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모실길은 천사대교 입구 오도항에서 시작하여 생낌항까지 이어지는 해안 모실길이다. 암태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천사대교를 뒤로하고 해안 오솔길을 따라 섬마을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걷는 생태역사문화 탐방로다. 길을 걷다보면 신안 앞바다에 꽃처럼 피어난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인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섬이다. 암태도 농민들은 소작쟁의로 친일 지주의 수탈에 맞서 800여명이 단식 투쟁을 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근대뿐만 아니다. 조선 태종 8년(1408년)에는 소금 굽는 일을 하던 암태도 사람들 20명이 왜구의 해적선 9척과 맞서 싸워 이겼다. 왜구의 해적선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200명, 소선도 40~80명 정도가 승선했다. 그러니 9척이면 최소 360명의 왜구들과 맞서 싸워 이겼다는 뜻이니 참으로 엄청난 승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왜선(倭船) 9척이 연일(連日)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니,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賊)이 곧 물러갔다.” <태종실록 8년 1408년 2월 03일 기사>
암태도의 면적은 36.27㎢. 여의도(2.9㎢)의 열두 배 쯤 된다. 암태도의 전답은 11.75㎢나 된다. 여의도의 4배쯤 되는 땅이 암태도의 논과 밭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이지만 농사가 주업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일제하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반 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1920년대 들어 무려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해 갔다. 약탈적 소작료 징수를 참을 수 없었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쟁의를 개시했다. 암태도 오상리 출신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가 조직되었고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구는 거절되었고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문재철에 대항했다.
일제경찰은 농민대표들을 구속시켰다. 암태도 주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차로 400명이 또 2차로 600명이 목포로 나가 목포경찰서 앞에서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언론에서는 아사동맹이라 보도했다. 암태도 주민들의 투쟁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고 한반도는 물론 해외에서 까지 응원이 답지 했다. 암태도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마침내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했고 농민대표들도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외딴 섬에서 이루어낸 항일운동의 값진 승리였다. 하지만 1998년이 돼서야 면소재지인 단고리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촉발시킨 대지주 문재철(1882-1955)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1920년대 당시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과 전라남북도 등지에 755정보(226만5천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암태도에는 약 140정보(42만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0년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무려 1666정보(500만평)로 늘어났다.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했고 1941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응원하던 친일 단체인 흥아보국단 및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재철은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다. 친일지주였던 문재철은 소작쟁의 후 암태도 독립운동가 박복영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도 알려져 그에 대한 평가는 간단치 않은 측면이 있다. 그래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분야에 등재되었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빠졌다. 자본가로서 민족을 위한 교육사업,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과 같은 공로를 세운 점을 인정받아 친일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모실길 중간에는 익금 우실 숲이 있다. 익금우실은 마을의 북쪽 해변인 우실너머와 익금마을 경계에 있다. 우실은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우실산이라 부른다. 익금 우실은 돌담 우실과 팽나무 숲으로 조성된 생우실이 함께 있다. 돌담 우실은 높이 2.2m, 길이 40m의 돌담이고 생우실은 팽나무 숲이다.
우실은 ‘울실’, 즉 ‘마을의 울타리’라는 뜻이다. 대체로 숲이나 돌담, 토담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용적인 목적과 신앙적 의미가 함께한다. 강한 바닷바람의 습격으로부터 농작물과 가옥을 보호하려는 현실적 목적과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액운도 막아보겠다는 비보(裨補)적 의미로 조성된 것이다. 우실은 지역에 따라 우슬, 우술, 울실, 돌담장, 당산거리, 방풍림, 방조림, 어부림, 노거수림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한 토담우실, 기둥을 박아 만든 목책우실, 대나무나 갈대, 짚을 엮어 막는 파자우실, 나무를 심어 숲으로 만든 생우실 등이 있다. 익금 우실은 돌담우실과 팽나무(憉木) 생우실이 함께 있는 특별한 우실이다.
익금 우실 너머는 북쪽 바다다. 겨울에는 북풍이 거세다. 겨울에 마을로 휘몰아쳐 오는 북풍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고 나무도 심어서 현실적으로 바람을 막는 방풍 기능도 하게 했다. 익금 우실은 또 마을을 은폐하는 기능도 있었다.
익금 우실 돌담의 본래 모습은 성곽의 옹성과 같은 구조였다. 그래서 멀리 바다에서 보면 출입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팽나무 숲 외곽에 돌담을 쌓은 것은 돌담을 군사들이 지키는 성곽처럼 보이게 만들어 해적들이 스스로 침범을 포기하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우실은 상징적 재앙뿐만 아니라 왜구와 해적의 침략이라는 현실적 재앙을 막아주는 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암태도 모실길은 천사대교 입구 오도항에서 시작하여 생낌항까지 이어지는 해안 모실길이다. 암태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천사대교를 뒤로하고 해안 오솔길을 따라 섬마을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걷는 생태역사문화 탐방로다. 길을 걷다보면 신안 앞바다에 꽃처럼 피어난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인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섬이다. 암태도 농민들은 소작쟁의로 친일 지주의 수탈에 맞서 800여명이 단식 투쟁을 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근대뿐만 아니다. 조선 태종 8년(1408년)에는 소금 굽는 일을 하던 암태도 사람들 20명이 왜구의 해적선 9척과 맞서 싸워 이겼다. 왜구의 해적선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200명, 소선도 40~80명 정도가 승선했다. 그러니 9척이면 최소 360명의 왜구들과 맞서 싸워 이겼다는 뜻이니 참으로 엄청난 승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왜선(倭船) 9척이 연일(連日)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니,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賊)이 곧 물러갔다.” <태종실록 8년 1408년 2월 03일 기사>
암태도의 면적은 36.27㎢. 여의도(2.9㎢)의 열두 배 쯤 된다. 암태도의 전답은 11.75㎢나 된다. 여의도의 4배쯤 되는 땅이 암태도의 논과 밭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이지만 농사가 주업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일제하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반 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1920년대 들어 무려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해 갔다. 약탈적 소작료 징수를 참을 수 없었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쟁의를 개시했다. 암태도 오상리 출신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가 조직되었고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구는 거절되었고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문재철에 대항했다.
일제경찰은 농민대표들을 구속시켰다. 암태도 주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차로 400명이 또 2차로 600명이 목포로 나가 목포경찰서 앞에서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언론에서는 아사동맹이라 보도했다. 암태도 주민들의 투쟁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고 한반도는 물론 해외에서 까지 응원이 답지 했다. 암태도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마침내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했고 농민대표들도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외딴 섬에서 이루어낸 항일운동의 값진 승리였다. 하지만 1998년이 돼서야 면소재지인 단고리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촉발시킨 대지주 문재철(1882-1955)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1920년대 당시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과 전라남북도 등지에 755정보(226만5천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암태도에는 약 140정보(42만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0년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무려 1666정보(500만평)로 늘어났다.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했고 1941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응원하던 친일 단체인 흥아보국단 및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재철은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다. 친일지주였던 문재철은 소작쟁의 후 암태도 독립운동가 박복영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도 알려져 그에 대한 평가는 간단치 않은 측면이 있다. 그래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분야에 등재되었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빠졌다. 자본가로서 민족을 위한 교육사업,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과 같은 공로를 세운 점을 인정받아 친일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모실길 중간에는 익금 우실 숲이 있다. 익금우실은 마을의 북쪽 해변인 우실너머와 익금마을 경계에 있다. 우실은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우실산이라 부른다. 익금 우실은 돌담 우실과 팽나무 숲으로 조성된 생우실이 함께 있다. 돌담 우실은 높이 2.2m, 길이 40m의 돌담이고 생우실은 팽나무 숲이다.
우실은 ‘울실’, 즉 ‘마을의 울타리’라는 뜻이다. 대체로 숲이나 돌담, 토담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용적인 목적과 신앙적 의미가 함께한다. 강한 바닷바람의 습격으로부터 농작물과 가옥을 보호하려는 현실적 목적과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액운도 막아보겠다는 비보(裨補)적 의미로 조성된 것이다. 우실은 지역에 따라 우슬, 우술, 울실, 돌담장, 당산거리, 방풍림, 방조림, 어부림, 노거수림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한 토담우실, 기둥을 박아 만든 목책우실, 대나무나 갈대, 짚을 엮어 막는 파자우실, 나무를 심어 숲으로 만든 생우실 등이 있다. 익금 우실은 돌담우실과 팽나무(憉木) 생우실이 함께 있는 특별한 우실이다.
익금 우실 너머는 북쪽 바다다. 겨울에는 북풍이 거세다. 겨울에 마을로 휘몰아쳐 오는 북풍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고 나무도 심어서 현실적으로 바람을 막는 방풍 기능도 하게 했다. 익금 우실은 또 마을을 은폐하는 기능도 있었다.
익금 우실 돌담의 본래 모습은 성곽의 옹성과 같은 구조였다. 그래서 멀리 바다에서 보면 출입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팽나무 숲 외곽에 돌담을 쌓은 것은 돌담을 군사들이 지키는 성곽처럼 보이게 만들어 해적들이 스스로 침범을 포기하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우실은 상징적 재앙뿐만 아니라 왜구와 해적의 침략이라는 현실적 재앙을 막아주는 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