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도 달뜬몰랑길은 진리마을에서 예리마을을 거쳐 돈목마을까지 이어지는 옛길이다. 달뜬 몰랑이란 달이 뜨는 언덕이란 뜻이다. 그 옛날 예리마을 사람들이 진리와 돈목 선착장으로 다니던 길이다. 달뜬몰랑길에는 그 향이 천리까지 간다고 하는 백서향이 지천이다. 산림청이 지정한 희귀·멸종위기종인 백서향이 섬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 것이다. 꽃이 필 때면 그 향기가 온 길에 퍼진다. 달뜬몰랑길은 향기 가득한 길이다.
우이도의 성촌과 돈목 마을 사이에는 사막이 있다. 바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모래 언덕이다. 우이도에서는 ‘산태’라 불렀는데 육지의 학자들이 ‘풍성사구’란 어려운 이름으로 바꾸어버렸다, 산태는 우이도의 상징이자 우이도를 세상에 알린 주역이었다. 80미터 높이의 산태는 작은 사막을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다. 섬 속의 사막이라는 이국적 풍경이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 동력이었다. 오랜 세월 산태는 주민들의 골칫거리였다. 바람 불면 몰아치는 모래 때문에 생활하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우이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그래서 골재로 팔릴 뻔도 했었다. 그런 산태가 명성을 얻으면서 골칫거리가 보물이 됐다. 한동안은 이 사막의 풍경을 보기 위해 한 해 3만 명씩이나 찾아들었다.
산태를 배경으로 유지태, 김지수 주연의 영화 <가을로>가 제작되기도 했으니 섬 속의 사막은 내륙인들의 노스텔지어를 흠뻑 자극했던 셈이다. 산태에는 애틋한 전설도 전해져 신비감을 더했다. 그 옛날 돈목마을 총각과 성촌마을 처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산태 그늘 아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나오지 않았다. 어선을 타고 나간 총각이 풍랑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처녀는 슬픔을 못 이겨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산태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었다. 죽은 총각은 바람이 되고 처녀는 모래가 되었다 했다. 그래서 두 연인이 만나 사랑을 나눌 때마다 산태에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라 했다.
우이도에서는 해변을 장골이라 한다. 그래서 돈목해변은 돈목장골, 성촌해변은 성촌장골, 띠밭너머해변은 띠밭장골이다. 나머지 3개는 돈목에서 도리산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해변들인데 장칠, 장고래미, 넙번지 장골이다. 이 3곳의 해변은 마을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의 해변이기도 하다. 돈목, 성촌 해변은 제법 이름난 해수욕장이지만 해변들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띠밭너머 해변이다. 이 드넓은 해변에는 인공의 구조물이 전혀 없다. 야생의 모습 그대로다. 진리마을에서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초지 언덕을 넘어서면 띠밭 해변이 펼쳐지는데 전봇대 하나 없는 해변은 마치 시원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우이도 성촌 해변에 달랑게의 대규모 서식지가 있다. 7-8월 산란철이면 혼인색을 띈 붉은 색 달랑게 20여만 마리의 대이동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홍게떼의 이동으로 세계적 관광지가 된 호주의 크리스마스섬에 필적할만하다. 그야말로 우이도는 한국의 크리스마스 섬이다. 썰물 때 바닷가 모래 개펄에 구멍을 파고 사는 달랑게는 인기척이 들리면 구멍으로 도망가 버리는데 어민들은 달랑게를 잡아 낙지를 잡는 주낚의 미끼로 주로 이용한다.
우이도란 이름은 섬의 모습이 황소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섬의 서쪽 양단에 두 개의 반도가 돌출한 것이 소귀 모양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구섬’ ‘우개도’라고도 했다. 면적 10.70㎢, 해안선 길이 21㎞, 인구 150여 명이 살아간다. 섬은 1구마을과 2구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군이 주둔하던 진리마을이 1구이고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2구는 성촌과 돈목마을, 2곳의 자연부락을 아우르고 있다. 그밖에도 대초리, 예리 등 몇 개의 작은 마을이 더 있었으나 한동안 폐촌이 되었다가 최근 예리에 한 집 두 집씩 늘어나고 있다. 1구에서 2구로 산길을 넘어가다 보면 폐허가 된 우이도 최초 마을인 대초리를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흑산진 산하 수군이 주둔하던 우이보가 있었던 진리마을이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그래서 도초면 출장소도 진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불렀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도였다.
우이도 진리에는 조선시대 표류되어 필리핀까지 다녀온 세계 여행자 문순득 선생의 생가와 포류담을 기록해 세상에 알린 자산어보의 저자 손암 정약전 선생의 유배터가 있다. 우이도 출신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은 1901년 12월 흑산 홍어를 사서 싣고 영산포로 가다가 표류해서 외국의 여러 나라를 떠돌다 4년만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홍어를 사러 갔던 곳이 신안군 태도군도의 서쪽, 서바다(서쪽바다)이다. 홍어잡이 배들이 태도 바다에서 잡은 홍어를 문순득 같은 상인들은 도매로 사서 영산포로 싣고 나가 팔았던 것이다. 상중하 태도,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태도는 당시 태사도(太砂島)라고 했었다.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琉球國)즉 현재의 오기나와까지 흘러갔다. 문순득 일행은 오까나와에서 3개월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행 배를 탔는데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의 마닐라까지 표류해 갔다. 문순득은 여송국에 9개월을 머물다가 마카오,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에야 고향 우이도로 돌아갔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문순득의 표류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손암 정약전 덕분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은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됐던 신유박해(1801년) 때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은 흑산진 관할이던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는데 문순득이 귀향한 1805년에는 우이도에 살고 있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표류담을 전했고 정약전은 이를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남겼다. 책에는 문순득이 경험한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언어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오키나와 지역의 장례문화와 전통의상에 대한 기록도 있고, 당시 필리핀 사람들이 닭싸움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리마을 입구 바닷가에 보물같은 옛선창이 있다. 축조 된지 300년 남짓 된 진리마을의 옛 선창이다. ‘우이선창’이란 이름을 가진 이 선창은 1745년 3월(영조21년)에 완공됐으니 아마도 원형이 보존된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옛 선창이지 싶다. 한국 해양문화사의 독보적 유물이다. 우이선창은 포구와 방파제, 배를 만드는 선소 기능까지 했었다. 요즘 만드는 방파제들도 큰 태풍 한번이면 무너지기 일쑤인데 3백 년 동안이나 유지됐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우이도 달뜬몰랑길은 진리마을에서 예리마을을 거쳐 돈목마을까지 이어지는 옛길이다. 달뜬 몰랑이란 달이 뜨는 언덕이란 뜻이다. 그 옛날 예리마을 사람들이 진리와 돈목 선착장으로 다니던 길이다. 달뜬몰랑길에는 그 향이 천리까지 간다고 하는 백서향이 지천이다. 산림청이 지정한 희귀·멸종위기종인 백서향이 섬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 것이다. 꽃이 필 때면 그 향기가 온 길에 퍼진다. 달뜬몰랑길은 향기 가득한 길이다.
우이도의 성촌과 돈목 마을 사이에는 사막이 있다. 바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모래 언덕이다. 우이도에서는 ‘산태’라 불렀는데 육지의 학자들이 ‘풍성사구’란 어려운 이름으로 바꾸어버렸다, 산태는 우이도의 상징이자 우이도를 세상에 알린 주역이었다. 80미터 높이의 산태는 작은 사막을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다. 섬 속의 사막이라는 이국적 풍경이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 동력이었다. 오랜 세월 산태는 주민들의 골칫거리였다. 바람 불면 몰아치는 모래 때문에 생활하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우이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그래서 골재로 팔릴 뻔도 했었다. 그런 산태가 명성을 얻으면서 골칫거리가 보물이 됐다. 한동안은 이 사막의 풍경을 보기 위해 한 해 3만 명씩이나 찾아들었다.
산태를 배경으로 유지태, 김지수 주연의 영화 <가을로>가 제작되기도 했으니 섬 속의 사막은 내륙인들의 노스텔지어를 흠뻑 자극했던 셈이다. 산태에는 애틋한 전설도 전해져 신비감을 더했다. 그 옛날 돈목마을 총각과 성촌마을 처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산태 그늘 아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나오지 않았다. 어선을 타고 나간 총각이 풍랑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처녀는 슬픔을 못 이겨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산태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었다. 죽은 총각은 바람이 되고 처녀는 모래가 되었다 했다. 그래서 두 연인이 만나 사랑을 나눌 때마다 산태에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라 했다.
우이도에서는 해변을 장골이라 한다. 그래서 돈목해변은 돈목장골, 성촌해변은 성촌장골, 띠밭너머해변은 띠밭장골이다. 나머지 3개는 돈목에서 도리산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해변들인데 장칠, 장고래미, 넙번지 장골이다. 이 3곳의 해변은 마을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의 해변이기도 하다. 돈목, 성촌 해변은 제법 이름난 해수욕장이지만 해변들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띠밭너머 해변이다. 이 드넓은 해변에는 인공의 구조물이 전혀 없다. 야생의 모습 그대로다. 진리마을에서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초지 언덕을 넘어서면 띠밭 해변이 펼쳐지는데 전봇대 하나 없는 해변은 마치 시원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우이도 성촌 해변에 달랑게의 대규모 서식지가 있다. 7-8월 산란철이면 혼인색을 띈 붉은 색 달랑게 20여만 마리의 대이동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홍게떼의 이동으로 세계적 관광지가 된 호주의 크리스마스섬에 필적할만하다. 그야말로 우이도는 한국의 크리스마스 섬이다. 썰물 때 바닷가 모래 개펄에 구멍을 파고 사는 달랑게는 인기척이 들리면 구멍으로 도망가 버리는데 어민들은 달랑게를 잡아 낙지를 잡는 주낚의 미끼로 주로 이용한다.
우이도란 이름은 섬의 모습이 황소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섬의 서쪽 양단에 두 개의 반도가 돌출한 것이 소귀 모양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구섬’ ‘우개도’라고도 했다. 면적 10.70㎢, 해안선 길이 21㎞, 인구 150여 명이 살아간다. 섬은 1구마을과 2구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군이 주둔하던 진리마을이 1구이고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2구는 성촌과 돈목마을, 2곳의 자연부락을 아우르고 있다. 그밖에도 대초리, 예리 등 몇 개의 작은 마을이 더 있었으나 한동안 폐촌이 되었다가 최근 예리에 한 집 두 집씩 늘어나고 있다. 1구에서 2구로 산길을 넘어가다 보면 폐허가 된 우이도 최초 마을인 대초리를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흑산진 산하 수군이 주둔하던 우이보가 있었던 진리마을이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그래서 도초면 출장소도 진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불렀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도였다.
우이도 진리에는 조선시대 표류되어 필리핀까지 다녀온 세계 여행자 문순득 선생의 생가와 포류담을 기록해 세상에 알린 자산어보의 저자 손암 정약전 선생의 유배터가 있다. 우이도 출신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은 1901년 12월 흑산 홍어를 사서 싣고 영산포로 가다가 표류해서 외국의 여러 나라를 떠돌다 4년만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홍어를 사러 갔던 곳이 신안군 태도군도의 서쪽, 서바다(서쪽바다)이다. 홍어잡이 배들이 태도 바다에서 잡은 홍어를 문순득 같은 상인들은 도매로 사서 영산포로 싣고 나가 팔았던 것이다. 상중하 태도,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태도는 당시 태사도(太砂島)라고 했었다.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琉球國)즉 현재의 오기나와까지 흘러갔다. 문순득 일행은 오까나와에서 3개월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행 배를 탔는데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의 마닐라까지 표류해 갔다. 문순득은 여송국에 9개월을 머물다가 마카오,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에야 고향 우이도로 돌아갔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문순득의 표류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손암 정약전 덕분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은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됐던 신유박해(1801년) 때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은 흑산진 관할이던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는데 문순득이 귀향한 1805년에는 우이도에 살고 있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표류담을 전했고 정약전은 이를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남겼다. 책에는 문순득이 경험한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언어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오키나와 지역의 장례문화와 전통의상에 대한 기록도 있고, 당시 필리핀 사람들이 닭싸움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리마을 입구 바닷가에 보물같은 옛선창이 있다. 축조 된지 300년 남짓 된 진리마을의 옛 선창이다. ‘우이선창’이란 이름을 가진 이 선창은 1745년 3월(영조21년)에 완공됐으니 아마도 원형이 보존된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옛 선창이지 싶다. 한국 해양문화사의 독보적 유물이다. 우이선창은 포구와 방파제, 배를 만드는 선소 기능까지 했었다. 요즘 만드는 방파제들도 큰 태풍 한번이면 무너지기 일쑤인데 3백 년 동안이나 유지됐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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