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 김대중모실길

백섬백길

52

18.2km

조선의 공주 가문에 빼앗긴 땅을 333년간 투쟁 끝에 되찾은 세계 농민운동사에 빛나는 불멸의 섬.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 김대중모실길

백섬백길

52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코스 소개

하의도 김대중모실길은 대부분의 길들이 해안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특히 큰바위얼굴을 볼 수 있는 죽도로 향하는 서부해안일주도로가 인상 깊다. 마을 사이 사이 길들과 해안길, 낮은 언덕의 구릉길, 염전길 등이 적절히 섞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는 길이다. 또 하의도는 다른 섬에 비해 논밭의 규모가 커 이들을 따라 걷는 것도 생소한 느낌을 준다. 섬이지만 농민운동이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다.

코스세부정보

하의도항( 0 km)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1.3 km) 김대중대통령생가( 2 km) 당두항( 4.5 km) 갈림길( 2.2 km) 어은1구 경로당 갈림길( 1.3 km) 모래구미해변( 3 km) 큰바위얼굴 전망대( 1.9 km) 피섬경로당( 2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하의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섬이다. 하지만 하의도는 330년 간 토지반환운동에서 승리한 한국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땅이기도 하다. 330년 동안의 싸움은 공주로부터 비롯됐다. 정명공주(1603~1685).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주민들은 공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3백여 년을 싸웠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이었다. 정명공주는 선조의 정실에게서 난 첫째 딸이자 인조의 고모다. 또 광해군에게 폐비된 인목대비의 딸이자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누이다. 인목대비가 서궁으로 폐출됐을 때 함께 감금생활을 했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삼촌의 왕위를 찬탈한 인조에 의해 다시 공주로 복권됐다.  

인목대비 사후에는 궁중에서 비단에 쓰인 백서(帛書) 세 폭이 발견됐는데 임금(인조)을 폐하고 다시 세우자는 내용이었다. 정명공주는 이 백서의 배후로 의심받고 곤경에 처해졌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인조 사후 효종, 현종, 숙종 3대 동안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살았다. 정명공주는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했는데 숙종 때의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는 그녀의 증손이며, 수찬 이인검(李仁儉)은 외증손이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경국대전>은 공주의 집이 50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이 넘었고 경상도에만 8,076결의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한다. 그런 정명공주에게 하의3도 농민들의 농토까지 하사됐다.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한국의 섬들에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국가에서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했고 섬은 무인지경이 됐다. 국법으로 금하니 섬에서 사는 것 자체가 죄가 되었다. 섬과 바다를 포기했던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다시 주민 거주를 허락했다. 그래서 대부분 섬들의 사람살이 역사는 삼사백년에 불과하다. 공도정책 이전 수천 년 이어온 섬살이의 역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황폐화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사지을 땅을 만들었다. 국법에도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역시 임진왜란 직후 내륙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토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왕은 주민들이 개간한 땅을 강탈해버렸다. 1623년, 인조는 하의3도의 개간된 땅 24결을 정명공주에게 하사했다. 그래도 인조는 정명공주의 4대 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정명공주의 4대 손이 사망한 이후에도 홍씨 가문은 하의도 주민들에게 농토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홍씨 가문은 하의3도 주민들이 나중에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아 갔다. 공주의 5대손 홍상한은 섬 주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 140결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주장해 결세를 거두어 갔다. 
 
결국 주민들은 국가와 홍씨 집안 양쪽에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일토양세(一土兩稅)였다. 수탈이 극에 달하니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긴 주민들은 다시 땅을 되찾기 위해 대를 이어 가며 싸웠다. 하지만 권세를 지닌 홍씨 가문에 번번이 패했다. 구한말 하의3도의 땅은 홍씨 가문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집안으로, 또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로 넘어갔다. 하의3도 주민들은 도세 납부 거부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 1956년에야 비로소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경 330여 년에 걸친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신안군 하의도는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된 하의면의 본 섬이다. 면적 14.46㎢, 해안선 길이 32㎞의 섬이다. 백과사전이나 하의도 안내 책자 등에는 하의도가 연화부수형의 지형인데 연꽃으로 만든 옷 모양이라 하의도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의도(荷衣島)의 옛 이름은 고이도 혹은 고의도였다. 일본 헤이안시대의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고이도(高移島)로, <삼국사기> 효공왕(?∼912) 3년조에는 고이도(皐夷島)도로 나온다. <고려사> 권1 건화4년(914)조에는 고의도(皐衣島)로 표기되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8월27일 기사에는 하의도(河衣島)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개된 지명 유래는 별 근거가 없다. 고이도에서 고의도, 고의도에서 또 하의도로 표기가 변해온 것이다.  

요즘 하의도를 찾는 사람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와 함께 꼭 찾아가는 곳이 있다. 큰바위얼굴이다. 어은리 앞 무인도인 죽도의 형상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큰바위얼굴이다. 그 얼굴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죽도의 바위는 사자바위라 불렸었다. 전설은 이렇다.
 
옛날 옛적 어은리 피섬 마을 뒷산에 고승 한 분이 암자를 짓고 큰 수사자를 키우며 수도생활을 했다. 그런데 피섬 마을에는 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과 가축들을 해쳤다. 피섬 마을 사람들은 고승께 도움을 청했다. 고승은 수사자와 함께 호랑이 사냥에 나서 호랑이를 사로잡았다. 고승은 호랑이를 마을 앞산의 석굴에 가두어버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승과 사자는 호랑이 사냥 중에 큰 부상을 입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죽도에 고승과 사자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죽도는 점차 갈기 무성한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이를 사자바위라 부르게 됐다. 또 호랑이를 가두었던 바위는 범바위라 불렀다.” 
그 사자의 얼굴이 어느 때부턴가 점차 사람의 얼굴로 변해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의 고향 하의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그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상실감을 토로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8월 18일 뒤를 따랐다. 마지막 고향 방문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6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20여 년간 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고, 3년 반의 망명생활도 했지만 하의3도 농민의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이다.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 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승을 하직하였고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말은 유언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하의도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중은 서자였다. 어머니 장수금은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 김운식은 첫째 부인과 1남 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김대중은 어머니가 낳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남이었다. 아버지 집은 본 마을에 있었고, 어머니 집은 간척지인 후광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본가에 들어가지 않고 후광리에서 따로 살았다. 후광리는 간척지였다.
 
어머니는 염전 일꾼들에게 밥을 해주는 함바집을 하고 막걸리도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 김대중은 유학자 초암 김련이 세운 덕봉강당이란 서당에서 공부했고 4년제 초등학교가 생기자 서당공부 학력을 인정받아 2학년으로 편입학해서 4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목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섬에서 뭍으로의 유학이란 지금 외국유학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목포로 나가 김대중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나와 염전 길을 지나 면소재지가 있는 곰실(웅곡)마을 향해 걷는다. 종남리 마을 어귀에 할머니 한 분 앉아 잠시 쉬고 계시다. 

“지심 매고 오요. 독새풀은 징해라우. 쪼금 매다 오요. 녹두밭도 매고 오요.” 
할머니는 밭을 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팔십 닛이나 되요. 아들이 하지 마라하면 오냐 안할란다 해놓고 하요. 가만 앉아 있어 머 하것소. 용돈도 벌고 좋제.”
 
“할머니,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 무엇 좀 해주고 갔습니까?” 
“다른 디는 대통령 나면 동네가 번들번들 한디 대중이는 암것도 안해 줬어라우. 그라니 욕 안 하것소. 대통령 나면 머하냐고 다들 그라요.” 
할머니뿐만 아니라 하의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특혜를 주지 않았던 그의 지나친 염결성이 고향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하의도에서 태어나 하의도로 시집와 평생을 살았다. 영감님은 앞서 가셨다. 밭 위에다 묘를 썼다. 할머니가 유모차 같은 것에 의지해 가면서까지 굳이 밭을 매러 다니는 것은 혹 영감님 생각이 나서는 아닐까. 할머니는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살았다. 밭 아홉 마지기와 논 몇 마지기를 혼자 손으로 다 일구었으니 고생도 그런 고생이 또 있었을까. 아들 셋 딸 넷을 낳고 키웠지만 넷은 어미 먼저 이승을 떠버렸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란가. 명이 고뿐 밖에 안 되서 그란가.” 
셋째 딸은 딸 하나를 낳아 키우다 가버렸다.  
“은이야 금이야 하다가 다 못 키 놓고 죽었다우.” 
손녀를 키우고 혼자 사는 사위가 안쓰럽다. 
 
“죽었으면 내가 죽었어야 될 거 아니우. 그라면 머가 부럽겠소. 자식들 앞세우지 않는 사람이 젤 부럽소.”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리신다. 할머니는 다시 유모차에 의지해 마을 안길로 접어든다.
“건강하세요, 할머니.” 
할머니도 인사말을 건넨다. 
“어차튼지 건강하게 사시오.” 
느릿느릿 가다 쉬다 가다 쉬다 할머니의 걸음은 달팽이보다 느리다. 저러다 해 넘어가기 전에 집에 들어가실 수나 있으려나. 

하의도 김대중모실길

백섬백길

52

18.2km

조선의 공주 가문에 빼앗긴 땅을 333년간 투쟁 끝에 되찾은 세계 농민운동사에 빛나는 불멸의 섬.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코스 소개

하의도 김대중모실길은 대부분의 길들이 해안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특히 큰바위얼굴을 볼 수 있는 죽도로 향하는 서부해안일주도로가 인상 깊다. 마을 사이 사이 길들과 해안길, 낮은 언덕의 구릉길, 염전길 등이 적절히 섞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는 길이다. 또 하의도는 다른 섬에 비해 논밭의 규모가 커 이들을 따라 걷는 것도 생소한 느낌을 준다. 섬이지만 농민운동이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다.

코스세부정보

하의도항( 0 km)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1.3 km) 김대중대통령생가( 2 km) 당두항( 4.5 km) 갈림길( 2.2 km) 어은1구 경로당 갈림길( 1.3 km) 모래구미해변( 3 km) 큰바위얼굴 전망대( 1.9 km) 피섬경로당( 2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하의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섬이다. 하지만 하의도는 330년 간 토지반환운동에서 승리한 한국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땅이기도 하다. 330년 동안의 싸움은 공주로부터 비롯됐다. 정명공주(1603~1685).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주민들은 공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3백여 년을 싸웠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이었다. 정명공주는 선조의 정실에게서 난 첫째 딸이자 인조의 고모다. 또 광해군에게 폐비된 인목대비의 딸이자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누이다. 인목대비가 서궁으로 폐출됐을 때 함께 감금생활을 했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삼촌의 왕위를 찬탈한 인조에 의해 다시 공주로 복권됐다.  

인목대비 사후에는 궁중에서 비단에 쓰인 백서(帛書) 세 폭이 발견됐는데 임금(인조)을 폐하고 다시 세우자는 내용이었다. 정명공주는 이 백서의 배후로 의심받고 곤경에 처해졌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인조 사후 효종, 현종, 숙종 3대 동안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살았다. 정명공주는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했는데 숙종 때의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는 그녀의 증손이며, 수찬 이인검(李仁儉)은 외증손이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경국대전>은 공주의 집이 50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이 넘었고 경상도에만 8,076결의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한다. 그런 정명공주에게 하의3도 농민들의 농토까지 하사됐다.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한국의 섬들에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국가에서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했고 섬은 무인지경이 됐다. 국법으로 금하니 섬에서 사는 것 자체가 죄가 되었다. 섬과 바다를 포기했던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다시 주민 거주를 허락했다. 그래서 대부분 섬들의 사람살이 역사는 삼사백년에 불과하다. 공도정책 이전 수천 년 이어온 섬살이의 역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황폐화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사지을 땅을 만들었다. 국법에도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역시 임진왜란 직후 내륙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토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왕은 주민들이 개간한 땅을 강탈해버렸다. 1623년, 인조는 하의3도의 개간된 땅 24결을 정명공주에게 하사했다. 그래도 인조는 정명공주의 4대 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정명공주의 4대 손이 사망한 이후에도 홍씨 가문은 하의도 주민들에게 농토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홍씨 가문은 하의3도 주민들이 나중에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아 갔다. 공주의 5대손 홍상한은 섬 주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 140결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주장해 결세를 거두어 갔다. 
 
결국 주민들은 국가와 홍씨 집안 양쪽에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일토양세(一土兩稅)였다. 수탈이 극에 달하니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긴 주민들은 다시 땅을 되찾기 위해 대를 이어 가며 싸웠다. 하지만 권세를 지닌 홍씨 가문에 번번이 패했다. 구한말 하의3도의 땅은 홍씨 가문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집안으로, 또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로 넘어갔다. 하의3도 주민들은 도세 납부 거부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 1956년에야 비로소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경 330여 년에 걸친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신안군 하의도는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된 하의면의 본 섬이다. 면적 14.46㎢, 해안선 길이 32㎞의 섬이다. 백과사전이나 하의도 안내 책자 등에는 하의도가 연화부수형의 지형인데 연꽃으로 만든 옷 모양이라 하의도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의도(荷衣島)의 옛 이름은 고이도 혹은 고의도였다. 일본 헤이안시대의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고이도(高移島)로, <삼국사기> 효공왕(?∼912) 3년조에는 고이도(皐夷島)도로 나온다. <고려사> 권1 건화4년(914)조에는 고의도(皐衣島)로 표기되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8월27일 기사에는 하의도(河衣島)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개된 지명 유래는 별 근거가 없다. 고이도에서 고의도, 고의도에서 또 하의도로 표기가 변해온 것이다.  

요즘 하의도를 찾는 사람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와 함께 꼭 찾아가는 곳이 있다. 큰바위얼굴이다. 어은리 앞 무인도인 죽도의 형상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큰바위얼굴이다. 그 얼굴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죽도의 바위는 사자바위라 불렸었다. 전설은 이렇다.
 
옛날 옛적 어은리 피섬 마을 뒷산에 고승 한 분이 암자를 짓고 큰 수사자를 키우며 수도생활을 했다. 그런데 피섬 마을에는 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과 가축들을 해쳤다. 피섬 마을 사람들은 고승께 도움을 청했다. 고승은 수사자와 함께 호랑이 사냥에 나서 호랑이를 사로잡았다. 고승은 호랑이를 마을 앞산의 석굴에 가두어버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승과 사자는 호랑이 사냥 중에 큰 부상을 입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죽도에 고승과 사자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죽도는 점차 갈기 무성한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이를 사자바위라 부르게 됐다. 또 호랑이를 가두었던 바위는 범바위라 불렀다.” 
그 사자의 얼굴이 어느 때부턴가 점차 사람의 얼굴로 변해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의 고향 하의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그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상실감을 토로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8월 18일 뒤를 따랐다. 마지막 고향 방문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6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20여 년간 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고, 3년 반의 망명생활도 했지만 하의3도 농민의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이다.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 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승을 하직하였고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말은 유언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하의도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중은 서자였다. 어머니 장수금은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 김운식은 첫째 부인과 1남 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김대중은 어머니가 낳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남이었다. 아버지 집은 본 마을에 있었고, 어머니 집은 간척지인 후광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본가에 들어가지 않고 후광리에서 따로 살았다. 후광리는 간척지였다.
 
어머니는 염전 일꾼들에게 밥을 해주는 함바집을 하고 막걸리도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 김대중은 유학자 초암 김련이 세운 덕봉강당이란 서당에서 공부했고 4년제 초등학교가 생기자 서당공부 학력을 인정받아 2학년으로 편입학해서 4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목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섬에서 뭍으로의 유학이란 지금 외국유학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목포로 나가 김대중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나와 염전 길을 지나 면소재지가 있는 곰실(웅곡)마을 향해 걷는다. 종남리 마을 어귀에 할머니 한 분 앉아 잠시 쉬고 계시다. 

“지심 매고 오요. 독새풀은 징해라우. 쪼금 매다 오요. 녹두밭도 매고 오요.” 
할머니는 밭을 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팔십 닛이나 되요. 아들이 하지 마라하면 오냐 안할란다 해놓고 하요. 가만 앉아 있어 머 하것소. 용돈도 벌고 좋제.”
 
“할머니,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 무엇 좀 해주고 갔습니까?” 
“다른 디는 대통령 나면 동네가 번들번들 한디 대중이는 암것도 안해 줬어라우. 그라니 욕 안 하것소. 대통령 나면 머하냐고 다들 그라요.” 
할머니뿐만 아니라 하의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특혜를 주지 않았던 그의 지나친 염결성이 고향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하의도에서 태어나 하의도로 시집와 평생을 살았다. 영감님은 앞서 가셨다. 밭 위에다 묘를 썼다. 할머니가 유모차 같은 것에 의지해 가면서까지 굳이 밭을 매러 다니는 것은 혹 영감님 생각이 나서는 아닐까. 할머니는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살았다. 밭 아홉 마지기와 논 몇 마지기를 혼자 손으로 다 일구었으니 고생도 그런 고생이 또 있었을까. 아들 셋 딸 넷을 낳고 키웠지만 넷은 어미 먼저 이승을 떠버렸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란가. 명이 고뿐 밖에 안 되서 그란가.” 
셋째 딸은 딸 하나를 낳아 키우다 가버렸다.  
“은이야 금이야 하다가 다 못 키 놓고 죽었다우.” 
손녀를 키우고 혼자 사는 사위가 안쓰럽다. 
 
“죽었으면 내가 죽었어야 될 거 아니우. 그라면 머가 부럽겠소. 자식들 앞세우지 않는 사람이 젤 부럽소.”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리신다. 할머니는 다시 유모차에 의지해 마을 안길로 접어든다.
“건강하세요, 할머니.” 
할머니도 인사말을 건넨다. 
“어차튼지 건강하게 사시오.” 
느릿느릿 가다 쉬다 가다 쉬다 할머니의 걸음은 달팽이보다 느리다. 저러다 해 넘어가기 전에 집에 들어가실 수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