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화도 꽃섬길

백섬백길

19

5.3km

마을 공동 관광 수입으로 사람들 모두가 함께 모여 밥을 먹는 공동체 밥상이 살아 있는 여수의 꽃섬

하화도 꽃섬길

백섬백길

19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하화리

코스 소개

하화도는 그 이름처럼 꽃길이다. 인근 금오도 비렁길이 백팩킹 트래커들의 섬이라면, 하화도는 연인들이 걷기에 최고의 섬이다. 하화도 꽃섬길은 마치 대관령 고갯길 같다. 평원을 걷는 느낌이다. 동서남북 막힌 곳 없이 확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천상의 길이다. 기암절벽 위를 연결한 꽃섬다리 위를 걸으면 아찔하다.

코스세부정보

하화도항( 0 km) 전망정자( 0.3 km) 낭끝 전망대( 1.3 km) 순넘밭넘 구절초공원( 1.4 km) 꽃섬다리( 0.7 km) 애림민 야생화공원( 1 km) 하화도항( 0.6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하화도(下花島)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상화도(上花島)와 마주 보고 있는 아랫꽃섬이다. 섬 이름의 뜻이 꽃섬인 것을 적극 활용해 섬을 꽃으로 상징화 했다. 하화도는 섬 곳곳에 꽃을 심고, 꽃길을 만들었다. 요즘도 주말이면 “섬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려와 북적거린다. 최근에는  출렁다리인 ‘꽃섬다리’가 놓였다. 기암절벽이 마주보는 협곡 위를 건널 수있는 70m 높이의 다리다. 꽃섬다리 있는 절벽 아래에 큰 굴이 있는데, 장소가 은밀해 옛날에 밀수꾼들의 접선 장소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밀수와 관련해서 하화도 부속 섬인 무인도 ‘부도’에 흥미로운 사연이 깃든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1970년대 여수 통영 지역에 한창 밀수가 성행할 때 밀수선들이 금괴를 숨기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괴 밀수를 해오던 무역선들이 단속선이 뜨면 재빨리 이 동굴 안에 금괴를 숨겼다고 한다. 1990년대 여수 세관에서 바다 밑을 탐색하기도 했다 하니 그저 뜬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금괴와 함께 녹용 밀수도 흔했는데 실제 총격 사건으로 세관원이 사망한 일도 있었다. 1964년 통영항 녹용 밀수 사건 때 상금 문제로 시비가 붙어 부산세관 감시과장이 권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만큼 밀수는 밀수꾼이나 감시자들에게 모두 황금어장이었다. 그 세관원들은 과연 부도 동굴에서 금괴를 못 찾았던 것일까?


꽃섬은 하나가 아니다. 1km의 거리를 두고 상화, 하화 두 섬이 나란한 형제 섬이다. 상화도는 윗꽃섬, 하화도는 아래 꽃섬이다. 섬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인 2001년 송일곤 감독의 영화 ‘꽃섬’이 하화도에서 촬영되기도 했었다.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꽃섬. 그 이름의 힘이 영화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꽃섬이란 이름은 하화도만의 것은 아니다. 이 나라에는 꽃섬들이 많다. 어디 세상에 꽃이 한 종 뿐일까! 고흥의 상화도 하화도, 신안의 화도, 거제의 화도, 완도의 화도, 태안의 화도 등이 모두 꽃섬이다. 다들 꽃이 많아서 화도라 했다는 유래가 전하지만 옛날에 꽃이 많지 않은 섬이 어디 있었으랴.

하화도는 섬의 형상이 소의 머리와 비슷하다 해서 한때는‘소섬’으로 불리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섬은 꽃이 많아서라기보다 멀리서 보면 섬의 모습이 한 송이 꽃처럼 보여서 꽃섬이라 이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초봄 연초록 새순들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흡사 꽃과 같다. 그럴 때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섬이라는 이름의 섬들이 한결 같이 아주 작고 둥그스름한 섬들인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든다.


오랫동안 공도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하화도에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전란을 피해 들어온 이들이 정착하면서 섬은 다시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처음 인동 장씨가, 그 후 나주 임씨, 파평 윤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65가구 400여명이나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겨우 26가구 40여 명이 살아간다.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산 정상까지도 숲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지었다. 그 조막만한 땅에 고구마, 보리 심고 해초 뜯어 먹으며 살았다.


큰 나무들이 없으니 그 무렵에는 원추리, 선모초(구절초)등 꽃들이 잘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숲이 우거지면서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이름만 남았다. 지금의 꽃들은 둘레길을 만들면서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다. 요새 하화도의 농사 중 가장 큰 것은 부추다. 부추는 베어내고 또 자라면 내내 몇 번이고 수확할 수 있는 채소다. 하지만 하화도 부추는 봄에 딱 2번만 베어내 출하한다. 그러니 영영가가 높다. 한해 두 번 베어내는 부추농사만으로 가구당 평균 300만원의 소득을 안겨주니 부추는 하화도의 효자다.

하화도 꽃섬길

백섬백길

19

5.3km

마을 공동 관광 수입으로 사람들 모두가 함께 모여 밥을 먹는 공동체 밥상이 살아 있는 여수의 꽃섬

코스 소개

하화도는 그 이름처럼 꽃길이다. 인근 금오도 비렁길이 백팩킹 트래커들의 섬이라면, 하화도는 연인들이 걷기에 최고의 섬이다. 하화도 꽃섬길은 마치 대관령 고갯길 같다. 평원을 걷는 느낌이다. 동서남북 막힌 곳 없이 확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천상의 길이다. 기암절벽 위를 연결한 꽃섬다리 위를 걸으면 아찔하다.

코스세부정보

하화도항( 0 km) 전망정자( 0.3 km) 낭끝 전망대( 1.3 km) 순넘밭넘 구절초공원( 1.4 km) 꽃섬다리( 0.7 km) 애림민 야생화공원( 1 km) 하화도항( 0.6 km)

교통

1

출발지

도착지

2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하화도(下花島)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상화도(上花島)와 마주 보고 있는 아랫꽃섬이다. 섬 이름의 뜻이 꽃섬인 것을 적극 활용해 섬을 꽃으로 상징화 했다. 하화도는 섬 곳곳에 꽃을 심고, 꽃길을 만들었다. 요즘도 주말이면 “섬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려와 북적거린다. 최근에는  출렁다리인 ‘꽃섬다리’가 놓였다. 기암절벽이 마주보는 협곡 위를 건널 수있는 70m 높이의 다리다. 꽃섬다리 있는 절벽 아래에 큰 굴이 있는데, 장소가 은밀해 옛날에 밀수꾼들의 접선 장소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밀수와 관련해서 하화도 부속 섬인 무인도 ‘부도’에 흥미로운 사연이 깃든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1970년대 여수 통영 지역에 한창 밀수가 성행할 때 밀수선들이 금괴를 숨기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괴 밀수를 해오던 무역선들이 단속선이 뜨면 재빨리 이 동굴 안에 금괴를 숨겼다고 한다. 1990년대 여수 세관에서 바다 밑을 탐색하기도 했다 하니 그저 뜬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금괴와 함께 녹용 밀수도 흔했는데 실제 총격 사건으로 세관원이 사망한 일도 있었다. 1964년 통영항 녹용 밀수 사건 때 상금 문제로 시비가 붙어 부산세관 감시과장이 권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만큼 밀수는 밀수꾼이나 감시자들에게 모두 황금어장이었다. 그 세관원들은 과연 부도 동굴에서 금괴를 못 찾았던 것일까?


꽃섬은 하나가 아니다. 1km의 거리를 두고 상화, 하화 두 섬이 나란한 형제 섬이다. 상화도는 윗꽃섬, 하화도는 아래 꽃섬이다. 섬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인 2001년 송일곤 감독의 영화 ‘꽃섬’이 하화도에서 촬영되기도 했었다.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꽃섬. 그 이름의 힘이 영화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꽃섬이란 이름은 하화도만의 것은 아니다. 이 나라에는 꽃섬들이 많다. 어디 세상에 꽃이 한 종 뿐일까! 고흥의 상화도 하화도, 신안의 화도, 거제의 화도, 완도의 화도, 태안의 화도 등이 모두 꽃섬이다. 다들 꽃이 많아서 화도라 했다는 유래가 전하지만 옛날에 꽃이 많지 않은 섬이 어디 있었으랴.

하화도는 섬의 형상이 소의 머리와 비슷하다 해서 한때는‘소섬’으로 불리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섬은 꽃이 많아서라기보다 멀리서 보면 섬의 모습이 한 송이 꽃처럼 보여서 꽃섬이라 이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초봄 연초록 새순들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흡사 꽃과 같다. 그럴 때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섬이라는 이름의 섬들이 한결 같이 아주 작고 둥그스름한 섬들인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든다.


오랫동안 공도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하화도에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전란을 피해 들어온 이들이 정착하면서 섬은 다시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처음 인동 장씨가, 그 후 나주 임씨, 파평 윤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65가구 400여명이나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겨우 26가구 40여 명이 살아간다.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산 정상까지도 숲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지었다. 그 조막만한 땅에 고구마, 보리 심고 해초 뜯어 먹으며 살았다.


큰 나무들이 없으니 그 무렵에는 원추리, 선모초(구절초)등 꽃들이 잘 자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숲이 우거지면서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이름만 남았다. 지금의 꽃들은 둘레길을 만들면서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다. 요새 하화도의 농사 중 가장 큰 것은 부추다. 부추는 베어내고 또 자라면 내내 몇 번이고 수확할 수 있는 채소다. 하지만 하화도 부추는 봄에 딱 2번만 베어내 출하한다. 그러니 영영가가 높다. 한해 두 번 베어내는 부추농사만으로 가구당 평균 300만원의 소득을 안겨주니 부추는 하화도의 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