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靑山島)는 그 이름처럼 산과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른 섬이다. 국제슬로시티연맹 공식인증 세계슬로길 1호길인 청산도 슬로길은 총 길이 42.195km로,11코스 17개의 길로 이뤄져 있다. 길마다 부여된 고유의 테마를 따라 길을 걷다보면 구들장논, 돌담, 초분 등 이미 사라져버린 섬 고유의 문화 자산을 자연스럽게 만난다. 이중에서 청산도항에서 시작해서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상서리 돌담마을까지 총 6개 코스의 길을 추천한다. 아니면 6개 코스 중에서 일부 코스만 걸어도 좋다. 어느 코스를 걸어도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봄 유채꽃이 피는 시절이면 청산도에서는 한 달 간 슬로걷기축제가 열린다.
청산도 소재지인 도청리는 과거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이다.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다. 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는 본래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이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 파시가 다시 맥을 이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다. 당시 청산도는 완도보다 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청산도를 기점으로 한 여객선이 목포로 2척, 부산으로 3척이나 다녔다. 대부분의 섬들이 하루 한 척도 제대로 배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다. 더 큰 섬인 완도 사람들도 청산도로 술을 마시러 오곤 했다. 지금은 채 3천 명도 못되지만 1973년 청산도 인구는 1만3천5백 명이나 됐다. 그러나 지나친 남획으로 삼치 또한 씨가 말랐고 1980년대 중반 청산도 파시는 막을 내렸다. 이제 섬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미역 등 양식에 기대 살아간다.
당리 당집은 서편제길 초입 솔숲, 돌담에 쌓여 있는 낡은 건물이다. 지나는 사람들은 영화 <서편제>나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만 찾을 뿐 당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저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청산도 사람들은은 솔밭 당집 아래 돌무덤에서 옛날 동전이나 칼자루 같은 것을 줍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증언한다. 무덤은 이미 일제 때 도굴되어 버렸다. 본래 당집에는 한 장군 신뿐만 아니라 부인 신까지 영정을 그려 함께 모셨더랬다.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였다.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지나다니지 못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는 내려야 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정결하게 살았던 사람을 제주(祭主)로 뽑았었지만 지금은 이장이 제주를 겸한다. 제관은 제주인 이장님 포함 5명 정도가 맡는다. 제관으로 뽑히면 보름 전부터는 상가를 가거나 부부관계 등의 부정 타는 행위를 일체 삼가야 한다. 제를 지내러 가는 날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올 정도로 금기가 철저하다.
회랑포 가는 길에 청산도 초분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래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초분은 일종의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2중 장례 풍습이다. 청산도는 특히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썼다고 한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청산도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다. 구들장 논이다.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 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겨났을 것이다. 구들장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호다.
청산도는 전남 완도에서 19.2km 떨어져 있다. 뱃길로는 완도항에서 50분 거리다. 선사시대부터 청산도에 사람이 살다가, 고려말 조선초 공도정책으로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람살이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새마을운동이란 명목으로 초가집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백 년 세월에도 견고하기만 하다.
청산도(靑山島)는 그 이름처럼 산과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른 섬이다. 국제슬로시티연맹 공식인증 세계슬로길 1호길인 청산도 슬로길은 총 길이 42.195km로,11코스 17개의 길로 이뤄져 있다. 길마다 부여된 고유의 테마를 따라 길을 걷다보면 구들장논, 돌담, 초분 등 이미 사라져버린 섬 고유의 문화 자산을 자연스럽게 만난다. 이중에서 청산도항에서 시작해서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상서리 돌담마을까지 총 6개 코스의 길을 추천한다. 아니면 6개 코스 중에서 일부 코스만 걸어도 좋다. 어느 코스를 걸어도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봄 유채꽃이 피는 시절이면 청산도에서는 한 달 간 슬로걷기축제가 열린다.
청산도 소재지인 도청리는 과거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이다.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다. 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는 본래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이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 파시가 다시 맥을 이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다. 당시 청산도는 완도보다 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청산도를 기점으로 한 여객선이 목포로 2척, 부산으로 3척이나 다녔다. 대부분의 섬들이 하루 한 척도 제대로 배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다. 더 큰 섬인 완도 사람들도 청산도로 술을 마시러 오곤 했다. 지금은 채 3천 명도 못되지만 1973년 청산도 인구는 1만3천5백 명이나 됐다. 그러나 지나친 남획으로 삼치 또한 씨가 말랐고 1980년대 중반 청산도 파시는 막을 내렸다. 이제 섬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미역 등 양식에 기대 살아간다.
당리 당집은 서편제길 초입 솔숲, 돌담에 쌓여 있는 낡은 건물이다. 지나는 사람들은 영화 <서편제>나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만 찾을 뿐 당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저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청산도 사람들은은 솔밭 당집 아래 돌무덤에서 옛날 동전이나 칼자루 같은 것을 줍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증언한다. 무덤은 이미 일제 때 도굴되어 버렸다. 본래 당집에는 한 장군 신뿐만 아니라 부인 신까지 영정을 그려 함께 모셨더랬다.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였다.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지나다니지 못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는 내려야 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정결하게 살았던 사람을 제주(祭主)로 뽑았었지만 지금은 이장이 제주를 겸한다. 제관은 제주인 이장님 포함 5명 정도가 맡는다. 제관으로 뽑히면 보름 전부터는 상가를 가거나 부부관계 등의 부정 타는 행위를 일체 삼가야 한다. 제를 지내러 가는 날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올 정도로 금기가 철저하다.
회랑포 가는 길에 청산도 초분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래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초분은 일종의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2중 장례 풍습이다. 청산도는 특히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썼다고 한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청산도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다. 구들장 논이다.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 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겨났을 것이다. 구들장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호다.
청산도는 전남 완도에서 19.2km 떨어져 있다. 뱃길로는 완도항에서 50분 거리다. 선사시대부터 청산도에 사람이 살다가, 고려말 조선초 공도정책으로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람살이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새마을운동이란 명목으로 초가집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백 년 세월에도 견고하기만 하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