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상산둘레길

백섬백길

23

5.8km

신비로운 천년의 당숲과 한반도를 품에 안은 섬

안도 상산둘레길

백섬백길

23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코스 소개

안도 상산둘레길은 상산(上山)을 중심축으로 섬 동쪽을 한바퀴 순환하는 길이다. 안도선착장에서 시작하여 이야포해수욕장과 상산 둘레 숲길을 거쳐 다시 선착장으로 순환하는 둘레길 구간으로, 중간중간에 전망대와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길이도 적당하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아 가족들이나 연인들이 산책하듯 걷기 좋은 길이다. 금오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어 비렁길과 함께 걸어도 좋다.

코스세부정보

안도선착장( 0 km) 이야포 해수욕장( 1.2 km) 안도 오름쉼터( 1.2 km) 상산동 전망대( 0.9 km) 대나무 숲길( 1.1 km) 백금포 삼거리( 0.7 km) 안도선착장( 0.7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안도리 마을 앞에는 S자 모양의 작은 바다가 있다. 이 내해를 ‘두멍안’이라 부른다. 작은 바다를 품고 있는 섬의 모습이 바로 편안함의 근원이다. 두멍이란 둠벙, 곧 작은 저수지를 뜻한다. 큰 바다에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데 마을 안쪽으로 가면서 점점 넓어지는 지형이라 마치 그 모습이 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 같다. 두멍안은 높은 데서 보면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그래서 안도는 한반도를 품에 안은 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멍안은 내륙으로 쑥 들어가 있어 안도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혜의 대피항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오랜 옛날에는 해적들의 근거지였다는 설도 있다.

두멍안 때문에 안도는 일제 강점기에 어업 전진기지가 됐다. 일제는 안도에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어업권을 장악했고, 어업조합과 순사 주재소 등을 두고 수산물을 수탈해갔다.


안도 마을 서쪽 이야포 해변은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다. 이 아름다운 해변은 현대사의 비극인 양민학살 현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의 와중에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연락선 동일호를 타고 함포 사격을 하며 이야포로 상륙했다. 일제 패망 후 도주한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망 어장을 안도마을 공동체에 빼앗긴 이웃 섬 주민의 무고로 진압군이 들어왔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안도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노인, 어린이, 여자, 청년으로 분류하여 인민군을 찾아내라며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주민 40여 명을 결박하여 둠벙안 입구 안도선착장으로 끌고 가 11명을 처형했다. 좌익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었다. 또 한국전쟁 때는 350여 명의 피난민이 배를 타고 이야포로 들어와 주민들의 환대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 미군 제트기 4대가 피난선을 폭격해 피난민 150여 명이 몰살당했다. 참으로 아픈 민족사의 현장이다.


안도의 최고 보물은 당산이다. 안도 당산에는 근래까지도 신당인 당집이 있었는데 신당에 모시던 신위가 바로 입도조였던 정씨 내외의 위패였다.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안도 마을의 당제는 정월 보름 오후 다섯 시 무렵주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렸다. 상록수 거목이 울창한 당산 숲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 신상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금오도 장지 마을과 다리로 연결된 안도는 작은 섬이지만 어선은 금오도보다 많다. 금오도가 농업의 섬이라면 안도는 어업 중심의 섬이다. 섬이 기러기 모양과 닮아 기러기 ‘안(雁)’자를 써 안호라 하다가 1910년, 안도(雁島)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또 안도는 금오도와 연도(소리도) 사이에 있는 섬이라 해서 안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금오도 비렁길이 유명해져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안도를 찾는 이들도 부쩍 늘어났다. 지금이야 금오도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금오도보다 더 번성했던 섬이다. 


안도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약 6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질그릇 조각들과 돌도끼, 대팻날, 숫돌, 돌톱 등 5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2007년 안도대교 공사를 하면서도 조가비 팔찌를 찬 인골 2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안도 유적으로 출토된 남자 머리뼈로 복원한 신석기인을 전시한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안도는 고대부터 인근의 거문도, 소리도 등과 함께 국제 해상 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 일본 헤이안 시대 승려 엔닌(794- 864) 선사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안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838년부터 847년 9월까지 10년 간 당나라 유학 생활을 했던 엔닌 선사는 장보고(?-846) 청해진 대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에는 왜인들의 당나라 입국이 금지됐었기에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엔닌은 장보고가 당나라 적산에 세운 절 법화원을 피신처 삼아 불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엔닌은 장보고에게 절절한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엔닌이 당나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장보고가 암살된 뒤라 신라인 무역업자 김진(金眞)의 배를 얻어 탔다. 엔닌은 귀국 길에 고이도와 거차도를 거처 안도에 기항했고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안도 상산둘레길

백섬백길

23

5.8km

신비로운 천년의 당숲과 한반도를 품에 안은 섬

코스 소개

안도 상산둘레길은 상산(上山)을 중심축으로 섬 동쪽을 한바퀴 순환하는 길이다. 안도선착장에서 시작하여 이야포해수욕장과 상산 둘레 숲길을 거쳐 다시 선착장으로 순환하는 둘레길 구간으로, 중간중간에 전망대와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길이도 적당하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아 가족들이나 연인들이 산책하듯 걷기 좋은 길이다. 금오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어 비렁길과 함께 걸어도 좋다.

코스세부정보

안도선착장( 0 km) 이야포 해수욕장( 1.2 km) 안도 오름쉼터( 1.2 km) 상산동 전망대( 0.9 km) 대나무 숲길( 1.1 km) 백금포 삼거리( 0.7 km) 안도선착장( 0.7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안도리 마을 앞에는 S자 모양의 작은 바다가 있다. 이 내해를 ‘두멍안’이라 부른다. 작은 바다를 품고 있는 섬의 모습이 바로 편안함의 근원이다. 두멍이란 둠벙, 곧 작은 저수지를 뜻한다. 큰 바다에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데 마을 안쪽으로 가면서 점점 넓어지는 지형이라 마치 그 모습이 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 같다. 두멍안은 높은 데서 보면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그래서 안도는 한반도를 품에 안은 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멍안은 내륙으로 쑥 들어가 있어 안도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혜의 대피항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오랜 옛날에는 해적들의 근거지였다는 설도 있다.

두멍안 때문에 안도는 일제 강점기에 어업 전진기지가 됐다. 일제는 안도에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어업권을 장악했고, 어업조합과 순사 주재소 등을 두고 수산물을 수탈해갔다.


안도 마을 서쪽 이야포 해변은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다. 이 아름다운 해변은 현대사의 비극인 양민학살 현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의 와중에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연락선 동일호를 타고 함포 사격을 하며 이야포로 상륙했다. 일제 패망 후 도주한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망 어장을 안도마을 공동체에 빼앗긴 이웃 섬 주민의 무고로 진압군이 들어왔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안도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노인, 어린이, 여자, 청년으로 분류하여 인민군을 찾아내라며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주민 40여 명을 결박하여 둠벙안 입구 안도선착장으로 끌고 가 11명을 처형했다. 좌익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었다. 또 한국전쟁 때는 350여 명의 피난민이 배를 타고 이야포로 들어와 주민들의 환대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 미군 제트기 4대가 피난선을 폭격해 피난민 150여 명이 몰살당했다. 참으로 아픈 민족사의 현장이다.


안도의 최고 보물은 당산이다. 안도 당산에는 근래까지도 신당인 당집이 있었는데 신당에 모시던 신위가 바로 입도조였던 정씨 내외의 위패였다.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안도 마을의 당제는 정월 보름 오후 다섯 시 무렵주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렸다. 상록수 거목이 울창한 당산 숲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 신상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금오도 장지 마을과 다리로 연결된 안도는 작은 섬이지만 어선은 금오도보다 많다. 금오도가 농업의 섬이라면 안도는 어업 중심의 섬이다. 섬이 기러기 모양과 닮아 기러기 ‘안(雁)’자를 써 안호라 하다가 1910년, 안도(雁島)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또 안도는 금오도와 연도(소리도) 사이에 있는 섬이라 해서 안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금오도 비렁길이 유명해져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안도를 찾는 이들도 부쩍 늘어났다. 지금이야 금오도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금오도보다 더 번성했던 섬이다. 


안도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약 6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질그릇 조각들과 돌도끼, 대팻날, 숫돌, 돌톱 등 5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2007년 안도대교 공사를 하면서도 조가비 팔찌를 찬 인골 2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안도 유적으로 출토된 남자 머리뼈로 복원한 신석기인을 전시한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안도는 고대부터 인근의 거문도, 소리도 등과 함께 국제 해상 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 일본 헤이안 시대 승려 엔닌(794- 864) 선사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안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838년부터 847년 9월까지 10년 간 당나라 유학 생활을 했던 엔닌 선사는 장보고(?-846) 청해진 대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에는 왜인들의 당나라 입국이 금지됐었기에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엔닌은 장보고가 당나라 적산에 세운 절 법화원을 피신처 삼아 불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엔닌은 장보고에게 절절한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엔닌이 당나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장보고가 암살된 뒤라 신라인 무역업자 김진(金眞)의 배를 얻어 탔다. 엔닌은 귀국 길에 고이도와 거차도를 거처 안도에 기항했고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