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뱃노랫길

백섬백길

25

9.3km

영어 이름 ‘포트 해밀턴’, 이 땅에서 테니스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 영국군 수병묘지와 인어 신지끼 전설이 내려오는 신화의 섬

거문도 뱃노랫길

백섬백길

25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코스 소개

거문도 뱃노래길은 녹산등대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서도의 서쪽 방면 8부 능선으로 이어진다. 전체 구간 중에서 불탄봉에서 보로봉을 거쳐 거문도등대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백미다. 상록수 숲길에는 후박나무, 가마귀쪽나무, 자금우, 생달나무,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고, 파도와 해풍이 빚은 기암절벽은 아찔하다. 길 끝에는 1905년에 4월부터 100년 세월 동안 매일 15초마다 한 번씩 불빛을 밝혀온 거문도등대가 우뚝 서있다.

코스세부정보

거문도항( 0 km) 덕촌리사무소( 1.5 km) 불탄봉( 1.2 km) 보로봉(전수월산)( 2.2 km) 거문도 등대( 1.6 km) 유림해수욕장( 1.3 km) 거문도항( 1.5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1885년 4월 15일, 영국 내각의 명령을 받은 영국군은 영국 군함과 수송선을 앞세우고 거문도를 점령한다. 영국제국주의 해군은 1887년 2월까지 거문도에 주둔한다. 이른바 ‘거문도사건’이다. 거문도 내해는 수심이 깊어 큰 군함의 정박이 가능하고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대피항이다. 게다가 대마도와 제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은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눈독을 들였다. 영 제국주의는 러시아 견제를 핑계로 거문도를 점령했지만 조선 영토를 식민화하려는 야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거문도가 점령당한 사실을 20여 일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40여 년 전에 이미 해군함정 사마랑호를 동원해 제주에서 거문도까지 해역을 한 달 여에 걸쳐 정밀 탐사한 바 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이었던 해밀턴의 이름을 따 거문도를 해밀턴항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거문도 점령 후 영국군대는 사람이 적게 살던 고도에 군대 막사를 짓고 항만 공사를 했다. 테니스 코트와 당구장 등도 이때 처음 거문도에 생겼다. 당구 2000을 치는 할머니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2년 동안 거문도 주민과 영국 점령군은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치료약을 공급하고 노임을 지불해 가며 공사 일을 시켰다. 섬 주민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 영국군의 유화 전략이었겠지만 조선 왕조 하에서 강제 부역에만 종사했던 섬 주민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겼다. 섬 주민들은 영국군과 협상 차 거문도에 온 조선 정부의 대표 엄세영에게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노임 받고 일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 왕조 지배 세력의 섬에 대한 수탈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재빠른 일본 상인들은 서도에 유곽을 만들었다. 구전에는 영국 수병들이 밤중에 헤엄을 쳐서 유곽으로 가다 빠져 죽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오랜 세월 거문도 사람들을 지켜준 것은 ‘백도’에 대한 신앙심이다. 주민들은 백도 근해에서는 사람이 빠져죽은 적이 없다고 믿어왔다. ‘백도’라는 수호신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백도와 함께 거문도 신앙의 또 한 축은 ‘신지끼’라는 인어였다. 장촌 해변은 신지끼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거문도 전역에서 신지끼 목격담이 전해졌다. 서양과는 달리 한국에서 인어의 전설은 드물다. 인천의 장봉도에도 인어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목격담이다. 장봉도의 인어는 신지끼처럼 섬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다.


신지끼는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얀 살결의 길고 검은 생머리 인어 신지끼가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큰 풍랑이 몰려 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지끼의 저주로 풍랑이 오는 것이라 여겨 신지끼를 기피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차츰 그것을 달리 해석하기 시작했다. 신지끼의 출현을 저주가 아니라 풍랑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악마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악마가 될 뻔한 신지끼를 섬의 수호신으로 만든 것은 섬사람들의 지혜였다.
 

거문도는 여수에서 114km 떨어진 먼 섬이다. 손죽도, 초도 등과 함께 112개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 섬이다. 삼산면의 인구 대부분이 거문도에 산다. 한때는 거문도에만 1만 3천의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삼산면 전체에 약 2,000명만 남았다.


거문도에도 남해안의 다른 섬들처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1976년 장촌 마을의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거문도가 한반도의 고대부터 국제해상무역의 주요 항로였다는 증거다.


거문리에 한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직후부터다. 일본인들이 살다 떠난 집들을 적산 불하받았다. 일본인들은 “얼마 있다가 곧 올 테니 잘 관리하고 있으라.” 당부하고 떠났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거문리에는 아직도 일본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겉모양은 바뀌었어도 골조는 그대로다. <고도민박> 건물 또한 일식 목조건물이다. 건물은 나까끼지라는 일본 여인이 주인이었다. 그녀는 거문도의 어패류를 수집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중개상이었다.


거문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다. 동도와 서도, 고도 세 섬이 모여 거문도를 이룬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세 섬은 어깨 걸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낸다. 세 섬은 오로지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한 몸의 섬이다. 거문도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다. 
 
거문도처럼 두세 개의 섬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제주의 추자도는 상추자·하추자, 통영의 사량도는 상도·하도, 두 개의 섬이 하나의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거문도는 서도가 그 중 크고 동도, 고도 순이다. 고도와 서도는 진즉에 다리로 이어졌고 서도와 동도는 2015년 다리로 연결됐다. 거문도의 행정과 상업 중심지는 가장 작은 섬, 고도다. 고도리에 대부분의 민박, 횟집, 식당을 비롯해 면사무소와 파출소, 농·수협 등의 관공서가 몰려 있다. 작은 섬 고도가 거문도의 중심지가 된 것은 외세의 영향이 크다. 1885년부터 2년간 영국 군대의 거문도 무단 점령 때 영국군은 군대의 주둔을 위해 고도에 항만을 개발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행정의 중심이었던 고도는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이자 물류 중심지가 됐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거문도 파출소 뒤 해안 길을 따라 6백 여 미터를 가면 영국군 수병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화강암 비석과 나무 십자가, 두 개의 묘비가 서 있다. 이곳에 영국군 수병 셋이 누웠다. 화강암 묘비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인 1886년 6월 11일 폭탄 사고로 죽은 수병 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 십자가는 영국군이 물러간 후에 묻힌 영국군 병사의 묘다. 나무 십자가 묘지의 주인은 1903년 10월에 사망한 군함 알미욘 호의 수병 알렉스 우드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떠난 후에도 1930년대까지 항해 도중 이 섬을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섬의 3대 해상 절경을 손꼽으라면 신안 홍도, 옹진 백령도, 그리고 여수의 백도(白島)를 꼽을 수 있다. 모두들 바다의 금강산이라 할 만큼 기암괴석이 빼어난 절경들이다. 여수의 백도는 거문도를 거처야만 갈 수 있다. 거문도 여행객의 대다수는 백도 유람이 최종 목적이다. 그래서 거문도를 가고도 백도를 못 봤다면 거문도에 안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도는 거문도 여행의 백미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km 해상에 있다.

거문도 뱃노랫길

백섬백길

25

9.3km

영어 이름 ‘포트 해밀턴’, 이 땅에서 테니스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 영국군 수병묘지와 인어 신지끼 전설이 내려오는 신화의 섬

코스 소개

거문도 뱃노래길은 녹산등대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서도의 서쪽 방면 8부 능선으로 이어진다. 전체 구간 중에서 불탄봉에서 보로봉을 거쳐 거문도등대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백미다. 상록수 숲길에는 후박나무, 가마귀쪽나무, 자금우, 생달나무,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고, 파도와 해풍이 빚은 기암절벽은 아찔하다. 길 끝에는 1905년에 4월부터 100년 세월 동안 매일 15초마다 한 번씩 불빛을 밝혀온 거문도등대가 우뚝 서있다.

코스세부정보

거문도항( 0 km) 덕촌리사무소( 1.5 km) 불탄봉( 1.2 km) 보로봉(전수월산)( 2.2 km) 거문도 등대( 1.6 km) 유림해수욕장( 1.3 km) 거문도항( 1.5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1885년 4월 15일, 영국 내각의 명령을 받은 영국군은 영국 군함과 수송선을 앞세우고 거문도를 점령한다. 영국제국주의 해군은 1887년 2월까지 거문도에 주둔한다. 이른바 ‘거문도사건’이다. 거문도 내해는 수심이 깊어 큰 군함의 정박이 가능하고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대피항이다. 게다가 대마도와 제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은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눈독을 들였다. 영 제국주의는 러시아 견제를 핑계로 거문도를 점령했지만 조선 영토를 식민화하려는 야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거문도가 점령당한 사실을 20여 일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40여 년 전에 이미 해군함정 사마랑호를 동원해 제주에서 거문도까지 해역을 한 달 여에 걸쳐 정밀 탐사한 바 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이었던 해밀턴의 이름을 따 거문도를 해밀턴항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거문도 점령 후 영국군대는 사람이 적게 살던 고도에 군대 막사를 짓고 항만 공사를 했다. 테니스 코트와 당구장 등도 이때 처음 거문도에 생겼다. 당구 2000을 치는 할머니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2년 동안 거문도 주민과 영국 점령군은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치료약을 공급하고 노임을 지불해 가며 공사 일을 시켰다. 섬 주민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 영국군의 유화 전략이었겠지만 조선 왕조 하에서 강제 부역에만 종사했던 섬 주민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겼다. 섬 주민들은 영국군과 협상 차 거문도에 온 조선 정부의 대표 엄세영에게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노임 받고 일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 왕조 지배 세력의 섬에 대한 수탈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재빠른 일본 상인들은 서도에 유곽을 만들었다. 구전에는 영국 수병들이 밤중에 헤엄을 쳐서 유곽으로 가다 빠져 죽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오랜 세월 거문도 사람들을 지켜준 것은 ‘백도’에 대한 신앙심이다. 주민들은 백도 근해에서는 사람이 빠져죽은 적이 없다고 믿어왔다. ‘백도’라는 수호신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백도와 함께 거문도 신앙의 또 한 축은 ‘신지끼’라는 인어였다. 장촌 해변은 신지끼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거문도 전역에서 신지끼 목격담이 전해졌다. 서양과는 달리 한국에서 인어의 전설은 드물다. 인천의 장봉도에도 인어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목격담이다. 장봉도의 인어는 신지끼처럼 섬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다.


신지끼는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얀 살결의 길고 검은 생머리 인어 신지끼가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큰 풍랑이 몰려 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지끼의 저주로 풍랑이 오는 것이라 여겨 신지끼를 기피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차츰 그것을 달리 해석하기 시작했다. 신지끼의 출현을 저주가 아니라 풍랑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악마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악마가 될 뻔한 신지끼를 섬의 수호신으로 만든 것은 섬사람들의 지혜였다.
 

거문도는 여수에서 114km 떨어진 먼 섬이다. 손죽도, 초도 등과 함께 112개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 섬이다. 삼산면의 인구 대부분이 거문도에 산다. 한때는 거문도에만 1만 3천의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삼산면 전체에 약 2,000명만 남았다.


거문도에도 남해안의 다른 섬들처럼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1976년 장촌 마을의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거문도가 한반도의 고대부터 국제해상무역의 주요 항로였다는 증거다.


거문리에 한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직후부터다. 일본인들이 살다 떠난 집들을 적산 불하받았다. 일본인들은 “얼마 있다가 곧 올 테니 잘 관리하고 있으라.” 당부하고 떠났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거문리에는 아직도 일본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겉모양은 바뀌었어도 골조는 그대로다. <고도민박> 건물 또한 일식 목조건물이다. 건물은 나까끼지라는 일본 여인이 주인이었다. 그녀는 거문도의 어패류를 수집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중개상이었다.


거문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다. 동도와 서도, 고도 세 섬이 모여 거문도를 이룬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세 섬은 어깨 걸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낸다. 세 섬은 오로지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한 몸의 섬이다. 거문도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다. 
 
거문도처럼 두세 개의 섬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제주의 추자도는 상추자·하추자, 통영의 사량도는 상도·하도, 두 개의 섬이 하나의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거문도는 서도가 그 중 크고 동도, 고도 순이다. 고도와 서도는 진즉에 다리로 이어졌고 서도와 동도는 2015년 다리로 연결됐다. 거문도의 행정과 상업 중심지는 가장 작은 섬, 고도다. 고도리에 대부분의 민박, 횟집, 식당을 비롯해 면사무소와 파출소, 농·수협 등의 관공서가 몰려 있다. 작은 섬 고도가 거문도의 중심지가 된 것은 외세의 영향이 크다. 1885년부터 2년간 영국 군대의 거문도 무단 점령 때 영국군은 군대의 주둔을 위해 고도에 항만을 개발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행정의 중심이었던 고도는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이자 물류 중심지가 됐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거문도 파출소 뒤 해안 길을 따라 6백 여 미터를 가면 영국군 수병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화강암 비석과 나무 십자가, 두 개의 묘비가 서 있다. 이곳에 영국군 수병 셋이 누웠다. 화강암 묘비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인 1886년 6월 11일 폭탄 사고로 죽은 수병 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 십자가는 영국군이 물러간 후에 묻힌 영국군 병사의 묘다. 나무 십자가 묘지의 주인은 1903년 10월에 사망한 군함 알미욘 호의 수병 알렉스 우드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떠난 후에도 1930년대까지 항해 도중 이 섬을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섬의 3대 해상 절경을 손꼽으라면 신안 홍도, 옹진 백령도, 그리고 여수의 백도(白島)를 꼽을 수 있다. 모두들 바다의 금강산이라 할 만큼 기암괴석이 빼어난 절경들이다. 여수의 백도는 거문도를 거처야만 갈 수 있다. 거문도 여행객의 대다수는 백도 유람이 최종 목적이다. 그래서 거문도를 가고도 백도를 못 봤다면 거문도에 안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도는 거문도 여행의 백미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km 해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