은 그 자체로 바늘 없는 낚시다. 조기들은 낚시가 아니라 그물에 낚인다. 그물코에 머리가 걸린 조기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발버둥 치다 생을 마감한다. 조기 따는 작업장 옆에서 선주 부인이 저녁상을 차린다. 삼치와 조기찜, 김치찌개, 방어전, 고등어회까지 한상 가득 푸짐하다.
수산전문가들은 흑산도와 제주 근해 참조기 풍어는 참조기의 자원량 증가와는 무관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1974년까지만 해도 전국 조기 어획량은 9만4천 톤이었지만 해마다 줄어들어 1984년부터는 1만 톤 미만으로 떨어졌다. 2007년에는 7천여 톤에 불과했다. 올해는 조기 어획고가 다시 1만5천 톤까지 늘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러한 추세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흑산도나 제주 근해에서 잡히는 조기의 90% 이상이 2살 미만이며 평균 몸길이는 14~16cm에 불과하다. 과거에 비해 시기가 당겨졌다 해도 조기들이 산란하기 위해서는 최소 2년(몸길이 21.7cm) 이상은 성장해야 한다. 지금처럼 어린 조기들에 대한 남획이 계속 된다면 연평도나 칠산어장처럼 흑산도나 추자도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조기를 따는 작업장의 불빛으로 추자도의 가을밤은 환하다. 추자어화가 부둣가에 피었다. 기관 돌아가는 소리, 수천 촉 백열등 아래 어부들은 그물을 당겨 조기를 딴다. 밤 10시, 이제 추자도의 조기 따는 일도 끝이 났다. 일꾼들은 돌아가고 선주와 선원들이 남아 그물을 세척하고 다시 배 안으로 끌어올린다. 내일의 출어 준비를 마친 다음에야 선원들의 고단한 하루도 마감될 것이다.
이 조기잡이 풍경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연평도와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멸족한 길을 흑산도와 추자도가 그대로 밟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에 눈 감는 선주들의 욕심이 줄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세상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히 풍족한 곳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는 언제나 모자란 곳이다.
한국의 섬들에는 저마다의 신들이 있었다. 연평도의 신은 임경업 장군이고 어청도와 외연도의 신은 중국 제나라의 망명객 전횡 장군이다. 변산 바다의 신은 계양할미고 진도의 신은 영등할미다. 완도의 신은 송징 장군이고 청산도의 신은 한내구 장군이다. 제주 본섬에는 1만8천의 신들이 있지만 추자도의 신은 최영 장군이다. 추자도는 상하 추자 두 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하추자에 최영 장군신을 모신 사당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에 의해 제주목사도 죽임을 당했다. 이른바 군사용 말을 기르던 몽골 출신 목자들이 중심이 된 ‘목호의 난’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에게 전함 300여 척과 2만5천여 명의 군사를 주어 목호들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최영의 군사들이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 잠시 추자도에 대피했다. 그때 최영이 주민들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추자도 사람들은 사당을 세우고 매년 백중날과 음력 섣달 그믐에 풍어제를 지내왔다 한다. 최영이 정말 어로법을 가르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추자도 사람들에게 대군을 이끌고 온 노장군 최영은 두렵고도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신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추자가 상추자보다 면적은 세 배 이상 크지만 인구는 상추자가 두 배 이상 많다. 상추자가 고깃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이 발달하고 상업시설이 많은 까닭이다. 섬이나 뭍이나 사람은 이익을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하추자도에는 신양1리, 신양2리, 예초리, 묵리마을이 있고 상추자도에는 대서리와 영흥리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추자섬 주변은 크고 작은 무인도와 여들이 자주 뱃길을 막는다.
섬과 여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물 밖으로 나오면 섬이 되고 물 속으로 들어가면 암초다. 여는 섬과 섬 아닌 것 사이에서 존재와 부재를 거듭한다. 큰미역섬, 작은미역섬, 밖미역섬은 미역이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일 터다. 개린여, 납덕이, 두령여, 상섬, 구멍섬, 덜섬, 쇠머리, 검은가리, 노린여, 문여, 오동여, 검등여, 열섬, 예도, 공여, 악생이, 염섬, 수려섬, 직구도, 관탈도, 푸랭이, 병풍도, 수덕도, 쇠코. 추자의 무인도와 여들. 그 무인도와 여들로 인해 추자 섬은 풍족한 어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추자 섬에 살지만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모두 무인도와 암초들이다.
추자면 소재지 부근 영흥리와 대서리의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마치 거대한 성의 일부분 같다. 옆집과 떨어져 있으면 태풍이나 파도에 휩쓸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양 옆으로 혹은 앞뒤로 밀착되어 있다. 오래된 습속. 땅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사람은, 섬은 군집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섬에서는 모여 살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과거 바다일은 협업이었다. 또 왜구나, 해적들의 노략질과 살육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모여 살아야만 했다. 삶을 이어가고 죽음에 맞서기 위해서는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추자도의 주거양식은 확실히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구조다.
두 개의 마을은 추자항을 따라 몰려있다. 마을의 반대편 해안은 비탈지고 옹색하다. 상추자 북서쪽의 무인도 직구도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그 풍경을 달리한다. 안개의 날에는 섬의 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사물은 객관적이지만 풍경은 주관적이다. 풍경은 속도에 종속된다. 걷는 속도, 탈 것의 속도, 바람과 안개와 구름의 속도, 마음의 속도에 지배된다. 동일한 풍경을 보고 와서도 그려내는 풍경이 사람마다 제 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
추자대교를 지나 상추자에서 하추자로 건넌다. 대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추자대교는 하추자도 묵리와 상추자도 영흥리 사이 바닷길을 이어주는 212m의 작고 아담한 다리다. 1966년 착공되어 1972년에 완공된 다리가 있었으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교각과 슬래브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88년 무렵부터 붕괴 위험에 빠졌다. 부실공사 탓이었다. 다리는 결국 1993년 4월 새로운 다리 공사를 위해 모래를 싣고 가던 트럭의 하중의 견디지 못하고 아주 붕괴됐다. 그 사고로 두 사람이 죽었다. 토목공화국의 부실공사는 외딴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감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 낙도일수록 더욱 심했다. ‘성수대교’는 섬에도 있었다.
신양항에는 마을회관과 경로당, 보건진료소, 하추자우체국이 있다. 마을 곳곳에는 공동우물이 여러 곳 남아있다. 다리로 연결된 상하 추자 두 개의 섬은 저수지와 해수담수화 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 섬의 생명수였던 우물도 폐쇄되지 않고 남아있다. 물 부족의 고통을 겪어 본 추자섬 사람들이 상수도가 생긴 뒤에도 우물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바다가 이 행성의 피라면 우물은 이 마을의 피다. 우물에서 뻗어나간 혈관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저 우물의 심장에서 배분된 피가 수도 파이프를 타고 마을의 집들로 배달된다. 비 피할 양동이 하나씩을 뒤집어 쓴 펌프는 심장의 피를 옮겨주는 엔진이다.
하추자 산길을 넘는다. 신양리에서 묵리로 가는 길. 추자섬의 산은 높지 않고 길은 멀지 않다. 묵리 하산길의 저수지가 추자도 제3 수원지다. 저수지는 단 한 방울의 물도 흘려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이다. 저수지의 모든 바닥을 비닐천으로 방수했다. 물 부족으로 고심했던 섬의 흔적이 눈물겹다. 수원지 밑에는 해수담수화 시설이 들어 서 있다. 빗물을 받아쓰는 저수지의 물이 부족하면 해수를 담수 처리한 뒤 함께 섞어서 공급한다. 추자도에는 모두 4개의 수원지가 있는데 저수량은 총 1,720톤, 해수담수화센터는 1일 1천 톤의 담수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 문제는 인류만의 일이 아니다. 지구 행성에 기대 사는 생명체들의 생존의 문제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 있지만 그 물의 97%는 바다에 있다. 담수는 지구상 물의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2%는 빙산이나 빙하의 상태로 있다. 결국 우리는 지구 전체 물의 1%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 1%의 물을 사람과 수많은 생물 종들이 고루 나눠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구에서 식수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만 한 해에 340만 명이 넘는다. 다행히도 이 나라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조금 가물기라도 하면 이 땅의 모든 언론매체는 당장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 다음 수순은 이 나라가 물부족국가라고 난리를 치는 일이다. 그러면 토목, 수자원 관련 부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댐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마치 댐 건설 외에는 치수 정책이 전혀 없는 것처럼 생떼를 쓴다. 그때 가장 많이 ‘애용’되는 것이 섬의 물부족이다. 마실 물이 없어서 뭍에서 탱크로 물을 실어다 급수하는 섬마을 자료화면을 수시로 보여주며 위기의식을 부추긴다. 실상 가뭄이 들어도 뭍에서 물을 실어다 먹어야 하는 섬은 몇 되지 않는다. 물이 부족한 섬들도 밥을 못해 먹을 정도는 아니다. 그저 펑펑 쓰던 물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불편할 뿐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마치 모든 섬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어가는 것처럼 사태를 과장한다.
추자도가 그랬다. 처음 하나의 상수원 댐을 만들었으나 가뭄이 들자 역시 물이 부족했다. 물 공급이 증가한 만큼 물의 사용량도 늘어난 까닭이다. 그렇게 모두 4개의 댐을 건설했으나 여전히 물은 부족했다. 결국 해수담수화 시설을 도입했다. 그 다음부터는 가뭄 때 물 문제가 해결됐다. 하지만 지금처럼 물을 낭비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담수화 또한 궁극적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물부족 사태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을 풍족하게 쓸 방법보다는 물을 아껴 쓸 방법을 찾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하추자 신양항 대합실은 섬을 빠져나가려는 여객들로 혼잡하다. 난바다의 섬에는 큰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가 다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바람이 아니라도 바다는 자주 안개의 군단에 포위당한다. 완도에서 오는 여객선은 안개의 포획에 걸려 출항이 두 시간이나 늦어졌다. 도착 시간은 그보다 더 늦어질 것이다. 안개, 바람이나 거센 풍랑을 피해갈 수 있는 노련한 선장도 안개를 피해갈 도리란 없다. 안개에는 틈이 없다. 세상의 어떠한 지식도 안개의 세상에서는 무용하다. 여객선은 그저 안개의 눈치를 봐가며 느릿느릿 나아갈 뿐이다. 대합실의 노인들은 배시간이 늦어져도 느긋하다. 조급해봐야 달리 방법이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
“지가 거북이가 됐건 뭐가 됐건 올 테지라.”
노인의 말은 제주도보다 전라도 방언에 가깝다. 추자도는 오랜 세월 전라도 문화권이었다. 배는 예정보다 늦었지만 끝내 추자도까지 도달했다. 추자 섬으로 오기 전에 무거웠던 마음이 섬을 걸으며 가벼워졌다.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끄들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자도 올레길은 산과 바다와 내륙이 어우러진 절경의 연속이다. 또 사방으로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등대에 올라서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늑한 해안길과 마을길, 산길까지 여러 코스가 있어 심심할 수 없는 길이이기도 하다. 특히 나바론 하늘길과 이어지는 숲길들은 하늘과 바다 모두와 맞닿아있는 느낌을 준다. 북적거리는 도시로 돌아온 후 항상 생각날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상추자도 대서리. 추자도는 영광 법성포와 연평도 어장에서 사라진 조기잡이의 새로운 메카다. 추자항 주변 물량장에서는 조기 따는 작업이 한창이다. 연안유자망 어선 해창호(7.03톤)도 부두에 정박 작업중이다. 오늘 해창호는 추자와 제주 사이의 바다에서 조업했다. 해창호는 조기가 걸린 그물을 그대로 싣고 입항했다. 품팔이를 나온 마을 여자들과 선원들 12명이 일렬로 서서 배에 실린 그물을 뭍으로 끌어당기며 조기를 딴다. 조기들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추자도 역시 올해 조기는 잘다. 오늘 해창호의 어획량은 200여 상자. 잡어는 추려내고 조기만 한 곳으로 모은다. 모든 작업을 마치려면 7~8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물에서 따낸 조기는 깨끗이 세척한 뒤 얼음물에 한 시간 남짓 재워둔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 후에는 다시 꺼내 나무상자에 넣고 얼음을 채운다. 하루 정도 지나면 조기의 몸이 더욱 노란 빛깔로 변한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해창호 선주 부인의 대답이 걸작이다.
“조기가 마술을 부리나 보죠.”
낚싯줄 재료인 경심줄로 만든 그물은 그 자체로 바늘 없는 낚시다. 조기들은 낚시가 아니라 그물에 낚인다. 그물코에 머리가 걸린 조기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발버둥 치다 생을 마감한다. 조기 따는 작업장 옆에서 선주 부인이 저녁상을 차린다. 삼치와 조기찜, 김치찌개, 방어전, 고등어회까지 한상 가득 푸짐하다.
수산전문가들은 흑산도와 제주 근해 참조기 풍어는 참조기의 자원량 증가와는 무관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1974년까지만 해도 전국 조기 어획량은 9만4천 톤이었지만 해마다 줄어들어 1984년부터는 1만 톤 미만으로 떨어졌다. 2007년에는 7천여 톤에 불과했다. 올해는 조기 어획고가 다시 1만5천 톤까지 늘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러한 추세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흑산도나 제주 근해에서 잡히는 조기의 90% 이상이 2살 미만이며 평균 몸길이는 14~16cm에 불과하다. 과거에 비해 시기가 당겨졌다 해도 조기들이 산란하기 위해서는 최소 2년(몸길이 21.7cm) 이상은 성장해야 한다. 지금처럼 어린 조기들에 대한 남획이 계속 된다면 연평도나 칠산어장처럼 흑산도나 추자도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조기를 따는 작업장의 불빛으로 추자도의 가을밤은 환하다. 추자어화가 부둣가에 피었다. 기관 돌아가는 소리, 수천 촉 백열등 아래 어부들은 그물을 당겨 조기를 딴다. 밤 10시, 이제 추자도의 조기 따는 일도 끝이 났다. 일꾼들은 돌아가고 선주와 선원들이 남아 그물을 세척하고 다시 배 안으로 끌어올린다. 내일의 출어 준비를 마친 다음에야 선원들의 고단한 하루도 마감될 것이다.
이 조기잡이 풍경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연평도와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멸족한 길을 흑산도와 추자도가 그대로 밟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에 눈 감는 선주들의 욕심이 줄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세상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히 풍족한 곳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는 언제나 모자란 곳이다.
한국의 섬들에는 저마다의 신들이 있었다. 연평도의 신은 임경업 장군이고 어청도와 외연도의 신은 중국 제나라의 망명객 전횡 장군이다. 변산 바다의 신은 계양할미고 진도의 신은 영등할미다. 완도의 신은 송징 장군이고 청산도의 신은 한내구 장군이다. 제주 본섬에는 1만8천의 신들이 있지만 추자도의 신은 최영 장군이다. 추자도는 상하 추자 두 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하추자에 최영 장군신을 모신 사당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에 의해 제주목사도 죽임을 당했다. 이른바 군사용 말을 기르던 몽골 출신 목자들이 중심이 된 ‘목호의 난’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에게 전함 300여 척과 2만5천여 명의 군사를 주어 목호들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최영의 군사들이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 잠시 추자도에 대피했다. 그때 최영이 주민들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추자도 사람들은 사당을 세우고 매년 백중날과 음력 섣달 그믐에 풍어제를 지내왔다 한다. 최영이 정말 어로법을 가르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추자도 사람들에게 대군을 이끌고 온 노장군 최영은 두렵고도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신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추자가 상추자보다 면적은 세 배 이상 크지만 인구는 상추자가 두 배 이상 많다. 상추자가 고깃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이 발달하고 상업시설이 많은 까닭이다. 섬이나 뭍이나 사람은 이익을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하추자도에는 신양1리, 신양2리, 예초리, 묵리마을이 있고 상추자도에는 대서리와 영흥리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추자섬 주변은 크고 작은 무인도와 여들이 자주 뱃길을 막는다.
섬과 여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물 밖으로 나오면 섬이 되고 물 속으로 들어가면 암초다. 여는 섬과 섬 아닌 것 사이에서 존재와 부재를 거듭한다. 큰미역섬, 작은미역섬, 밖미역섬은 미역이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일 터다. 개린여, 납덕이, 두령여, 상섬, 구멍섬, 덜섬, 쇠머리, 검은가리, 노린여, 문여, 오동여, 검등여, 열섬, 예도, 공여, 악생이, 염섬, 수려섬, 직구도, 관탈도, 푸랭이, 병풍도, 수덕도, 쇠코. 추자의 무인도와 여들. 그 무인도와 여들로 인해 추자 섬은 풍족한 어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추자 섬에 살지만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모두 무인도와 암초들이다.
추자면 소재지 부근 영흥리와 대서리의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마치 거대한 성의 일부분 같다. 옆집과 떨어져 있으면 태풍이나 파도에 휩쓸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양 옆으로 혹은 앞뒤로 밀착되어 있다. 오래된 습속. 땅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사람은, 섬은 군집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섬에서는 모여 살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과거 바다일은 협업이었다. 또 왜구나, 해적들의 노략질과 살육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모여 살아야만 했다. 삶을 이어가고 죽음에 맞서기 위해서는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추자도의 주거양식은 확실히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구조다.
두 개의 마을은 추자항을 따라 몰려있다. 마을의 반대편 해안은 비탈지고 옹색하다. 상추자 북서쪽의 무인도 직구도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그 풍경을 달리한다. 안개의 날에는 섬의 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사물은 객관적이지만 풍경은 주관적이다. 풍경은 속도에 종속된다. 걷는 속도, 탈 것의 속도, 바람과 안개와 구름의 속도, 마음의 속도에 지배된다. 동일한 풍경을 보고 와서도 그려내는 풍경이 사람마다 제 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
추자대교를 지나 상추자에서 하추자로 건넌다. 대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추자대교는 하추자도 묵리와 상추자도 영흥리 사이 바닷길을 이어주는 212m의 작고 아담한 다리다. 1966년 착공되어 1972년에 완공된 다리가 있었으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교각과 슬래브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88년 무렵부터 붕괴 위험에 빠졌다. 부실공사 탓이었다. 다리는 결국 1993년 4월 새로운 다리 공사를 위해 모래를 싣고 가던 트럭의 하중의 견디지 못하고 아주 붕괴됐다. 그 사고로 두 사람이 죽었다. 토목공화국의 부실공사는 외딴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감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 낙도일수록 더욱 심했다. ‘성수대교’는 섬에도 있었다.
신양항에는 마을회관과 경로당, 보건진료소, 하추자우체국이 있다. 마을 곳곳에는 공동우물이 여러 곳 남아있다. 다리로 연결된 상하 추자 두 개의 섬은 저수지와 해수담수화 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 섬의 생명수였던 우물도 폐쇄되지 않고 남아있다. 물 부족의 고통을 겪어 본 추자섬 사람들이 상수도가 생긴 뒤에도 우물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바다가 이 행성의 피라면 우물은 이 마을의 피다. 우물에서 뻗어나간 혈관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저 우물의 심장에서 배분된 피가 수도 파이프를 타고 마을의 집들로 배달된다. 비 피할 양동이 하나씩을 뒤집어 쓴 펌프는 심장의 피를 옮겨주는 엔진이다.
하추자 산길을 넘는다. 신양리에서 묵리로 가는 길. 추자섬의 산은 높지 않고 길은 멀지 않다. 묵리 하산길의 저수지가 추자도 제3 수원지다. 저수지는 단 한 방울의 물도 흘려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이다. 저수지의 모든 바닥을 비닐천으로 방수했다. 물 부족으로 고심했던 섬의 흔적이 눈물겹다. 수원지 밑에는 해수담수화 시설이 들어 서 있다. 빗물을 받아쓰는 저수지의 물이 부족하면 해수를 담수 처리한 뒤 함께 섞어서 공급한다. 추자도에는 모두 4개의 수원지가 있는데 저수량은 총 1,720톤, 해수담수화센터는 1일 1천 톤의 담수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 문제는 인류만의 일이 아니다. 지구 행성에 기대 사는 생명체들의 생존의 문제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 있지만 그 물의 97%는 바다에 있다. 담수는 지구상 물의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2%는 빙산이나 빙하의 상태로 있다. 결국 우리는 지구 전체 물의 1%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 1%의 물을 사람과 수많은 생물 종들이 고루 나눠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구에서 식수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만 한 해에 340만 명이 넘는다. 다행히도 이 나라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조금 가물기라도 하면 이 땅의 모든 언론매체는 당장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 다음 수순은 이 나라가 물부족국가라고 난리를 치는 일이다. 그러면 토목, 수자원 관련 부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댐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마치 댐 건설 외에는 치수 정책이 전혀 없는 것처럼 생떼를 쓴다. 그때 가장 많이 ‘애용’되는 것이 섬의 물부족이다. 마실 물이 없어서 뭍에서 탱크로 물을 실어다 급수하는 섬마을 자료화면을 수시로 보여주며 위기의식을 부추긴다. 실상 가뭄이 들어도 뭍에서 물을 실어다 먹어야 하는 섬은 몇 되지 않는다. 물이 부족한 섬들도 밥을 못해 먹을 정도는 아니다. 그저 펑펑 쓰던 물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불편할 뿐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마치 모든 섬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어가는 것처럼 사태를 과장한다.
추자도가 그랬다. 처음 하나의 상수원 댐을 만들었으나 가뭄이 들자 역시 물이 부족했다. 물 공급이 증가한 만큼 물의 사용량도 늘어난 까닭이다. 그렇게 모두 4개의 댐을 건설했으나 여전히 물은 부족했다. 결국 해수담수화 시설을 도입했다. 그 다음부터는 가뭄 때 물 문제가 해결됐다. 하지만 지금처럼 물을 낭비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담수화 또한 궁극적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물부족 사태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을 풍족하게 쓸 방법보다는 물을 아껴 쓸 방법을 찾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하추자 신양항 대합실은 섬을 빠져나가려는 여객들로 혼잡하다. 난바다의 섬에는 큰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가 다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바람이 아니라도 바다는 자주 안개의 군단에 포위당한다. 완도에서 오는 여객선은 안개의 포획에 걸려 출항이 두 시간이나 늦어졌다. 도착 시간은 그보다 더 늦어질 것이다. 안개, 바람이나 거센 풍랑을 피해갈 수 있는 노련한 선장도 안개를 피해갈 도리란 없다. 안개에는 틈이 없다. 세상의 어떠한 지식도 안개의 세상에서는 무용하다. 여객선은 그저 안개의 눈치를 봐가며 느릿느릿 나아갈 뿐이다. 대합실의 노인들은 배시간이 늦어져도 느긋하다. 조급해봐야 달리 방법이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
“지가 거북이가 됐건 뭐가 됐건 올 테지라.”
노인의 말은 제주도보다 전라도 방언에 가깝다. 추자도는 오랜 세월 전라도 문화권이었다. 배는 예정보다 늦었지만 끝내 추자도까지 도달했다. 추자 섬으로 오기 전에 무거웠던 마음이 섬을 걸으며 가벼워졌다.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끄들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