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도 둘레길

백섬백길

41

3.9km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섬. 입도객 총량제로 지속가능한 섬을 만들어 가는 섬

영산도 둘레길

백섬백길

41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영산리

코스 소개

영산도 둘레길은 영산도 당집을 거쳐 아침 일출이 멋진 깃대봉에 이르는 길이다. 암릉길에 오르면 흑산군도와 발 아래 영산도 명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엔 저멀리 제주도까지 가까이 보인다. 천길 낭떠러지 아래엔 짙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숲길은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활엽수림이 울창하다.

코스세부정보

영산도항( 0 km) 당집( 0.2 km) 깃대봉( 1.9 km) 천막재( 0.7 km) 작은재( 0.5 km) 영산도항( 0.6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영산도 마을 매점 앞 암벽을 따라 멸종위기종 난초인 석곡들이 붙어있다. 국립공원에서도 특별보호 구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석곡들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원시킨 것이다. 참으로 귀한 풍경이다. 영산도의 땅에는 멸종위기종인 구렁이가 바다에서는 멸종위기 해조류인 뜸부기와 해양생물보호종인 거머리말·새우말 등도 살고 있다. 영산도는 생명의 섬이다.

영산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아득하다. 목포항에서 직항이 없으니 흑산도까지 가서 또 한 번 배를 갈아타야 한다. 그래도 섬을 찾는 이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불편하지만 섬은 원형의 미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또 비할 데 없이 고요한 까닭이다. 영산도에 발 디디는 순간 세상의 온갖 소음에서 해방돼 적막에 빠져든다. 온 국토가 공사판 같은 내륙의 소란함이나 자동차 소음도 없고, 오로지 철썩이는 파도 소리뿐이다. 다른 섬들과 달리 영산도는 입도객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주말이나 성수기에도 붐비지 않고 한적한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영산도에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마을 식당과 펜션 등이 있는데. 영산도 입도와 숙식은 모두 예약제로 운영된다. 섬에는 외부에서 해산물이 들어오는 것도 금지다. 오로지 섬에서 생산되는 해산물만 판매한다. 섬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섬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영산도는 한국 섬들의 미래다.

영산도는 느낌이 참 밝고 화사하다. 서남해의 섬들이 대체로 잿빛인데 비해 영산도 바다는 푸르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섬이 작으니 흑산도에서 건너온 우편배달부는 행낭도 없이 우편물 몇 개를 손에 들고 다니며 배달한다. 마을 앞 바다에서는 노부부가 다시마를 가득 실은 거룻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노인이 힘겹게 노를 저어 거룻배를 해변에 댄다. 노부부는 거룻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려 애쓰지만 두 노인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다. 노인은 정자 그늘에 쉬고 있는 마을 사람을 부른다. 정자에 있던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배를 함께 끌어준다. 상생의 공동체가 살아있다.

항간에는 나주 영산포나 영산강의 이름이 영산도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고려 말 삼별초 항쟁 이후 진도의 삼별초 왕국에 동조했던 섬 지역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 시킨 공도정책이 있었다. 이때 흑산도와 영산도 등의 섬 주민들도 나주 땅 남포강(영산강)변에 수용되면서 영산현이 생겼는데 그 이름의 연원이 영산도라는 것이다. 물론 확실한 근거는 없다. 더 큰 섬인 흑산도를 놔두고 굳이 작은 섬 영산도에서 현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단정하기보다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영산도는 지금 30여 가구가 살지만 1960년대에는 100여 가구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섬이다. 예전에는 액기미라는 작은 마을도 하나 더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된지 20년이 넘었고 큰 마을인 영산리 하나만 남았다. 액기미는 뒷고을 이라고도 했는데 액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액기미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옛날 액기미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서 재를 두 개씩이나 넘어 학교에 다녔다. 외딴 마을이 싫어 액기미 사람들은 큰 동네 넘어와 살고 싶어 했다. 큰 동네 사는 이들을 정말 부러워했다. 큰 동네에 빈집이 나오면 바로 샀다. 촌에 산다고 액기미 아이들은 큰 마을 사는 친구들한테도 무시도 당했다. 뭍에서 보면 다 같은 낙도일 뿐인데 작은 섬에서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당산으로 오르는 계단 길 중턱에 영산도의 신전인 당집이 있다. 당집에는 당산 조모님, 당산 조부님, 소당애기씨, 별방 도련님, 도산신님, 김첨지영감님 등의 신들이 좌정해 계신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 당제를 지냈지만 당제의 맥이 끊긴지 여러 해다. 외지인들은 쉽게 오르는 당산이지만 정작 영산도 노인들은 올라보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다. 당산의 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섬 주민들의 전통 신에 대한 외경은 여전하다. 먼 바다 섬, 늘 사나운 파도와 태풍의 위협에 시달리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당산은 본래 초가였는데 낡아서 주저 앉아버리자 서울의 향우회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해 주었다. 영산도 당은 흑산도 최고 당인 진리 당의 분당이다. 진리 당에서 처녀 신을 모셔다 건립했다. 영산도 당의 소당애기씨가 바로 흑산도 진리 당의 그 영험하다는 처녀 신인 것이다. 옛날에는 이 작은 섬에서 3년에 한 번 씩은 꼭 소까지 잡아서 바치며 당제를 지냈을 정도로 당은 절대적인 신앙의 성지였다.

2박3일 동안 제관들이 당에서 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뱃머리에서는 용왕제를 지냈다. 이때는 모든 집들이 각각 정성껏 상을 차려 와 제를 올렸다. “권고(군고)를 치고 다녔어요. 집집마다. 배 만들어 지푸라기로 아저씨 만들어 허사비 배에 태워서 띄우고 그랬어요.” 서남해 섬 지방에서는 풍물을 치는 것을 군고라 한다. 수군 진이 있던 옛날 군사 음악으로 쓰이던 풍물 전통이 군고로 이어진 것이다. 용왕제 때는 나무로 모형 배를 만들고 거기 허수아비까지 태워서 먼 바다로 보냈다. 액운을 다 싣고 떠나달라고. 사람들은 모형 배에 돈도 찔러 넣고 소원도 빌었다. 모형 배는 진짜 배에 싣고 가 먼 바다에 내려놓고 띄워 보냈는데 이때 모형배가 눈에서 안보일 때까지 안 엎어지고 잘 가 주면 마을이 길할 징조고 띄우자마자 바로 엎어져버리면 마을에 액운이 낄 징조라고 여겼다. 어떤 해에는 그 모형배가 멀리 태도나 만재도 까지도 흘러가 그 섬사람들이 줍기도 했다 한다. 위도 띠뱃놀이와 거의 흡사한 풍습이다.

옛날에는 영산도에서도 돛을 세 개나 단 큰 중선 배를 이용해 홍어잡이를 했다. 주로 태도 서바다와, 홍도 뒤쪽 바다에 가서 많이들 잡아오곤 했다. 조기는 영산도 뒤편으로 더 멀리 나가 잡았다. 또 한 때는 주머니처럼 생긴 그물인 낭장망으로는 멸치를 잡았다. 돌미역, 돌톳, 돌김 등 해초도 채취 했다. 요새는 바다도 가뭄이 들어 어느 순간부터 생선도 잘 안 잡히고 해초류도 예전 같지 못하다.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 어업기술 발전이 가져온 남획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해 바다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영산도가 명품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식당과 숙박 시설이 만들어진 뒤 좋아하는 이들은 관광객들뿐만 아니다. 고향 떠나 살던 향우들이 더 기뻐한다. 출향했던 노인들도 많이들 다녀가셨다. 37년 만에 고향을 찾아왔다가 울고 간 노인도 있었다. 먹고 잘 데 가 생겨서 고향에 오기 쉬워졌다고 너무들 좋아 한다. 다시는 발을 못 디딜 줄 알았는데 찾아왔다고 감격스러워들 했다. 1년에 한 번씩이라도 꼭 다녀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갔다. 여행자들도 고향 같은 정을 느끼고 가는 섬. 섬사람들의 고향이 이제는 모든 육지 사람들의 고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섬이야 말로 이 시대 마지막 고향이다.

영산도 둘레길

백섬백길

41

3.9km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섬. 입도객 총량제로 지속가능한 섬을 만들어 가는 섬

코스 소개

영산도 둘레길은 영산도 당집을 거쳐 아침 일출이 멋진 깃대봉에 이르는 길이다. 암릉길에 오르면 흑산군도와 발 아래 영산도 명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엔 저멀리 제주도까지 가까이 보인다. 천길 낭떠러지 아래엔 짙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숲길은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활엽수림이 울창하다.

코스세부정보

영산도항( 0 km) 당집( 0.2 km) 깃대봉( 1.9 km) 천막재( 0.7 km) 작은재( 0.5 km) 영산도항( 0.6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영산도 마을 매점 앞 암벽을 따라 멸종위기종 난초인 석곡들이 붙어있다. 국립공원에서도 특별보호 구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석곡들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원시킨 것이다. 참으로 귀한 풍경이다. 영산도의 땅에는 멸종위기종인 구렁이가 바다에서는 멸종위기 해조류인 뜸부기와 해양생물보호종인 거머리말·새우말 등도 살고 있다. 영산도는 생명의 섬이다.

영산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아득하다. 목포항에서 직항이 없으니 흑산도까지 가서 또 한 번 배를 갈아타야 한다. 그래도 섬을 찾는 이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불편하지만 섬은 원형의 미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또 비할 데 없이 고요한 까닭이다. 영산도에 발 디디는 순간 세상의 온갖 소음에서 해방돼 적막에 빠져든다. 온 국토가 공사판 같은 내륙의 소란함이나 자동차 소음도 없고, 오로지 철썩이는 파도 소리뿐이다. 다른 섬들과 달리 영산도는 입도객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주말이나 성수기에도 붐비지 않고 한적한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영산도에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마을 식당과 펜션 등이 있는데. 영산도 입도와 숙식은 모두 예약제로 운영된다. 섬에는 외부에서 해산물이 들어오는 것도 금지다. 오로지 섬에서 생산되는 해산물만 판매한다. 섬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섬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영산도는 한국 섬들의 미래다.

영산도는 느낌이 참 밝고 화사하다. 서남해의 섬들이 대체로 잿빛인데 비해 영산도 바다는 푸르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섬이 작으니 흑산도에서 건너온 우편배달부는 행낭도 없이 우편물 몇 개를 손에 들고 다니며 배달한다. 마을 앞 바다에서는 노부부가 다시마를 가득 실은 거룻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노인이 힘겹게 노를 저어 거룻배를 해변에 댄다. 노부부는 거룻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려 애쓰지만 두 노인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다. 노인은 정자 그늘에 쉬고 있는 마을 사람을 부른다. 정자에 있던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배를 함께 끌어준다. 상생의 공동체가 살아있다.

항간에는 나주 영산포나 영산강의 이름이 영산도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고려 말 삼별초 항쟁 이후 진도의 삼별초 왕국에 동조했던 섬 지역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 시킨 공도정책이 있었다. 이때 흑산도와 영산도 등의 섬 주민들도 나주 땅 남포강(영산강)변에 수용되면서 영산현이 생겼는데 그 이름의 연원이 영산도라는 것이다. 물론 확실한 근거는 없다. 더 큰 섬인 흑산도를 놔두고 굳이 작은 섬 영산도에서 현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단정하기보다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영산도는 지금 30여 가구가 살지만 1960년대에는 100여 가구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섬이다. 예전에는 액기미라는 작은 마을도 하나 더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된지 20년이 넘었고 큰 마을인 영산리 하나만 남았다. 액기미는 뒷고을 이라고도 했는데 액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액기미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옛날 액기미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서 재를 두 개씩이나 넘어 학교에 다녔다. 외딴 마을이 싫어 액기미 사람들은 큰 동네 넘어와 살고 싶어 했다. 큰 동네 사는 이들을 정말 부러워했다. 큰 동네에 빈집이 나오면 바로 샀다. 촌에 산다고 액기미 아이들은 큰 마을 사는 친구들한테도 무시도 당했다. 뭍에서 보면 다 같은 낙도일 뿐인데 작은 섬에서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당산으로 오르는 계단 길 중턱에 영산도의 신전인 당집이 있다. 당집에는 당산 조모님, 당산 조부님, 소당애기씨, 별방 도련님, 도산신님, 김첨지영감님 등의 신들이 좌정해 계신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 당제를 지냈지만 당제의 맥이 끊긴지 여러 해다. 외지인들은 쉽게 오르는 당산이지만 정작 영산도 노인들은 올라보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다. 당산의 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섬 주민들의 전통 신에 대한 외경은 여전하다. 먼 바다 섬, 늘 사나운 파도와 태풍의 위협에 시달리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당산은 본래 초가였는데 낡아서 주저 앉아버리자 서울의 향우회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해 주었다. 영산도 당은 흑산도 최고 당인 진리 당의 분당이다. 진리 당에서 처녀 신을 모셔다 건립했다. 영산도 당의 소당애기씨가 바로 흑산도 진리 당의 그 영험하다는 처녀 신인 것이다. 옛날에는 이 작은 섬에서 3년에 한 번 씩은 꼭 소까지 잡아서 바치며 당제를 지냈을 정도로 당은 절대적인 신앙의 성지였다.

2박3일 동안 제관들이 당에서 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뱃머리에서는 용왕제를 지냈다. 이때는 모든 집들이 각각 정성껏 상을 차려 와 제를 올렸다. “권고(군고)를 치고 다녔어요. 집집마다. 배 만들어 지푸라기로 아저씨 만들어 허사비 배에 태워서 띄우고 그랬어요.” 서남해 섬 지방에서는 풍물을 치는 것을 군고라 한다. 수군 진이 있던 옛날 군사 음악으로 쓰이던 풍물 전통이 군고로 이어진 것이다. 용왕제 때는 나무로 모형 배를 만들고 거기 허수아비까지 태워서 먼 바다로 보냈다. 액운을 다 싣고 떠나달라고. 사람들은 모형 배에 돈도 찔러 넣고 소원도 빌었다. 모형 배는 진짜 배에 싣고 가 먼 바다에 내려놓고 띄워 보냈는데 이때 모형배가 눈에서 안보일 때까지 안 엎어지고 잘 가 주면 마을이 길할 징조고 띄우자마자 바로 엎어져버리면 마을에 액운이 낄 징조라고 여겼다. 어떤 해에는 그 모형배가 멀리 태도나 만재도 까지도 흘러가 그 섬사람들이 줍기도 했다 한다. 위도 띠뱃놀이와 거의 흡사한 풍습이다.

옛날에는 영산도에서도 돛을 세 개나 단 큰 중선 배를 이용해 홍어잡이를 했다. 주로 태도 서바다와, 홍도 뒤쪽 바다에 가서 많이들 잡아오곤 했다. 조기는 영산도 뒤편으로 더 멀리 나가 잡았다. 또 한 때는 주머니처럼 생긴 그물인 낭장망으로는 멸치를 잡았다. 돌미역, 돌톳, 돌김 등 해초도 채취 했다. 요새는 바다도 가뭄이 들어 어느 순간부터 생선도 잘 안 잡히고 해초류도 예전 같지 못하다.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 어업기술 발전이 가져온 남획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해 바다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영산도가 명품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식당과 숙박 시설이 만들어진 뒤 좋아하는 이들은 관광객들뿐만 아니다. 고향 떠나 살던 향우들이 더 기뻐한다. 출향했던 노인들도 많이들 다녀가셨다. 37년 만에 고향을 찾아왔다가 울고 간 노인도 있었다. 먹고 잘 데 가 생겨서 고향에 오기 쉬워졌다고 너무들 좋아 한다. 다시는 발을 못 디딜 줄 알았는데 찾아왔다고 감격스러워들 했다. 1년에 한 번씩이라도 꼭 다녀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갔다. 여행자들도 고향 같은 정을 느끼고 가는 섬. 섬사람들의 고향이 이제는 모든 육지 사람들의 고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섬이야 말로 이 시대 마지막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