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섬 2025년 1월호

겨울에 가장 걷기 좋은 섬, 백섬백길 31코스 청산도

고등어를 퇴비로 쓰던 청산도

남쪽 섬들은 바람만 세게 불지 않으면 겨울에도 따뜻하다. 배추와 상추, 마늘과 시금치가 한 겨울 노지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은 해양성 기후 때이다. 서울이 영하 10도가 넘을 때도 남쪽 바다 섬들은 영상이다. 그래서 남족 섬들은 겨울이야말로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청산도는 도시인들에게 남도의 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섬이 되었다. 그것은 걷기 좋은 길이나 수려한 경관 때문만이 아니다. 무분별한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비껴나 있는 것이 보다 큰 이유다. 도시인들은 청산도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원형을 발견하고 열광한다. 많은 섬들이 이미 개발이란 미명하에 옛것들을 파괴해 버렸다. 하지만 청산도는 전통과 자연을 소중히 보존해 왔다. 그것이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산도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과거 도청리는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이다.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다. 파시(波市)는 성어기에 생선을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임시 시장이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 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주민들에게 세를 주고 점포를 빌렸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 집이었다. 한창 때는 술과 웃음을 파는 색시가 200명이 넘기도 했다. 색시 집에는 일본 기생인 게이샤들까지 있었다. 고등어 선단은 한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의 고등어를 잡아왔다. 운반선으로 다 처리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잡히면 일부는 바다에 버렸다. 도청리 앞바다는 고등어 썩는 냄새에 골머리를 앓았다. 주민들은 고등어를 얻어다 소금 간을 해서 간독에 저렸다. 그래도 남는 고등어들은 어비(퇴비)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지금처럼 생선이 귀한 시절에 고등어 퇴비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청산도의 신전, 당리 당집

슬로시티로 지정되고 걷기 길인 트레일인 청산여수길이 생기면서 청산도를 찾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청산여수길을 걷는다. 도락리 동구정 길 언덕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속의 그 구불구불한 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시멘트로 포장돼 버린 서편제길이 아니다. 보리밭 가운데 서 있는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다. 당리 당집이다. 서편제길 초입 솔밭 안 돌담에 쌓여 있는 낡은 건물이 당집이다. 하지만 서편제 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은 대문짝만하게 서 있는데 당집에 대한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당집 앞에 작은 비석만 하나 서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신앙의 성소였고 섬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셨던 신전이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만큼도 대접을 못 받고 있다. 저 당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영화 서편제나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만 찾을 뿐 당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저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주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였다.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지나다니지 못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는 내려야 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낸다. 참으로 귀한 풍습이다.

왜구의 안마당이던 청산도

읍리의 고인돌이 증거 하듯이 청산도의 사람살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고려말 조선초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이 섬에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주민 거주가 금지된 청산도, 추자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르러 상선을 약탈하고, 무명 50필, 미곡 30여 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기사)

성종 21년(1490)에도 청산도와 추자도에 왜구가 나타났다.

“추자도·청산도에 들어가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며, 왜인들도 거기에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는데, 부근 제도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고기잡이배가 아니고 왜적이며….”

중종 27년 <실록> 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달량도, 추자도뿐만 아니라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해진다. 전란 전부터 서남해 섬들은 이미 왜구들의 수중에서 농락당했으니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에 시달렸다. 청산도라고 다르지 않았다. 장한철(1744-?)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하다. <표해록>은 후일 대정 현감을 지내게 되는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물게 된다. 당시 청산도는 이웃 섬 신지도진에 부속되어 있었다.

“이 섬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진진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 한 사람을 거느리고 어제 저녁 이 섬에 들어와 혹은 이정(理正)을 몽둥이로 때려 주식(酒食)을 억지로 달라 하여 먹으며 혹은 남자 광대를 족쳐서 전재(錢財)를 빼앗기도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기까지 합니다.”

장한철은 청산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왕화(王化)를 입은 육지의 땅들도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감시마저 미치지 못하는 섬은 그 정도가 더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섬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사람이 삶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통 또한 그러하다. 섬으로, 산 속으로 숨는다 해서 삶의 고통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고 시집간다

이 들길의 마을들,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래 이보다 더 절박한 농사의 유물이 또 있을까. 구들장 논.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랑이 논이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저 구들장 논이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 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이다.

지금이야 쌀값이 라면 값보다 못한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청산도에서 논은 귀하고 소중하다. 논은 섬사람들을 먹이고 입힌다. 청산도 겨울 들녘에는 볏단과 두엄더미들이 움막처럼 쌓였다. 두엄, 저 냄새 나는 똥거름을 쌀과 마늘, 유자와 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땅이다다. 오로지 땅만이 똥냄새를 향기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지녔다. 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소다. 육체를 살찌우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생명의 발전소.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어있는 마을들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새마을운동이란 명목으로 초가집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다. 오래된 전통은 싸구려 근대화의 이름으로 철저히 짓밟혀 버렸다. 새마을운동 때 돌담을 헐어내고 세웠던 시멘트 블록 담은 불과 40년 세월을 못 버티고 시커멓게 썩어간다.

하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 백 년 세월에도 여전히 견고하기만 하다. 바람이 거센 섬의 돌담은 육지 내륙과 달리 흙을 넣지 않고 돌만으로 쌓은 강담이다. 섬이나 해안가 집들은 모두 이런 강담이다. 이 돌담은 바람을 차단하는 바람의 방어벽이 아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담도 오랜 세월 큰 바람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지 않았다. 바람을 분산, 통과시켜주기 위해 돌담을 쌓았다. 허술해 보이는 돌담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고 틈을 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람과 섬사람들 사이에 생긴 평화 협정의 산물. 청산도 돌담은 바람의 통로다.

초분, 생사의 바다를 건너는 배

이 들길의 마을들,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다. 국가 중용농업유산 1호로 지정된 구들장 논이다.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까지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랭이 논이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것이 구들장 논이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이다.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 초분 한 기가 땅 위에 떠 있다. 풍장,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다. 볏짚은 삭을 대로 삭았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다.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청산도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이다. 청산도에서는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른다.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린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분은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2중 장례 풍습이다. 지금은 섬 지방에서도 초분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근래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매장되기도 한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어제는 섬을 집어 삼킬 듯 풍랑 거세던 바다가 오늘은 또 간데없이 평화롭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하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 데도 배가 필요 하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