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섬 2025년 8월호

항일 독립의 성지, 해방의 섬, 백섬백길 29코스 소안도

일제 강점기 남해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독립운동이 강성했던 경이로운 섬, 소안도. 지금은 3천여명이 사는 작은 섬이지만 건국훈장 수상자가 20명에 고인 독립운동가를 89명이나 배출한 위대한 섬이다. 일제강점기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함께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3대 성지중 하나였다.

2025년 제6회 섬의 날 공식행사로 <백섬백길> 걷기 대회가 소안도에서 열린 것도 그 때문이다. 소안도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는 갑오년(1894년)의 동학혁명에 젖줄을 대고 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 접주 나성대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이순보,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고 소안도 주민들은 동학군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이준화 등은 의병을 조직해 소안도 인근 당사도의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하기 했다.

소안도 주민들은 1905년부터 무려 13년 동안이나 왕실 소속의 궁납전(宮納田)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사도세자의 5세손이자 친일 매국노인 이기용 자작으로부터 토지를 되찾기 위해 법정 투쟁을 했다. 마침내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사립소안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가 독립운동가 배출의 저수지였다.

소안학교는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대단했다. 1924년, 2차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을 필두로 수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 신문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백 명에 달했으니 소안도는 독립운동의 메카라 할만 했다. 감옥에 가는 주민들이 생기면 소안도에 남은 사람들도 감옥 간 주민과 고통을 하께 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하니 참으로 의리가 깊은 섬이었다.

소안도에는 감옥 간 사람들이 많다보니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들을 위한 보양식도 발달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에서 출옥을 해 소안도로 돌아오면 어혈을 풀어주고 구타와 고문을 당한 장독을 빼주고 또 몸보신을 시켜주기 위해 다양한 민간 처방들이 행해졌다. 생지황으로 막걸리를 담아 먹이면 어혈이 풀렸다. 개머루 뿌리를 찧어서 고문으로 멍든 데 붙이면 푸른 물이 겉으로 다 빠져나왔다.

잎이 지네 모양으로 생긴 지네초란 약초도 약효가 뛰어났다. 순사들에게 매 맞은 상처에도 지네초를 다려 먹이거나 생으로 짜서 먹여도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부러진 뼈도 금방 붙을 정도였다. 기력 회복을 위해서는 보신탕이나 개소주를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해산물로도 다양한 보양식을 만들어 먹였다. 대물 붕장어와 맥문동, 삽추(창출), 한갈쿠, 우슬 한약 달인 물을 넣고 죽을 끓여서 먹였다.

전복도 옥살이로 축이 난 몸을 회복시키는데 큰 보약이었다. 전복은 다려서 먹였다. 지금처럼 전복이 흔하지 않을 때 전복은 금덩어리였다. 귀하디 귀한 자연산 전복을 옹기그릇에 넣고 물을 부은 뒤 찹쌀을 한줌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옹기를 진흙에 파묻은 뒤 그 위에다 불을 땠다. 그렇게 푹 고아낸 전북을 먹으면 몸의 회복이 빨랐다. 인삼이 있으면 인삼도 넣고 다렸다. 그야말로 음식이 약이었다. 식약동원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었다.

복쟁이(복어) 요리도 옥살이 한 이들의 보양식으로 좋은 음식이었다. 독을 잘 제거한 복어에 찹쌀을 넣고 끓인 복아 곰국은 기력 회복에 그만이었다. 잘 말려둔 참복찜도 입맛을 회복 시켜주는데 특효였다. 복어잡이 미끼는 주로 보찰(거북손)을 이용했다. 복어는 내장을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담가 핏기를 아주 깨끗이 뺀 뒤 말렸다. 잘 마른 복어 사이에 된장, 고추장, 깨소금을 넣은 양념을 바른 뒤 갈라진 배를 덮고 몸통을 볏짚으로 묶은 뒤 떡 시루에 넣고 떡을 쪄내듯이 쪘다.

2시간 남짓 불을 때면 알맞게 잘 익었다. 잘 쪄낸 복어 위에 참기름을 발라서 밥상에 올렸다. 보양으로도 좋았고 맛으로도 따라 올 음식이 없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음식이지만 복원해 낸다면 이보다 좋은 요리는 다시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