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한산도 역사길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작전과 훈련을 위해 이순신 장군이 다녔던 옛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한산도와 교량으로 연결돼 있는 추봉도에도 걸을 수 있는 좋은 해변길이 있어 한산도와 더불어 하나의 코스로 추천한다.
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 장군(1545-1598)이었는데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임진왜란 중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2월, 파직될 때까지 한산도에 주둔했다. 7년 전쟁 중 3년 8개월을 한산도에 머물렀으니 섬은 가히 장군의 섬이라 이를 만하다.
통영 사람들은 한산도에 이순신 장군의 혼백이 서려있다고 믿는다. 한산도의 지명들은 거의 모두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 한산면 소재지가 있는 진두(陣頭)마을은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창동은 군수창고가 있던 곳이고 염개는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망산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며 망을 보던 곳이다. 대섬은 화살을 만들 대나무를 조달하던 곳이다. 왜군의 시체를 매장했다는 곳은 왜매치, 조선군이 신호로 고동을 불었다는 곳은 고동산이다. 장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섬이 해갑도다. 의암(衣巖)마을은 군복을 만들던 곳이다. 야소(冶所)는 무기를, 여차는 병선을 수리하던 곳이다. 두억개는 왜적의 머리를 수도 없이 베었다는 곳이다.
현재 한산도에는 제승당, 영당,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건물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 당시에 지은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 진영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돼버렸다. 왜군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조선 수군이 퇴각하면서 소개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영조 15년(1739년)에 이르러서야 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 옛터에 다시 건물을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했다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큰 전투가 없었다. 세력균형 상태가 지속됐다. 당시 한산도에는 판옥선 150여 척이 있었고 1만5천~2만 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승당의 수루에서는 한산도 앞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환히 다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배들에서는 한산도 진영을 엿볼 수가 없다. 해갑도란 섬이 가로막고 있어서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이순신 장군이 시름하던 수루(戌樓)는 정자만 하나 딸랑 지어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난중일기에 수루에 도배를 했고 잠을 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망루뿐만 아니라 숙직할 수 있는 방도 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루는 한산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군사기지 어디에나 있던 망루다. 그래서 과거에는 군에 가는 것을 수자리 살러간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閑山島歌)>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지학 전문가이자 <한산도가>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종학 전 독도박물관장은 “장군이 1597년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한산도 역사길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작전과 훈련을 위해 이순신 장군이 다녔던 옛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한산도와 교량으로 연결돼 있는 추봉도에도 걸을 수 있는 좋은 해변길이 있어 한산도와 더불어 하나의 코스로 추천한다.
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 장군(1545-1598)이었는데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임진왜란 중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2월, 파직될 때까지 한산도에 주둔했다. 7년 전쟁 중 3년 8개월을 한산도에 머물렀으니 섬은 가히 장군의 섬이라 이를 만하다.
통영 사람들은 한산도에 이순신 장군의 혼백이 서려있다고 믿는다. 한산도의 지명들은 거의 모두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 한산면 소재지가 있는 진두(陣頭)마을은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창동은 군수창고가 있던 곳이고 염개는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망산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며 망을 보던 곳이다. 대섬은 화살을 만들 대나무를 조달하던 곳이다. 왜군의 시체를 매장했다는 곳은 왜매치, 조선군이 신호로 고동을 불었다는 곳은 고동산이다. 장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섬이 해갑도다. 의암(衣巖)마을은 군복을 만들던 곳이다. 야소(冶所)는 무기를, 여차는 병선을 수리하던 곳이다. 두억개는 왜적의 머리를 수도 없이 베었다는 곳이다.
현재 한산도에는 제승당, 영당,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건물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 당시에 지은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 진영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돼버렸다. 왜군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조선 수군이 퇴각하면서 소개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영조 15년(1739년)에 이르러서야 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 옛터에 다시 건물을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했다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큰 전투가 없었다. 세력균형 상태가 지속됐다. 당시 한산도에는 판옥선 150여 척이 있었고 1만5천~2만 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승당의 수루에서는 한산도 앞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환히 다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배들에서는 한산도 진영을 엿볼 수가 없다. 해갑도란 섬이 가로막고 있어서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이순신 장군이 시름하던 수루(戌樓)는 정자만 하나 딸랑 지어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난중일기에 수루에 도배를 했고 잠을 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망루뿐만 아니라 숙직할 수 있는 방도 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루는 한산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군사기지 어디에나 있던 망루다. 그래서 과거에는 군에 가는 것을 수자리 살러간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閑山島歌)>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지학 전문가이자 <한산도가>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종학 전 독도박물관장은 “장군이 1597년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