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도 둘레길

백섬백길

50

10km

해안 절벽이 병풍처럼 아름다운 섬, 순례자의 섬, 기점 소악도까지 노둣길로 이어진 섬

병풍도 둘레길

백섬백길

50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

코스 소개

기점소악도와 병풍도는 노둣길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병풍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겹겹이 쌓인 지층과 이 지층이 이룬 절벽들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곳이 병풍도다. 평지이면서도 걷는 사람이 적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병풍바위 해안길. 이러한 풍경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곳은 전국 통틀어서도 흔치 않다. 10월이면 맨드라미 축제가 열린다.

코스세부정보

보기항( 0 km) 해안로 갈림길( 2.6 km) 큰섬( 1.6 km) 병풍도 관리사무소( 2.5 km) 맨드라미공원 갈림길( 1 km) 보기항( 2.3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병풍도는 가장 높은 곳이 74m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간석지로 이루어진 평지다. 그래서 논과 염전이 많다. 섬 서북쪽 끝 해안선 절벽인 병풍바위가 파도와 침식, 풍화되어 병풍처럼 보인다 해서 병암도(屛巖島)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병풍도’가 됐다. 병풍바위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한 신선이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병풍도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마을에서 병풍바위로 가는 길 왼편은 온통 염전이고 오른편은 온통 논이다.  병풍바위는 염전의 끝 해안가를 따라 도열해 있다. 채석강이 부안의 격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 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한 절벽. 병풍을 펼쳐놓은 듯이 쫙 펴진 책의 절벽. 병풍바위 또한 채석강의 풍경과 흡사하다. 채석강이 먼저 알려 졌을 뿐 이런 지형이 섬에서는 드물지 않다. 여수사도와 추도, 진도의 관매도 방아 섬, 군산의 말도, 나는 이 나라 섬 곳곳에서 채석강보다 웅장한 도서관의 풍경을 목격했다.

“병풍도가 염전이 아주 많아요. 염전 고장이제.” 병원에 다녀오는 노인을 배를 기다리며 만났다. 병풍도는 섬이지만 어업보다는 농사가 많다. 노인도 벼농사랑 양파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내륙인 무안과 신안군 지도는 다리로 연결되었고 증도 또한 사옥도와 송도를 거처 지도와 다리가 놓였으니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버지선착장은 단일염전으로는 국내 최대인 태평염전 바로 옆의 작은 포구다. 버지란 말은 벗에서 온듯하다. 옛날에는 소금을 벗이라 했다. 소금 밭 옆의 선착장이니 벗선착장이라 하다가 버지가 됐을 것이다.

병풍도는 면적 2.5㎢, 해안선 길이 11.2㎞,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24㎞, 지도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는 섬이다. 신안 지역 대부분의 섬들이 목포시를 통로로 내륙지역과 소통하지만 병풍도나 임자도 등 신안군 북쪽 섬들은 목포보다는 무안군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한다. 병풍도 근처에는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학도, 진섬 등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노두를 통해 병풍도와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갯벌 위에 노둣돌을 놓아 썰물 때만 건너다녔는지만 이제는 갯벌에 도로를 깔아 만조 때만 아니면 수시로 건넌다.
“옛날에는 노두로 건너다니다 옷도 다 버리고 그랬는데 지금은 편해졌소.”
해안 절벽이 병풍처럼 아름다운 병풍도 해변에는 해식동굴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해식 동굴, 그거 파도에 생긴 것이 파도에 없어져 부렀소. 어릴  때는 거길 뛰어다니고 그랬는데 흔적도 없어져 버렸어.”

병풍도에서는 해태(김) 양식장도 많고 염전도 많았다. 
“평풍도가 돈 섬이라 했소. 지금 사 힘이 없어 돈을 못버니까 그라제.”
노인은 병풍도를 평풍도라 발음한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 힘에 부치니 예전만큼 김 양식도 못하고 염전도 줄었다. 그러니 예전처럼 더 이상 돈 섬이 아니다. 한때는 안좌면의 반월도와 병풍도가 젊은 사람도 많고 부자 섬으로 유명했다. 

신안의 많은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어 내륙으로 편입되었고 다리 공사 중인 곳도 많다. 하지만 병풍도는 연륙교 소식이 전혀 없다. 노인은 그것이 섭섭하다.
“예전에는 풍선, 돛단배 타고, 노 저어 다니고 그랬소. 무안서 증도까지 걸어 다니고 그랬소.”
어느 섬이나 그랬듯이 병풍도 사람들도 옛날에는 내륙에 한번 나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배를 타고 다니지만 옛날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다.

병풍도 근해는 황금 어장으로 유명했었다.
“평풍리 뒷바닥이 고기가 무쟈게 많이 났소. 조기, 부서, 준치, 병어, 어마어마하게 많았소. 짚 가마니로 하나씩 담아서 져 나르고 그랬소. 그란디 지금은 하나도 없어. 조기, 부서 큰 거, 간질 한다고 시멘트로 간독 만들고 그랬는디 지금은  없어져 부렸소.”
옛날에는 동서남해 바다 어느 한곳 황금어장 아닌 바다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느 바다를 가나 어족의 씨가 말랐다는 탄식이 들린다. 그게 다 어린 치어까지 분별없이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다. 인간의 탐욕이 바다의 씨를 말린 것이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병어 구경하기도 힘들어졌다. 더 먼 바다로 나가야 좀 잡힌다. 
“병치(병어) 그거는 막 잡아서 올라온 것이 좋은 것인디. 지금은 다 얼음 간해갖고 맛이 없어져 부렀어.”
병어 같은 생선은 바다에서 막 잡아다 먹는 것이 맛있는데 이제는 섬 근처에서 생선이 안나니 먼 바다에서 얼음에 재 가져온 것을 사 먹으니 맛이 덜하다는 말씀이다. 물고기가 그렇게 많이 나던 시절에도 병풍도 사람들은 바다보다는 땅에 기대고 살았다. 농사만으로도 충분히 부유하게 살 수 있었으니 굳이 바다에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바다는 그저 언제든지 잡아다 먹을 수 있는 생선 창고 같았았다. 부족한 것이 없는 섬이었다. 그래서 병풍도는 인심이 좋았다. 풍요로운 반월도가 인심이 좋았던 것처럼. 그런데 병풍도의 인심이 사나워진 것은 한국전쟁 직후부터다.

“6.25 나면서 버렸소. 6.25때 사상 그것 때문에 그랬지. 서로 죽이고. 젊은 사람들 다 희생당해버렸지. 평풍리 사람 이씨라고 있었는디, 그 사람이 똑독했었는디, 쓸만 한 사람은 다 잡아다 조저 부렀어. 자기 핏줄 죽였다고 경찰 시켜서 학살해 버렸소. 젊은 사람 싹쓸이 해부렀소. 수십명을.”

이 작은 섬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비껴갈 수 없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자신의 형이 마을 사람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이가 있었다. 그가 인민군이 쫓겨 가고 경찰이 들어오자 복수를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핏줄을 죽인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의 젊은 사람들을 전부 다 좌익으로 몰아서 학살을 했던 것이다.
 
“나도 그 때 두 형을 잃었소. 그 때 형들이 안 죽었다면 나가 섬에 살지도 않았을 것인디.” 
똑똑했던 노인의 두 형도 그 복수의 희생양이 돼서 죽임을 당했다.
“두 형님, 스물 몇 살씩 됐을 때요. 한분은 딸 하나, 한 분은 자식도 없이 신혼 때 죽었어. 죄가 없어도 까시 노릇한 사람은 다 잡아 죽여 버렸소. 얼른 쉽게 말해 발전성이 있는 사람은 다 족쳐 부렀지.”
노인은 이제 원한이 풀어진 것일까. 자기 두형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도 이해할 것 같다고 한다. 
“그 사람보고도 머라 못하겠습디다. 자기 핏줄이 죽임을 당했으니. 잘 생기고 언변도 좋았는디 국회의원 나왔다가 그 사건 땜에 버려 부렀어. 인물은 인물인디.”

시간의 힘일 것이다. 망각의 힘일 것이다. 원한도, 용서도 다 망각의 강물에, 시간의 물살에  떠내려 가버렸으니.
“저 영산강 가니까 영산강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 사람들한테 들으니까 경찰들이 주민들을 죽여 돌을 발에다 묶어서 던저 버리니까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부렀답디다.”
노인은 병풍도 들어가거든 이런 얘기 들었다고 누구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이런 얘기하면 웃어라우. 지나간 야기해서 뭤하겠소.”
다들 그런 아픔 하나씩 품고 살아가는 섬사람들. 새삼 옛 이야기를 꺼내 상처를 들쑤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일 게다. 섬에는 아직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병풍도는 마치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다.

병풍도와 대기점도 사이의 노둣 길을 건넌다. 갯벌에서는 한 여자가 낙지를 잡고 있다. 여자는 뻘 속 깊이 손을 집어넣어 낙지를 잡는다. 너른 갯벌 어디에 무엇이 사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여자는 낙지 구멍을 찾아 쏙쏙 잘도 뽑아낸다. 여자는 갯벌에 무릎을 꿇고 낙지를 잡는다. 저것은 갯벌의 기도다! 기도란 본디 저렇게 하는 것이다. 갯벌뿐이랴. 땅에 무릎 꿇고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 삶이 간절할수록 사람들의 기도는 땅바닥에 밀착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란 예배당에서, 기도원에서, 법당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란 저렇게 논과 밭, 갯벌에 무릎 꿇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기적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대기점도 북촌(북천) 마을, 할머니 한분이 바닷가에 나와 물 빠진 갯벌을 보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신다.
“기경 많이 하시오.”
할머니는 나그네가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가라고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신다. 대기점도에는 본래 이 북촌 마을 하나 뿐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서 집 짓고 살림 차릴 곳이 없자 제저금(단 살림) 내주면서 남촌(남천) 마을이 한곳 더 생겼다. 다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는 북촌이고 남촌이고 빈집 투성이다.
“여가 앉져 놀면 좋소.”

할머니는 늘 나와서 보는 바다와 갯벌이지만 볼 때마다 좋기만 하다. 할머니는 사탕 하나를 꺼내 건네다. 할머니는 갯벌 노두길사이로 바닷물이 통하도록 해수유통 공사를 하는 청년에게도 사탕을 나눠주고 싶었는데 청년이 거절하자 마음이 좀 상하셨다.
“누가 이뻐서 준줄 알고. 나다니면서 머 좀 달라면 좋제.”
할머니는 뭐든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객지를 떠돌면서 신세도 좀 지고 그래야지 너무 예의만 차리고 그러면 정이 없다는 말씀이겠지. 정이 살아있는 섬마을의 인정이 정겹다.

병풍도 둘레길

백섬백길

50

10km

해안 절벽이 병풍처럼 아름다운 섬, 순례자의 섬, 기점 소악도까지 노둣길로 이어진 섬

코스 소개

기점소악도와 병풍도는 노둣길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병풍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겹겹이 쌓인 지층과 이 지층이 이룬 절벽들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곳이 병풍도다. 평지이면서도 걷는 사람이 적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병풍바위 해안길. 이러한 풍경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곳은 전국 통틀어서도 흔치 않다. 10월이면 맨드라미 축제가 열린다.

코스세부정보

보기항( 0 km) 해안로 갈림길( 2.6 km) 큰섬( 1.6 km) 병풍도 관리사무소( 2.5 km) 맨드라미공원 갈림길( 1 km) 보기항( 2.3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병풍도는 가장 높은 곳이 74m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간석지로 이루어진 평지다. 그래서 논과 염전이 많다. 섬 서북쪽 끝 해안선 절벽인 병풍바위가 파도와 침식, 풍화되어 병풍처럼 보인다 해서 병암도(屛巖島)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병풍도’가 됐다. 병풍바위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한 신선이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병풍도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마을에서 병풍바위로 가는 길 왼편은 온통 염전이고 오른편은 온통 논이다.  병풍바위는 염전의 끝 해안가를 따라 도열해 있다. 채석강이 부안의 격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 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한 절벽. 병풍을 펼쳐놓은 듯이 쫙 펴진 책의 절벽. 병풍바위 또한 채석강의 풍경과 흡사하다. 채석강이 먼저 알려 졌을 뿐 이런 지형이 섬에서는 드물지 않다. 여수사도와 추도, 진도의 관매도 방아 섬, 군산의 말도, 나는 이 나라 섬 곳곳에서 채석강보다 웅장한 도서관의 풍경을 목격했다.

“병풍도가 염전이 아주 많아요. 염전 고장이제.” 병원에 다녀오는 노인을 배를 기다리며 만났다. 병풍도는 섬이지만 어업보다는 농사가 많다. 노인도 벼농사랑 양파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내륙인 무안과 신안군 지도는 다리로 연결되었고 증도 또한 사옥도와 송도를 거처 지도와 다리가 놓였으니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버지선착장은 단일염전으로는 국내 최대인 태평염전 바로 옆의 작은 포구다. 버지란 말은 벗에서 온듯하다. 옛날에는 소금을 벗이라 했다. 소금 밭 옆의 선착장이니 벗선착장이라 하다가 버지가 됐을 것이다.

병풍도는 면적 2.5㎢, 해안선 길이 11.2㎞,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24㎞, 지도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는 섬이다. 신안 지역 대부분의 섬들이 목포시를 통로로 내륙지역과 소통하지만 병풍도나 임자도 등 신안군 북쪽 섬들은 목포보다는 무안군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한다. 병풍도 근처에는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학도, 진섬 등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노두를 통해 병풍도와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갯벌 위에 노둣돌을 놓아 썰물 때만 건너다녔는지만 이제는 갯벌에 도로를 깔아 만조 때만 아니면 수시로 건넌다.
“옛날에는 노두로 건너다니다 옷도 다 버리고 그랬는데 지금은 편해졌소.”
해안 절벽이 병풍처럼 아름다운 병풍도 해변에는 해식동굴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해식 동굴, 그거 파도에 생긴 것이 파도에 없어져 부렀소. 어릴  때는 거길 뛰어다니고 그랬는데 흔적도 없어져 버렸어.”

병풍도에서는 해태(김) 양식장도 많고 염전도 많았다. 
“평풍도가 돈 섬이라 했소. 지금 사 힘이 없어 돈을 못버니까 그라제.”
노인은 병풍도를 평풍도라 발음한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 힘에 부치니 예전만큼 김 양식도 못하고 염전도 줄었다. 그러니 예전처럼 더 이상 돈 섬이 아니다. 한때는 안좌면의 반월도와 병풍도가 젊은 사람도 많고 부자 섬으로 유명했다. 

신안의 많은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어 내륙으로 편입되었고 다리 공사 중인 곳도 많다. 하지만 병풍도는 연륙교 소식이 전혀 없다. 노인은 그것이 섭섭하다.
“예전에는 풍선, 돛단배 타고, 노 저어 다니고 그랬소. 무안서 증도까지 걸어 다니고 그랬소.”
어느 섬이나 그랬듯이 병풍도 사람들도 옛날에는 내륙에 한번 나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배를 타고 다니지만 옛날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다.

병풍도 근해는 황금 어장으로 유명했었다.
“평풍리 뒷바닥이 고기가 무쟈게 많이 났소. 조기, 부서, 준치, 병어, 어마어마하게 많았소. 짚 가마니로 하나씩 담아서 져 나르고 그랬소. 그란디 지금은 하나도 없어. 조기, 부서 큰 거, 간질 한다고 시멘트로 간독 만들고 그랬는디 지금은  없어져 부렸소.”
옛날에는 동서남해 바다 어느 한곳 황금어장 아닌 바다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느 바다를 가나 어족의 씨가 말랐다는 탄식이 들린다. 그게 다 어린 치어까지 분별없이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다. 인간의 탐욕이 바다의 씨를 말린 것이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병어 구경하기도 힘들어졌다. 더 먼 바다로 나가야 좀 잡힌다. 
“병치(병어) 그거는 막 잡아서 올라온 것이 좋은 것인디. 지금은 다 얼음 간해갖고 맛이 없어져 부렀어.”
병어 같은 생선은 바다에서 막 잡아다 먹는 것이 맛있는데 이제는 섬 근처에서 생선이 안나니 먼 바다에서 얼음에 재 가져온 것을 사 먹으니 맛이 덜하다는 말씀이다. 물고기가 그렇게 많이 나던 시절에도 병풍도 사람들은 바다보다는 땅에 기대고 살았다. 농사만으로도 충분히 부유하게 살 수 있었으니 굳이 바다에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바다는 그저 언제든지 잡아다 먹을 수 있는 생선 창고 같았았다. 부족한 것이 없는 섬이었다. 그래서 병풍도는 인심이 좋았다. 풍요로운 반월도가 인심이 좋았던 것처럼. 그런데 병풍도의 인심이 사나워진 것은 한국전쟁 직후부터다.

“6.25 나면서 버렸소. 6.25때 사상 그것 때문에 그랬지. 서로 죽이고. 젊은 사람들 다 희생당해버렸지. 평풍리 사람 이씨라고 있었는디, 그 사람이 똑독했었는디, 쓸만 한 사람은 다 잡아다 조저 부렀어. 자기 핏줄 죽였다고 경찰 시켜서 학살해 버렸소. 젊은 사람 싹쓸이 해부렀소. 수십명을.”

이 작은 섬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비껴갈 수 없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자신의 형이 마을 사람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이가 있었다. 그가 인민군이 쫓겨 가고 경찰이 들어오자 복수를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핏줄을 죽인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의 젊은 사람들을 전부 다 좌익으로 몰아서 학살을 했던 것이다.
 
“나도 그 때 두 형을 잃었소. 그 때 형들이 안 죽었다면 나가 섬에 살지도 않았을 것인디.” 
똑똑했던 노인의 두 형도 그 복수의 희생양이 돼서 죽임을 당했다.
“두 형님, 스물 몇 살씩 됐을 때요. 한분은 딸 하나, 한 분은 자식도 없이 신혼 때 죽었어. 죄가 없어도 까시 노릇한 사람은 다 잡아 죽여 버렸소. 얼른 쉽게 말해 발전성이 있는 사람은 다 족쳐 부렀지.”
노인은 이제 원한이 풀어진 것일까. 자기 두형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도 이해할 것 같다고 한다. 
“그 사람보고도 머라 못하겠습디다. 자기 핏줄이 죽임을 당했으니. 잘 생기고 언변도 좋았는디 국회의원 나왔다가 그 사건 땜에 버려 부렀어. 인물은 인물인디.”

시간의 힘일 것이다. 망각의 힘일 것이다. 원한도, 용서도 다 망각의 강물에, 시간의 물살에  떠내려 가버렸으니.
“저 영산강 가니까 영산강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 사람들한테 들으니까 경찰들이 주민들을 죽여 돌을 발에다 묶어서 던저 버리니까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부렀답디다.”
노인은 병풍도 들어가거든 이런 얘기 들었다고 누구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이런 얘기하면 웃어라우. 지나간 야기해서 뭤하겠소.”
다들 그런 아픔 하나씩 품고 살아가는 섬사람들. 새삼 옛 이야기를 꺼내 상처를 들쑤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일 게다. 섬에는 아직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병풍도는 마치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다.

병풍도와 대기점도 사이의 노둣 길을 건넌다. 갯벌에서는 한 여자가 낙지를 잡고 있다. 여자는 뻘 속 깊이 손을 집어넣어 낙지를 잡는다. 너른 갯벌 어디에 무엇이 사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여자는 낙지 구멍을 찾아 쏙쏙 잘도 뽑아낸다. 여자는 갯벌에 무릎을 꿇고 낙지를 잡는다. 저것은 갯벌의 기도다! 기도란 본디 저렇게 하는 것이다. 갯벌뿐이랴. 땅에 무릎 꿇고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 삶이 간절할수록 사람들의 기도는 땅바닥에 밀착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란 예배당에서, 기도원에서, 법당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란 저렇게 논과 밭, 갯벌에 무릎 꿇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기적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대기점도 북촌(북천) 마을, 할머니 한분이 바닷가에 나와 물 빠진 갯벌을 보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신다.
“기경 많이 하시오.”
할머니는 나그네가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가라고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신다. 대기점도에는 본래 이 북촌 마을 하나 뿐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서 집 짓고 살림 차릴 곳이 없자 제저금(단 살림) 내주면서 남촌(남천) 마을이 한곳 더 생겼다. 다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는 북촌이고 남촌이고 빈집 투성이다.
“여가 앉져 놀면 좋소.”

할머니는 늘 나와서 보는 바다와 갯벌이지만 볼 때마다 좋기만 하다. 할머니는 사탕 하나를 꺼내 건네다. 할머니는 갯벌 노두길사이로 바닷물이 통하도록 해수유통 공사를 하는 청년에게도 사탕을 나눠주고 싶었는데 청년이 거절하자 마음이 좀 상하셨다.
“누가 이뻐서 준줄 알고. 나다니면서 머 좀 달라면 좋제.”
할머니는 뭐든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객지를 떠돌면서 신세도 좀 지고 그래야지 너무 예의만 차리고 그러면 정이 없다는 말씀이겠지. 정이 살아있는 섬마을의 인정이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