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도 바래길

백섬백길

15

3km

조선시대 한글 소설 ‘구운몽’의 저자, ‘노자 묵고 할배’ 서포 김만중 유배지

노도 바래길

백섬백길

15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코스 소개

노도는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말년에 살았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노도 바래길은 서포문학관을 비롯해 서포 김만중이 살던 집터와 숨을 거둔 뒤 한 달 정도 가매장되었었다는 허묘 등을 둘러보는 유배의 길이다. 남쪽으로 탁 트인 남해 바다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는 길이다. (‘바래’라는 말은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남해 토속어이다.)

코스세부정보

노도항( 0 km) 김만중 허묘( 1.0 km) 서포문학관( 0.5 km) 전망정자( 0.5 km) 작가창작실( 0.5 km) 노도항( 0.5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남해 노도는 <구운몽>의 작가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 생활 중 죽음을 맞이했던 섬이다.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섬들이 천대받았던 조선시대, 섬들은 감옥이었다. 경기와 충청을 제외한 모든 땅이 유배지로 이용됐던 나라지만 특히 섬들은 가장 중한 죄인들이 유배를 갔던 엄중한 감옥이었다. 극형을 겨우 면한 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이었다.

노도는 남해에 딸린 작은 섬이다. 남해로 유배를 왔던 서포 김만중은 말년에 노도로 이주해서 살았다. 앵강만 안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인생의 덧없음을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일까. 어머니의 유고 소식을 접한 서포는 당시 남해 현령 백세부에게 부탁해 유배처를 남해 본섬 망운산 아래에서 노도로 옮겼다고 전한다. 기록은 없으니 물론 구전이다. 남해도가 임금이 보낸 유배처였다면 작고 외딴 섬 노도는 서포가 스스로에게 보낸 유배처였다.

서포는 평안도 선천에서 1년 남짓 유배살이를 하다 풀려난 지 5개월 만에 다시 권력투쟁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유배지였던 남해의 노도에서 김만중은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의 관계를 빗댄 소설 <사씨남정기>를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인의 거두답게 서포는 마지막까지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희빈을 사악한 여인으로 비난하는 글을 남긴 것이니 죽음 직전까지도 권력투쟁을 하다 간 셈이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고전문학가로 꼽히는 서포 김만중은 조선시대 노론 계열의 명문가였던 광산 김씨였다. 서포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피난선 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아명이 선생(船生)이었다. 서포의 아버지 김익겸은 23세의 나이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충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그래서 서포는 유복자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각별했다고 전해진다. 서포의 증조부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이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학자는 역사상 18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동국18현이라 하는데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 사상 최고의 학자들이다.

그런데 동국 18현 중 2명이 서포의 집안이다. 증조부 김장생과 큰 할아버지 신독재 김집. 그뿐만이 아니다. 서포 자신을 포함해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만이 역임했다는 홍문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한 것이 서포의 집안이다. 요절한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또한 서포의 조카였다. 서포 집안은 최고의 노론 명문거족이었다. 게다가 서포는 대제학뿐만 아니라 도승지, 예조·병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등 최고의 관직을 누린 권세가였다. 서포의 정체성은 결코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소설을 쓴 소설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포는 그의 당파인 서인이 남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서인이었던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고 남인이었던 장희빈이 왕후가 되자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했다. 그 여파로 서포는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돌아올 수 유배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권력투쟁은 유배지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소설로 권력투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구운몽>뿐만 아니라 노도에서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씨남정기>는 일반 백성들까지 알아볼 수 있는 한글로 쓴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최고 권력을 누리던 서포가 어째서 양반들의 권력독점 유지에 기여하던 한문이 아니라 한글을 애용했던 것일까. 물론 서포의 한글에 대한 애착은 진정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서포는 그의 문집에서 한글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서 표현하므로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서포만필> 하 160)

서포의 한글 사랑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하지만 그의 한글소설 <구운몽>(남해에서 창작했다고 알려졌으니 최근 연구로 선천에서 집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나 <사씨남정기>가 모두 권력에서 밀려나 유배지에 있을 때 창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함의가 있는 것일까.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을 때 밑바닥 민심을 되돌리는 수단으로 한글을 활용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노도에는 한때 40호 200여 명까지 거주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 13가구 18명의 주민들만이 살아간다. 섬의 형상이 삿갓처럼 보인다 해서 노도는 삿갓섬으로도 불린다. 산은 작지만 노도에는 유난히 굴참나무가 많았다. 굴참나무는 워낙 질기고 강해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도의 굴참나무는 옛날부터 전마선의 노를 만드는데 이용됐다. 굴참나무는 노를 만드는 재료로 남해 본섬이나 여수까지도 팔려나갔다. 굴참나무를 사러오는 외지인들도 많았었다. 노를 만드는 나무가 많았다 해서 섬의 이름이 노도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섬의 산비탈까지 모두 일구어 고구마를 심어 먹고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묵정밭이 됐다. 삼사십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집집마다 작은 전마선을 가지고 갯장어나 붕장어, 문어 등을 잡아 생활했다. 그 시절에는 고기잡이를 해도 판로가 어려웠다. 잡은 생선들을 전마선으로 싣고 나가 광주리에 이고 30리길을 걸어가 장에다 팔고 다시 30리길을 걸어와야 했다. 장에 다녀와 식구를 부르면 전마선(일명 ‘뗏마’)으로 실으러 건너왔다. 파도가 없는 날은 20분 거리지만 물살 거센 날이면 1시간씩 노를 저어야 했다. 징그럽게 고생만 하고 산 세월이었다. 지금은 상전벽해다. 남해 본섬까지 여객선으로 빠르면 2분, 천천히 가도 5분이면 충분하다.

노도에는 서포가 말년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살던 집터와 숨을 거둔 뒤 한 달 정도 가매장 되었었다는 허묘 자리도 남아있다. 노도에서 전해지는 서포는 ‘노자 묵고 할배’다. 섬 주민들은 그가 유배를 왔는지 무얼 왔는지 모르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늘 놀고먹으니 ‘노자 묵고 할배’라 불렀다 한다. 그래서 허묘도 ‘노자나 묏등’이라 불린다.

노도 바래길

백섬백길

15

3km

조선시대 한글 소설 ‘구운몽’의 저자, ‘노자 묵고 할배’ 서포 김만중 유배지

코스 소개

노도는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말년에 살았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노도 바래길은 서포문학관을 비롯해 서포 김만중이 살던 집터와 숨을 거둔 뒤 한 달 정도 가매장되었었다는 허묘 등을 둘러보는 유배의 길이다. 남쪽으로 탁 트인 남해 바다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는 길이다. (‘바래’라는 말은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남해 토속어이다.)

코스세부정보

노도항( 0 km) 김만중 허묘( 1.0 km) 서포문학관( 0.5 km) 전망정자( 0.5 km) 작가창작실( 0.5 km) 노도항( 0.5 km)

교통

출발지

도착지

A

출발지

도착지

남해 노도는 <구운몽>의 작가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 생활 중 죽음을 맞이했던 섬이다.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섬들이 천대받았던 조선시대, 섬들은 감옥이었다. 경기와 충청을 제외한 모든 땅이 유배지로 이용됐던 나라지만 특히 섬들은 가장 중한 죄인들이 유배를 갔던 엄중한 감옥이었다. 극형을 겨우 면한 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이었다.

노도는 남해에 딸린 작은 섬이다. 남해로 유배를 왔던 서포 김만중은 말년에 노도로 이주해서 살았다. 앵강만 안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인생의 덧없음을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일까. 어머니의 유고 소식을 접한 서포는 당시 남해 현령 백세부에게 부탁해 유배처를 남해 본섬 망운산 아래에서 노도로 옮겼다고 전한다. 기록은 없으니 물론 구전이다. 남해도가 임금이 보낸 유배처였다면 작고 외딴 섬 노도는 서포가 스스로에게 보낸 유배처였다.

서포는 평안도 선천에서 1년 남짓 유배살이를 하다 풀려난 지 5개월 만에 다시 권력투쟁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유배지였던 남해의 노도에서 김만중은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의 관계를 빗댄 소설 <사씨남정기>를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인의 거두답게 서포는 마지막까지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희빈을 사악한 여인으로 비난하는 글을 남긴 것이니 죽음 직전까지도 권력투쟁을 하다 간 셈이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고전문학가로 꼽히는 서포 김만중은 조선시대 노론 계열의 명문가였던 광산 김씨였다. 서포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피난선 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아명이 선생(船生)이었다. 서포의 아버지 김익겸은 23세의 나이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충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그래서 서포는 유복자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각별했다고 전해진다. 서포의 증조부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이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학자는 역사상 18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동국18현이라 하는데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 사상 최고의 학자들이다.

그런데 동국 18현 중 2명이 서포의 집안이다. 증조부 김장생과 큰 할아버지 신독재 김집. 그뿐만이 아니다. 서포 자신을 포함해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만이 역임했다는 홍문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한 것이 서포의 집안이다. 요절한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또한 서포의 조카였다. 서포 집안은 최고의 노론 명문거족이었다. 게다가 서포는 대제학뿐만 아니라 도승지, 예조·병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등 최고의 관직을 누린 권세가였다. 서포의 정체성은 결코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소설을 쓴 소설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포는 그의 당파인 서인이 남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서인이었던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고 남인이었던 장희빈이 왕후가 되자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했다. 그 여파로 서포는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돌아올 수 유배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권력투쟁은 유배지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소설로 권력투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구운몽>뿐만 아니라 노도에서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씨남정기>는 일반 백성들까지 알아볼 수 있는 한글로 쓴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최고 권력을 누리던 서포가 어째서 양반들의 권력독점 유지에 기여하던 한문이 아니라 한글을 애용했던 것일까. 물론 서포의 한글에 대한 애착은 진정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서포는 그의 문집에서 한글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서 표현하므로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서포만필> 하 160)

서포의 한글 사랑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하지만 그의 한글소설 <구운몽>(남해에서 창작했다고 알려졌으니 최근 연구로 선천에서 집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나 <사씨남정기>가 모두 권력에서 밀려나 유배지에 있을 때 창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함의가 있는 것일까.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을 때 밑바닥 민심을 되돌리는 수단으로 한글을 활용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노도에는 한때 40호 200여 명까지 거주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 13가구 18명의 주민들만이 살아간다. 섬의 형상이 삿갓처럼 보인다 해서 노도는 삿갓섬으로도 불린다. 산은 작지만 노도에는 유난히 굴참나무가 많았다. 굴참나무는 워낙 질기고 강해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도의 굴참나무는 옛날부터 전마선의 노를 만드는데 이용됐다. 굴참나무는 노를 만드는 재료로 남해 본섬이나 여수까지도 팔려나갔다. 굴참나무를 사러오는 외지인들도 많았었다. 노를 만드는 나무가 많았다 해서 섬의 이름이 노도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섬의 산비탈까지 모두 일구어 고구마를 심어 먹고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묵정밭이 됐다. 삼사십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집집마다 작은 전마선을 가지고 갯장어나 붕장어, 문어 등을 잡아 생활했다. 그 시절에는 고기잡이를 해도 판로가 어려웠다. 잡은 생선들을 전마선으로 싣고 나가 광주리에 이고 30리길을 걸어가 장에다 팔고 다시 30리길을 걸어와야 했다. 장에 다녀와 식구를 부르면 전마선(일명 ‘뗏마’)으로 실으러 건너왔다. 파도가 없는 날은 20분 거리지만 물살 거센 날이면 1시간씩 노를 저어야 했다. 징그럽게 고생만 하고 산 세월이었다. 지금은 상전벽해다. 남해 본섬까지 여객선으로 빠르면 2분, 천천히 가도 5분이면 충분하다.

노도에는 서포가 말년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살던 집터와 숨을 거둔 뒤 한 달 정도 가매장 되었었다는 허묘 자리도 남아있다. 노도에서 전해지는 서포는 ‘노자 묵고 할배’다. 섬 주민들은 그가 유배를 왔는지 무얼 왔는지 모르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늘 놀고먹으니 ‘노자 묵고 할배’라 불렀다 한다. 그래서 허묘도 ‘노자나 묏등’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