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산둘레길은 소안면 비자리에서 북쪽 해안가 마을인 북암리까지의 숲길 구간이다. 길이 완만하고 대부분의 구간이 해안을 따라가는 숲속길이기 때문에 한 여름이더라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다. 전통 방식으로 옛길을 정비했기 때문에 그 모양새가 예스럽고 아름답다. 소안도에는 대봉산둘레길 외에도 가학산 등산로도 있다. 가학리 뒤쪽 산허리 도로변에 있는 등산안내 이정표를 따라 가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가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다도해 바다는 절경이다.
소안도는 한때 남해의 모스크바라 불릴만큼 항일 운동이 치열했던 곳이다. 함경도의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이다.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백 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을 정도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일제 체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폄훼하는 의미로 사용한 단어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선생 등에 의해 설립됐다. 중화학원이 사립소안학교의 모태가 됐다.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한다.
1924년, 2차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1920~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 인물은 수백 명에 달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1927년, 마침내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시켜버린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했다.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선생 등이 동학군에 합류한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선생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준화 선생은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선생 등이 주도했다. 이들이 조직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단체가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배달청년회는 이 땅에 최초로 생긴 근대적 청년회다. 후일 송내호 선생은 서울청년회와 조선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오랜 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송래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어서야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소안도의 중심지 가학리에는 항일운동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탑 양쪽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하나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고, 또 하나는 사립소안학교다. 기념탑 앞에는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승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 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승리기념비는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소안도는 완도군 소재지로부터 서남방 17.8km 거리에 있으며, 완도군의 최남단에 자리잡은 총면적 23.16㎢ 크기의 섬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에 산지가 발달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소안도는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해수욕장과 상록수림이 발달해 있다. 그 중 미라리 상록수림과 맹선리 상록수림은 각각 천연기념물 339호,340호로 지정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소안도에선 분홍색이 아니라 노란색 꽃이 핀 무궁화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희귀종인 노랑 무궁화의 자생지가 소안도이기 때문이다. 정식 명칭은 황근이지만, 그 색깔 때문에 ‘노랑무궁화’로 불린다. 소안도 해역은 수심이 깊고 물이 맑아 전국 최고 품질의 김과 전복 등이 생산된다.
대봉산둘레길은 소안면 비자리에서 북쪽 해안가 마을인 북암리까지의 숲길 구간이다. 길이 완만하고 대부분의 구간이 해안을 따라가는 숲속길이기 때문에 한 여름이더라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다. 전통 방식으로 옛길을 정비했기 때문에 그 모양새가 예스럽고 아름답다. 소안도에는 대봉산둘레길 외에도 가학산 등산로도 있다. 가학리 뒤쪽 산허리 도로변에 있는 등산안내 이정표를 따라 가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가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다도해 바다는 절경이다.
소안도는 한때 남해의 모스크바라 불릴만큼 항일 운동이 치열했던 곳이다. 함경도의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이다.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백 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을 정도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일제 체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폄훼하는 의미로 사용한 단어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선생 등에 의해 설립됐다. 중화학원이 사립소안학교의 모태가 됐다.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한다.
1924년, 2차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1920~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 인물은 수백 명에 달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1927년, 마침내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시켜버린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했다.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선생 등이 동학군에 합류한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선생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준화 선생은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선생 등이 주도했다. 이들이 조직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단체가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배달청년회는 이 땅에 최초로 생긴 근대적 청년회다. 후일 송내호 선생은 서울청년회와 조선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오랜 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송래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어서야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소안도의 중심지 가학리에는 항일운동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탑 양쪽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하나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고, 또 하나는 사립소안학교다. 기념탑 앞에는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승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 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승리기념비는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소안도는 완도군 소재지로부터 서남방 17.8km 거리에 있으며, 완도군의 최남단에 자리잡은 총면적 23.16㎢ 크기의 섬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에 산지가 발달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소안도는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해수욕장과 상록수림이 발달해 있다. 그 중 미라리 상록수림과 맹선리 상록수림은 각각 천연기념물 339호,340호로 지정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소안도에선 분홍색이 아니라 노란색 꽃이 핀 무궁화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희귀종인 노랑 무궁화의 자생지가 소안도이기 때문이다. 정식 명칭은 황근이지만, 그 색깔 때문에 ‘노랑무궁화’로 불린다. 소안도 해역은 수심이 깊고 물이 맑아 전국 최고 품질의 김과 전복 등이 생산된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