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조도 도리산전망대길은 도리산에 있는 전망대까지 가는 길이다. 도리산 전망대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어 사실 5분 정도만 걸어도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도리산전망대길은 걷는 즐거움보다는 도리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세상의 극치’이기 때문에 기꺼이 가는 길이다. 발 아래 바다와 수많은 섬을 내려다보는 단 한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내어놓는 길이다.
진도군 조도는 프랑스의 황제 나풀레옹도 관심을 가졌던 섬이다. 또 영국 함대 선장이었던 바실 홀이 “세상의 극치, 지구의 극치”라 감탄했던 풍경의 간직한 섬이다. 그 풍경을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 하조도 도리산 전망대다.
조선시대 말, 조도는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영국함대에 의해 그 지정학적 가치가 먼저 발견된 바 있다. 1816년, 청나라 산성동 위해(威海)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조도에 입항해 조사 활동을 했다. 당시 28세였던 리라호 선장 바실 홀 대령은 <조선 서해안과 류큐섬 탐색항해 전말서> 라는 책서에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언급했다. 그는 상조도 도리산에 올랐고 그 기록의 일부가 당시 상황을 전한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극치! 지구의 극치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이 먼저 조도와 우리 섬들의 가치를 알아봤었다. 바실홀은 브라질을 거쳐 6개월 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인 중국에 들렀다 조도에 왔으니 그는 이미 세상의 많은 풍경을 보았던 여행가였다. 그에게서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니 그 풍경이 얼마나 장엄했을 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조도 주민들은 영국인들에게 파이프담배(곰방대)를 권했고 영국인들은 답례로 조도 주민들에게 와인 7병을 선물했는데 맛을 본 주민들은 술맛이 좋다는 평가를 했다고 한다.
바실 홀은 1817년 8월11일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그의 아버지의 파리군사학교 동기 나폴레옹을 만나 조선에 대한 얘기를 전하며 조도 섬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는데 나폴레옹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818년 영국 런던에서 펴낸 ‘조선 서해안과 류큐섬 탐색항해 전말서’란 책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당시 조도를 그린 그림이 영국 런던 캠브리지 국립해양박물관에 남아있다.
상조도와 하조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하나다. 상조도의 중심은 섬등포항이다. 지금은 하조도 어류포항이 종점이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진도 팽목항에서 출항한 배가 섬등포까지도 왔었다. 섬등포는 오랫동안 꽃게 파시로 흥청이던 포구였다. 지금은 진도 서망항으로 위판장이 옮겨가면서 한적한 포구가 되었지만 하조도와 라배도 등의 섬들로 둘러쌓인 천연의 항이라 바람 불면 많은 배들이 피항을 온다. 과거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게 철이면 섬등포에 파시가 섰다. 색시집, 다방, 식당, 철공소, 석유집, 침 놓는 집까지 있었다. 파시 때면 인천, 여수, 통영 등 전국 각지 200여 척의 꽃게 배들이 몰려와 북적거렸다. 이재에 밝은 사람들은 해변에 축양장을 만들기도 했다. 꽃게를 팔지 않고 살려 두었다가 값이 올라갔을 때 출하했다. 어느 해나 크리스마스 대목에 꽃게 값이 가장 비쌌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꽃게잡이 배 선원들과 상인들로 포구가 미어터졌다. 그런 날은 색시집과 다방이 호황을 누렸다. 색시집이 네 집, 다방이 네 집이 있었는데 색시집 하나에 아가씨가 열댓 명씩 됐다. 다방 레지도 한집에 너덧명씩 있었으니 작은 포구에 술을 파는 아가씨들만 칠십명이 넘었다. 일시에 선원들이 많이 몰리다보니 사고도 잦았다. 술 취한 선원이 산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그대로 잠이 들어 산불을 내기도 했다. 포구에 있던 위판장이 진도 본섬의 서망항으로 옮겨가면서 어선들도 떠나고 장사꾼들도 떠나면서 섬등포는 적막하고 쓸쓸한 어촌이 됐다. 골목에는 영화롭던 옛 시절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상조도 도리산전망대길은 도리산에 있는 전망대까지 가는 길이다. 도리산 전망대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어 사실 5분 정도만 걸어도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도리산전망대길은 걷는 즐거움보다는 도리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세상의 극치’이기 때문에 기꺼이 가는 길이다. 발 아래 바다와 수많은 섬을 내려다보는 단 한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내어놓는 길이다.
진도군 조도는 프랑스의 황제 나풀레옹도 관심을 가졌던 섬이다. 또 영국 함대 선장이었던 바실 홀이 “세상의 극치, 지구의 극치”라 감탄했던 풍경의 간직한 섬이다. 그 풍경을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 하조도 도리산 전망대다.
조선시대 말, 조도는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영국함대에 의해 그 지정학적 가치가 먼저 발견된 바 있다. 1816년, 청나라 산성동 위해(威海)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조도에 입항해 조사 활동을 했다. 당시 28세였던 리라호 선장 바실 홀 대령은 <조선 서해안과 류큐섬 탐색항해 전말서> 라는 책서에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언급했다. 그는 상조도 도리산에 올랐고 그 기록의 일부가 당시 상황을 전한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극치! 지구의 극치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이 먼저 조도와 우리 섬들의 가치를 알아봤었다. 바실홀은 브라질을 거쳐 6개월 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인 중국에 들렀다 조도에 왔으니 그는 이미 세상의 많은 풍경을 보았던 여행가였다. 그에게서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니 그 풍경이 얼마나 장엄했을 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조도 주민들은 영국인들에게 파이프담배(곰방대)를 권했고 영국인들은 답례로 조도 주민들에게 와인 7병을 선물했는데 맛을 본 주민들은 술맛이 좋다는 평가를 했다고 한다.
바실 홀은 1817년 8월11일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그의 아버지의 파리군사학교 동기 나폴레옹을 만나 조선에 대한 얘기를 전하며 조도 섬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는데 나폴레옹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818년 영국 런던에서 펴낸 ‘조선 서해안과 류큐섬 탐색항해 전말서’란 책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당시 조도를 그린 그림이 영국 런던 캠브리지 국립해양박물관에 남아있다.
상조도와 하조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하나다. 상조도의 중심은 섬등포항이다. 지금은 하조도 어류포항이 종점이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진도 팽목항에서 출항한 배가 섬등포까지도 왔었다. 섬등포는 오랫동안 꽃게 파시로 흥청이던 포구였다. 지금은 진도 서망항으로 위판장이 옮겨가면서 한적한 포구가 되었지만 하조도와 라배도 등의 섬들로 둘러쌓인 천연의 항이라 바람 불면 많은 배들이 피항을 온다. 과거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꽃게 철이면 섬등포에 파시가 섰다. 색시집, 다방, 식당, 철공소, 석유집, 침 놓는 집까지 있었다. 파시 때면 인천, 여수, 통영 등 전국 각지 200여 척의 꽃게 배들이 몰려와 북적거렸다. 이재에 밝은 사람들은 해변에 축양장을 만들기도 했다. 꽃게를 팔지 않고 살려 두었다가 값이 올라갔을 때 출하했다. 어느 해나 크리스마스 대목에 꽃게 값이 가장 비쌌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꽃게잡이 배 선원들과 상인들로 포구가 미어터졌다. 그런 날은 색시집과 다방이 호황을 누렸다. 색시집이 네 집, 다방이 네 집이 있었는데 색시집 하나에 아가씨가 열댓 명씩 됐다. 다방 레지도 한집에 너덧명씩 있었으니 작은 포구에 술을 파는 아가씨들만 칠십명이 넘었다. 일시에 선원들이 많이 몰리다보니 사고도 잦았다. 술 취한 선원이 산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그대로 잠이 들어 산불을 내기도 했다. 포구에 있던 위판장이 진도 본섬의 서망항으로 옮겨가면서 어선들도 떠나고 장사꾼들도 떠나면서 섬등포는 적막하고 쓸쓸한 어촌이 됐다. 골목에는 영화롭던 옛 시절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